‘정·경 혈투’ 전쟁은 계속된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1.08.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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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13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 류진 풍산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허창수 GS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 박용현 두산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강덕수 STX 회장,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 ⓒ시사저널 박은숙

재계가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안으로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공생 발전’ 화두를 던지며 압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과 12월 대통령 선거로 대표되는 정치 일정은 이러한 흐름이 일회성이 아니라는 것을 예상케 한다. 밖으로는 또 어떤가.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한 것으로 상징되는 시장 환경의 급변이 예사롭지 않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글로벌 경제 전쟁의 흐름이 점점 빨라지면서 기업들은 미래의 생존에 대한 위기감을 절감하는 분위기이다. 과연 재계는 이처럼 안팎에서 닥쳐오는 파도를 어떻게 헤쳐갈 것인가.

“탐욕 경영에서 윤리 경영으로,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의 책임으로, 부익부 빈익빈에서 상생 번영으로 진화하는 시장경제의 모델이 요구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8·15 경축사에서 ‘공생 발전’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예상치 못한 어젠다 세팅이었다. 집권 후반기를 관통할 이 화두는 지난해 던진 ‘공정 사회’를 이어받은 것이다. 정운찬 전 총리가 주장한 ‘동반 성장’과도 맥락이 같다. ‘공생 발전’이 입안되기까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박형준 대통령 사회특보는 지난 8월18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오래전부터 대통령이 생각한 철학이다. 국정을 이끄는 가운데 세계의 변화를 통찰하면서 정책을 통해 얻은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도 ‘공생 발전’으로 상징되는 대기업에 대한 압박은 향후의 정치적인 일정과 맞물려 해석되고 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전체 지형도를 다시 그리는 작업의 하나라는 것이다. 전략 기획에 능하고 아이디어가 많은 박형준 특보의 역할설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향후 재계를 향한 압박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많다. 정치권과 각을 세우던 재계도 최근에는 부쩍 몸을 낮추는 흐름이다.

그동안 재계는 공세적으로 대응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감세 철회와 관련해 정책 혼선이 빚어지고 ‘반값 등록금’ 얘기가 나오자 “정책 신뢰성을 깨는 포퓰리즘이다”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앞서 정병철 전경련 부회장은 제주도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해 “국가 중대 사업이 당리당략에 밀려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라며 정치권을 비판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정치권이 추진 중인 반값 등록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 또한 정운찬 전 총리가 주장한 ‘초과이익 공유제’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용어이다. 이해도 안 가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며 불쾌감을 토로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재계는 정치권과 한번 붙어보자는 자세보다는 그동안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재계 주요 인사들의 이러한 발언은 정치권 인사들을 격분케 했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재벌 개혁 없는 선진화는 불가능하다’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김영환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정부조차 대기업 권력에 손을 못 대기 때문에 국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 대기업과 재벌그룹들이 정치권에 바른 소리, 쓴소리, 요구할 것은 하되 스스로 자성하고 돌아볼 때가 되었다”라고 강조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계, 말은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

지난 8월17일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주최로 열린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에 대한 공청회’는 이런 배경에서 열렸다. 지난 6월29일 열린 ‘대·중소기업 동반 성장 공청회’에 참석하지 않은 허회장은 이날도 공청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해외에 나갔다가 부랴부랴 귀국해 한 시간 늦게 참석했다. 재계 수장이 국회를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데 대해 의원들은 분노했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은 “왜 국회를 무시하고 능멸하는 태도로 일관하느냐”라고 질타했다. 재계와 정치권의 갈등이 커진 데는 이처럼 재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오만함도 한몫했다.

재계는 어떤 분위기일까. 말은 못하지만 부글부글 끓고 있다. 8월17일 만난 한 대기업의 고위 인사는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아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노무현 정권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더 이상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인기가 없어지니 기업들을 때려서 내년 선거를 앞두고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 아닌가. 아니, 재계가 선거 때만 되면 두드리는 동네북이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기업 최고경영자를 지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면서도 재계는 무언가 ‘성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일단은 동반 성장 노력을 가속화하면서 중소기업들과의 일감 나누기 등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총수가 직접 나눔과 공생을 실천하는 모습을 찾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 범현대가 그룹사들이 ‘아산나눔재단’을 만들기로 한 가운데 8월16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진홍 설립위원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을 비롯한 그룹 회장단 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청와대 “이제는 대기업이 화답할 차례”

청와대는 약간 다르다. 취임 초부터 감세 등을 통해 재계에 배려를 해주었으니 이제는 재계가 적극적으로 화답할 때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과실을 따게 했으니 나누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청와대가 지난해 9월 ‘공정 사회’와 관련해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명회에서 “재정 확대 및 조기 집행, 노사 관계 선진화, 타임오프제 등을 통해 정부가 앞장서서 위기를 극복했고 대기업이 최대 수혜를 받았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상생 경영을 하는 등 이제는 대기업 차례이다”라고 이동우 대통령실 정책기획관이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동반 성장’ ‘공정 사회’ ‘공생 발전’ 등의 어젠다가 실제로 얼마나 힘 있게 굴러갈지는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레토릭(수사) 이상의 힘을 갖기가 어렵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이 나오는 이유는, 어젠다와 현실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민간인 사찰 사건에 대한 부실한 수사로 공정 사회론은 종을 쳤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권력을 쥔 쪽이 현실에서 솔선수범을 하지 않는데 힘이 실리겠느냐는 것이다. 위장 전입한 사람들이 청문회를 통과하고 청와대와 관련 있는 수사를 엄격히 한 검사가 좌천되는 등의 상황에서 과연 이러한 어젠다가 먹힐까 하는 의구심이 살아 있다.

그러나 그나마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양극화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기업들로의 집중 현상이 더 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12일 저녁에 만난 한 대기업의 부사장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토로했다. 강남에 살면서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기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국감 등 맞춰 ‘재계 때리기’ 공세 더 거세질 듯

그는 “나도 대기업에서 30년을 일해 부사장을 맡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아도 대기업들이 너무 해먹는다. MRO(소모성 자재)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매출액도 얼마 되지 않는다. 광고·식자재 등 온갖 분야를 친·인척들이 다 해먹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영국처럼 폭동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병철·정주영 회장은 아들들을 월급쟁이로 훈련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다 하나씩 나눠주어서 왕국을 만들고 있다. 이런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현상은 지금이 역대 최고이다. 제조업 매출에서 10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40%를 넘은 것이 상징적이다.

정치권 분석가들은 재계와 정치권의 충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올가을 국정감사를 비롯해 앞으로 들끓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정치권의 2, 3차 재계 때리기가 봇물 터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대통령이 말한 ‘공생 발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가동되면서 재계에 대한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도 유력하다. 이래저래 안팎의 도전에 직면한 재계의 시름이 더 깊어지게 생겼다.

15대 재벌, 재산·씀씀이 어떻게 달라졌나 자료: 경실련(2011년)

항목

2007년

2010년

3년간 증감액
(2007-2010)

3년간 증감률

총 자산

592.5조원

921.6조원

329.1조원

55.60%

토지 자산

38.9조원

83.7조원

44.8조원

115.10%

사내 유보금

32.2조원

56.9조원

24.7조원

76.40%

매출액

565.7조원

900.1조원

334.4조원

59.10%

당기순이익

40.7조원

65.0조원

24.3조원

59.50%

설비 투자액

40.3조원

55.4조원

15.1조원

37.50%

매출액 대비
설비 투자액 비중

7.10%

6.20%

 

-0.90%

당기순이익 대비
설비 투자액 비중

99.00%

85.30%

 

-13.70%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팀장 “재벌 스스로 반재벌 정서 불렀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 언론, 시민사회는 반재벌 정서, 공생 발전, 상생 협력,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들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이런 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재벌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재벌 스스로 매를 벌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재벌은 출자 총액 제한 제도를 비롯한 규제 장치를 풀어야만 투자가 활성화된다고 계속 주장해왔고, 현 정부는 그 말을 들어서 규제를 대부분 풀어주었다. 즉 재벌에게 눈엣가시였던 출자총액제한제의 폐지, 금산 분리의 완화, 법인세 최고 세율 인하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결과 투자의 증대보다는 자기네 주머니만 불려서 결국 경제 및 사회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과는 실증적 자료를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5대 재벌, 덩치 어떻게 변화했나   자료: 경실련(2011년)

 

2007년(a)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a)

4년간 증감

증감 수
(c=b-a)

비율
(c/a)

계열사 수

472

546

632

679

778

306

64.80%

먼저 경실련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현 15대 재벌의 최근 3년간(2007~10년) 총 자산은 2007년 5백92.5조원에서 2010년 9백21.6조원으로, 3백29.1조원(55.6%)이 증가했다. 토지 자산은 38.9조원에서 83.7조원으로, 44.8조원(115.1%)이 늘어났다. 사내 유보금은 32.2조원에서 56.9조원으로 24.7조원(76.4%)이 급증했다. 또한 매출액은 5백65.7조원에서 9백.1조원으로 3백34.4조원(59.1%) 증가하고, 당기순이익은 40.7조원에서 65조원으로 24.3조원(59.5%) 늘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설비 투자액은 40.3조원에서 55.4조원으로, 15.1조원(37.5%)만 증가했다.

수치상으로 보면 설비 투자액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에 함정이 있다.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에서 설비 투자액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설비 투자액이 사실상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출액 대비 설비 투자액 비중이 2007년에는 7.1%였지만 2010년에는 6.2%로 낮아졌다. 결국 0.9%가 감축된 것이다. 또한 당기순이익 대비 설비 투자액 비중은 99.0%에서 85.3%로 낮아져 13.7%가 감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재벌이 과거보다 돈은 더 많이 벌었으나, 돈을 번 만큼 투자는 과거보다 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실증 자료는 계열사의 증가 수치이다. 15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2007년 4월 4백72개사에서 2011년 4월 7백78개사로 4년간 3백6개사(64.8%)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최근에는 재벌닷컴·통계청·한국거래소 조사에서 10대 재벌 제조업체의 매출액이 전체 제조업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1.1%까지 높아지고, 상장 계열사의 시가총액이 52.2%까지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역대 최대인 반면, 시민과 중소기업은 물가의 상승, 실업자의 증가, 납품 단가 문제, 유가 및 원자재 가격 상승, 대기업의 중소기업 영역 무차별 침범 등으로 고통과 함께 생존의 위협까지 받고 있다. 이러한 국내 경제 상황에도 자신들의 주머니만 불리고 있었으니 당연히 질타와 반재벌 정서가 팽배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재벌의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폐해에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 많은 전문가와 시민사회에서는 과거 재벌의 행태를 지켜봐왔기 때문에 경제 양극화 심화라는 결과를 예상했고 그에 따라 규제 완화에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재벌의 의견을 받아들여 모든 규제를 완화했다. 결국 재벌의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폐해는 정부와 재벌이 공동으로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공동 책임자들이 반성과 함께 잘못된 제도를 다시 수정해야 할 때이다. 국제적으로도 금융 질서의 재편, 자본주의의 수정 등 큰 담론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의 재도입, 금산 분리의 강화, 중소기업 적합 업종의 도입을 시작으로 재벌 대기업을 견제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재벌 대기업도 스스로 불러온 반재벌 정서의 원인에 대한 반성은 물론, 적극적으로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공정한 시장 풍토 조성과 함께 사회적 책임 이행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재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뢰를 회복시켜줄 사람도 없다. 스스로 신뢰를 회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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