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장르소설과 ‘사랑’에 빠지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1.08.3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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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화제의 베스트셀러 <7년의 밤>, 파격적인 판권 계약으로 주목…<도가니> <완득이> 등도 개봉 앞둬

▲ ⓒ 퍼스트룩 제공

올해 상반기 14만부가 팔리며 최고의 화제를 뿌린 정유정 작가의 소설 <7년의 밤>은 최근 영화사 위더스필름, 펀치볼과 영화화 판권 계약을 맺었다. 유력 영화사끼리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정작가는 1억원대의 판권료와 함께 흥행 수익 배분을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데뷔한 신진 작가에게는 이례적인 특급 대우라는 것이 영화계와 출판계의 공통된 평가이다.

이것은 최근 충무로가 장르소설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공지영 작가의 인기 소설 <도가니>와 김려령 작가의 청소년 소설 <완득이>가 같은 이름의 영화로 올가을 개봉하는 데 이어 소설의 영화화가 잇따르고 있다. 순수소설에 연심(戀心)을 드러냈던 충무로가 대중적인 성향의 장르소설에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거의 없는 것도 충무로의 장르소설 사랑을 부추기고 있다.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정유정 작가

최근 충무로의 블루칩은 <7년의 밤>의 정유정 작가이다. 감칠맛 나는 문장과 서스펜스, 개성 넘치는 캐릭터 등을 앞세운 정작가의 작품에 많은 영화사가 탐을 내고 있다. 이미 데뷔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2009년 세계문학상을 거머쥔 <내 심장을 쏴라>가 주피터필름과의 계약을 통해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낯선 세상에 뛰어든 열다섯 살 세 친구의 기이한 여행담을, <내 심장을 쏴라>는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는 두 청춘의 이야기를 담았다. 김장욱 펀치볼 대표는 “정작가의 문체가 매력이 있을 뿐 아니라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소재들이 큰 강점을 지녔다”라고 평가했다.

김언수 작가의 <설계자들>은 아예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입도 선매 형식으로 영화사와 영화화 계약을 체결했다. 김작가가 대학 후배인 신인 박균수 감독과 새로운 소설에 대한 구상을 하다가 출판과 영화화를 동시에 추진하게 되었다. <설계자들>은 <고지전>을 만든 영화사 TPS컴퍼니가 제작을 맡아 내년 촬영 돌입을 목표로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설계자들>은 전문 킬러의 모습을 통해 운명에 저당 잡힌 인간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으며, 스릴러와 누아르 등 여러 장르적 요소를 끌어안고 있다. 소설이 나오자마자 많은 제작자가 군침을 흘렸으나 이미 임자가 있었던 셈이다. TPS컴퍼니의 김주경 프로듀서는 “박감독이 연출을 맡게 될 것이며, 소설은 굳이 영화화를 전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영화로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대중적 성격이 강한 장르소설이 영화인의 인기를 얻고 있는 반면 순수소설은 충무로에서 힘을 잃고 있다. 이것은 한국 문단에서 장르소설이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 김장욱 대표는 “10년 전만 해도 문예적 성향이 강한 소설이 영화화되었다면 최근에는 속도감 있는 장르소설이 채택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약세 드러내

장르소설의 강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드문 데다 최근 투자사들이 시나리오 기획 개발비를 지급하는 데에 인색해지면서 영화사들은 참신한 소재를 발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탄탄한 내러티브로 신선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소설에 영화 제작자들의 눈길이 쏠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은 감독 지망생들이 대부분이다. 소설에 의지하는 현실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인기 장르소설이 영화의 흥행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관객들에게 영화를 알리기는 쉽지만 그 이상의 기대치를 높이기에도 걸림돌이 있다. 영화 <완득이>의 홍보사인 퍼스트룩의 강효미 실장은 “일단 콘텐츠에 대한 일차적인 신뢰를 줄 수 있지만 원작과 비교되는 숙명은 피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문장과 영상이 지닌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설 12편의 영화 판권을 보유한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는 “아무리 대중적인 소설이라도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아차’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시각적인 문장을 앞세운 소설도 영화화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숨>은 장애 여성의 성문제를 예민한 시각으로 담아낸 영화이다. 다섯 살 때 시설에 맡겨진 뇌병변 장애 여성 수희는 지적 장애가 없고 노동 능력이 있어서 빨래나 청소를 도맡아 한다. 수희는 지적 장애인인 민수와 사귀면서 몰래 보일러실에서 사랑을 나눈다. 여느 연인들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을 놓고 성적 유희를 즐기는 두 사람.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 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을 시키고, 시설에 봉사 활동을 나온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자 상황은 급박해진다.

수희 역시 과거 목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지만, 민수의 아이를 임신한 수희는 민수와 결혼도 시켜주고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원장 부부의 말에 행복해한다. 그러나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은 시설에 들이닥쳐 수희를 데리고 나온다. 쉼터에 온 수희는 시설에서와는 달리,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보호 대상’이 된다. 상담사는 언어 장애가 있을 뿐 지적 장애가 없는 수희를 어린애처럼 취급하며, 수희의 임신이 성폭행에 의한 것으로 단정한 채 가해자가 누구냐고 채근한다. 아이는 당연히 입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상담사에게, 수희는 아니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영화는 장애 여성에 대한 성폭행 문제를 고발의 시선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발의 시선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장애 여성의 성폭행을 알리고 예방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피해자 담론이 놓치는 것이 바로 장애 여성을 성적 주체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수희는 스스로 원해서 성관계를 주도해 임신했다. 그는 섹슈얼리티의 주체였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 하는 모성의 주체이지만, 상담사를 비롯한 사회적 시선은 그를 무성적 존재이거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영화는 관객이 수희의 시선을 통해 세상의 시선을 경험하도록 하며, 그의 답답함을 함께 느끼도록 한다. 그의 마지막 외침이 무엇인지 잘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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