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소비’ 새 옷 입고 훨훨 날다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1.09.20 12: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류업계, 경기 불황에도 명품 매출은 ‘쑥쑥’…소비 패턴 바뀌어 일반 대중의 수요도 급증

▲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외국 의류 브랜드 질스튜어트 매장. ⓒ시사저널 박은숙

신세계백화점 본점 루이비통 매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일본인과 중국인 여행객이 많다고 하지만 한국인 남녀도 적지 않다. 줄 끝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안지혜씨(32·직장인)를 만났다. 안씨는 “자주 오지는 않지만 가끔 온다. 좋아하는 브랜드이기도 하고 가격 부담은 좀 있지만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렴한 제품 여러 개를 사서 짧게 쓰고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가계 소득 중 명품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을 넘어섰다. 국제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발표한 ‘한국 명품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명품을 갖는 것은 예전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는 데 동의한 응답자가 지난해 21%에서 올해 45%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백화점 명품 소비 역시 지난해와 비교해 30% 가까이 늘어나는 등 급신장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가계 소득에서 명품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로, 일본의 4%를 넘어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결과이다. 안팎으로 경기 불안에 시달리고 급격한 물가 상승 때문에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는 분석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특히 7개월 연속 4%대 소비자 물가 상승이 이어지면서 심리적 압박과 함께 민간 소비가 둔화되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기 불황과 고물가 현상이 함께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8월 소비자심리지수(CSI)’에 따르면 소비자가 느끼는 향후 1년간 물가 상승률인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연평균 4.2%대로 집계되었다. 지난 2009년 3월 4.2%를 기록한 이후 최고치이다. 6개월 후의 가계의 소비 심리를 예상할 수 있는 ‘소비 지출 전망 CSI’ 역시 2009년 5월 1백4포인트 이후 최저치인 1백6포인트를 나타냈다.

개성 드러낼 수 있는 명품 찾는 소비자 늘어나

그런데 왜 명품을 비롯한 의류업계에서는 이같은 요인들이 ‘예외’가 되는 것일까? 김애미 맥킨지 파트너는 “한국의 명품 소비자들 사이에서 예전에 비해 좀 더 세련되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명품을 찾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많은 명품 업체가 한정판 혹은 맞춤형 상품 개발에 매진하는 이유이다”라고 설명했다.

분명한 것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소비 패턴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소비자 심리 지표가 둔화했음에도 소비의 양극화로 인해 고급 제품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지혜 이트레이드 증권연구원은 “주요 심리 지수의 하락은 물가 상승 및 대내외의 불확실성이 부각되면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위축에 불과하다. 의류업체의 실적이 탄탄한 것으로 보아 실질적인 소비 활동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분석했다. 양연구원은 “(이에 따라) 브랜드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패션 기업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라고 덧붙였다.

브랜드 투자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가치 소비’에 대한 대응이 적극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가치 소비는 말 그대로 가격보다 가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비를 말한다. 소매업체별 판매액 지수를 보면 지난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대체로 대형 마트의 판매액 지수가 백화점 판매액 지수를 웃돌았다. ‘가격’에 대한 민감도가 강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2008년 10월에 저점을 찍은 백화점 판매액 지수가 꾸준히 상승하며 2011년 4월 이후 대형 마트를 제쳤다. 개인화되고 주관적인 성향이 그대로 투영되는 ‘가치 소비’가 소비의 양극화 추세와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트렌드에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기업은 신세계인터내셔날로 평가되고 있다. 2011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신세계인터내셔날은 50%가 넘는 매출액 성장률과 100%에 가까운 영업이익 성장률을 기록했다. 탄탄한 명품 라인과 해외 SPA 브랜드, PL(Private Label) 브랜드가 고성장한 것이 견인차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해외 명품 라인에서는 상반기에는 ‘알렉산더왕’을 도입하고, 하반기에는 고급 아웃도어 브랜드를 비롯한 2~3개 브랜드를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해외 SPA 브랜드에서도 GAP, 바나나리퍼블릭 등을 관리하고 있다. 해당 브랜드들은 현재 신세계백화점에만 매장이 들어서 있지만 하반기에 현대백화점 및 롯데백화점까지 확장될 예정이다. 바나나리퍼블릭 관계자는 “저렴하면서도 품질이나 디자인까지 좋은 제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최근 백화점을 찾는 고객들은 가격보다는 디자인과 브랜드를 꼼꼼하게 따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 브랜드를 좋아해서 매장에 들어온 이상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멈칫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때로는 가격이 비쌀수록 매출이 좋을 때가 있다. 유행을 타는 것보다는 주로 개인적인 취향에 맞춰 사가는 고객이 대다수이다”라고 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LG패션 등 성장 주목

수입 브랜드가 대부분인 만큼 한-EU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원가 부담 완화 효과도 누리고 있다. 유럽에서 수입해올 경우 20~30% 정도 원가 부담을 덜 것으로 예상된다. 자체 청바지 브랜드인 ‘진홀릭’ 역시 매장 수가 50여 개로 확대되며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성장을 돕고 있다. 이러한 도움에 힘입어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 7월14일 코스피에 상장된 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윤효진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패션 소비 양극화로 명품 시장은 2006년 이후 연평균 21%, 올해 들어 30% 고성장이 진행되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가장 많은 명품을 전개하는 업체이다”라고 평가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명품 라인으로 가치 소비 시대에 승부수를 던졌다면, LG패션은 다양한 브랜드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LG패션은 상대적으로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여성복과 스포츠 의류를 공략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복종별 판매 비중 변화만 보더라도 지난 5년간 남성복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11년 현재 30%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반면 스포츠 의류는 10% 내외에서 5년 사이 25% 가까이 성장했다.

변화에 맞춰 브랜드 전략도 바뀌고 있다. LG패션은 ‘되는’ 브랜드의 라인을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지난 2006년 질스튜어트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후 서브 브랜드 격인 질바이질스튜어트를 런칭하고, 이후 지난해 질스튜어트 액세서리까지 브랜드로 안착시켰다. 남성 라인으로 시작한 브랜드 헤지스도 마찬가지 경로를 거쳤다. 남성복에서 시작했지만 여성복, 액세서리, 골프, 키즈까지 10여 년간 다섯 개의 브랜드로 확장시켰다.

그 밖에도 LG패션은 올해 안에 막스마라, 닐바렛, 질스튜어트 뉴욕 등 20~30대를 타깃으로 한 고가 브랜드를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특히 이러한 라이선스 브랜드로 주요 백화점과의 교섭력을 증대시켜 판매액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양지혜 연구원은 “소비자들은 불황기를 거치면서 소비 패턴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혁신적인 신제품과 브랜드력 강화를 통해 새로운 시장이 창출되었고, 이것이 ‘가치 소비’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충분한 자금력과 기획력이 바탕이 되는 대기업 그리고 브랜드력 향상에 투자한 기업일수록 성장률이 높아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