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함 남긴 ‘주민투표의 추억’
  • 김재태 편집부국장 (purundal@yahoo.co.kr)
  • 승인 2011.08.31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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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면 으레 부록처럼 따라오는 풍경이 있습니다. 도시락에 관한 추억입니다.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못했던 때라 재료는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어머니는 어떻게든 많은 반찬을 담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린 마음에 소시지 같은 고급 반찬을 싸오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움이 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걀 프라이라도 하나 더 얹어주라고 자주 떼를 썼던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도시락 하나로도 그 집안의 형편이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도시락이 식판으로 바뀐 지도 꽤 되었습니다. 학교 급식이 이루어진 후부터입니다. 식판 위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합니다. 거기에는 남의 반찬을 깔보거나 탐낼 사심도, 소시지나 달걀 프라이 타령을 할 여지도 없습니다.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치러진 서울시 주민투표가 투표율 미달로 부결 처리된 후 정치권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기획하고 연출·주연까지 맡아 밀어붙인 주민투표는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대선 불출마에 시장직마저 거는 배수진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나라당은 물론 청와대까지 지원군으로 가세해 ‘오세훈 일병 구하기’에 나섰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파란 많았던 투표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결과를 들여다보는 마음은 여간 씁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번 투표에서 우리 사회에 낙인처럼 찍힌 ‘불편한 진실’을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목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남과 강북의 현격한 투표율 차이로 드러난 ‘분단된 서울’의 일그러진 초상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여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소리가 나왔던 것처럼 ‘정책 투표’가 ‘인물 투표’ ‘이념 투표’ ‘정치 투표’로 변질된 데 따른 후유증도 작지 않습니다. 결국 이번 투표는 수해로 할퀴어진 서울 시민들의 마음에 또 하나의 응어리를 더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학생들을 위한 투표인데도 어른들만 계속 떠들었지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참, 그들은 표 계산이 필요 없는 비(非)유권자이군요.

투표는 끝났지만, 책임은 남습니다. 야당이 시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돌파구가 필요했을 오시장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투표에 소요된 1백80여 억원과 앞으로 시장 보궐선거에 필요한 비용은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사퇴 시기를 결정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시장 보궐선거나 총선·대선 전략에 휘둘려 시간을 더 끌었다면 그것은 오시장 자신에게도 해롭고 시민들에게도 할 도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재앙은 진퇴의 거취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생긴다. 결단을 내렸으면 결행해야 한다.” 중국 전국 시대 병법서 <오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나마 오시장이 ‘식물 시장’의 길을 버리고 즉각 사퇴로 가닥을 잡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서울시민들은 시장이 불쑥 내민 문제지에 이미 답을 써냈습니다. 한나라당이 투표율 25.7%를 두고 아무리 ‘사실상 승리’라고 억지를 부려도 한번 표출된 민심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행정이, 혹은 정책이 더 이상 정치의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시민들의 답안을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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