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끝 병동에서 지고의 희망 함께 나누다
  • 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1.09.2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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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한부 인생의 종착점으로 불리는 ‘호스피스 병동’에는 마지막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열망과 희망이 가쁘게 숨 쉬고 있다. <시사저널> 취재진은 지난 8월22일부터 9월3일까지 14일 동안

ⓒ시사저널 윤성호

삶과 죽음이 혼재된 곳 ‘호스피스 병동’.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이곳을 <시사저널> 취재진은 지난 8월22일부터 9월3일까지 14일 동안 현장에서 밀착 취재했다. 서울 구로구에 있는 고려대 구로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인 완화의료센터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환자들의 애환을 함께 겪었다. 환자들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다. 암에 걸리기 전에 죽느냐, 걸리고 나서 죽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차이로 삶의 질이 바뀐다. 암 덩어리가 온몸에 퍼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말기암 환자들은 하루를 ‘아픈 날’과 ‘안 아픈 날’로 구별한다. 뼛속으로 고통이 파고드는 날에는 마약 성분이 함유된 진통제를 삼키고 흐린 눈으로 하루를 고스란히 지샌다. 흔히 죽음의 순간이 임박한 이들의 삶을 ‘시한부(時限附) 인생’이라고 부른다. 호스피스 병동은 시한부 인생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다.

서울 구로동 고대구로병원의 완화의료센터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환자들은 모두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담담했고, 어떤 이는 분노하고 두려워했으며, 또 어떤 이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말을 내뱉으면 결국 하나같이 눈물을 쏟았다. 병원을 떠날 즈음에서야 깨달았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은 슬퍼서가 아니라 간절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임을. 간절함은 기적을 만든다. 호스피스 병동의 모든 이에게 살아 있는 날은 가장 ‘완벽한 기적’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은 단순히 환자들이 죽음을 맞기 위해 찾아가는 곳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희망을 되찾은 이들도 있었다.

지난 8월26일 고대구로병원 80병동 완화의료센터에서 만난 김주미씨(30·여)와의 첫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하얗고 앙상하게 마른 몸.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한눈에도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5인실 병실로 옮기자마자 산소 호흡기를 달고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김씨의 어머니 박청자씨는 그런 딸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다섯 딸과 막내아들을 둔 어머니 박씨가 김씨에게 애착을 보이는 것은 자신을 빼닮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씨는 11년 전 폐암으로 남편이 떠난 뒤에도 억척스럽게 아이들을 키워냈다. 김씨는 어머니 박씨의 강인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김씨는 활달한 성격에 생활력이 강해 남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김씨가 전문대를 졸업하자마자 뛰어든 곳이 바로 동대문 패션상가였다. 김씨는 동대문 새벽시장의 의류상가에서 보조로 일하며 의류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다. 낮과 밤이 바뀐 일과, 쉬는 날도 손에 꼽을 만큼 일이 험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암이 찾아왔다. 김씨는 2007년 스물일곱 살 나이에 암 판정을 받았다. 선양낭포암. 희귀한 이름이었다. 맨 처음 코에 생긴 암이 바로 턱으로 번졌다. 그해 김씨는 서울대병원에서 22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당시 의료진은 워낙 대수술이라 바로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는 수술을 받고 난 다음 날 일반 병실로 옮겼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후로 1년에 한 번씩 대형 수술이 이어졌다. 2008년에는 코에 생긴 암을 제거했고, 2009년에는 입이 벌어지지 않아 턱의 근육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머리에 생긴 종양이 커져서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뇌 절개 수술을 받았다. 종양은 올해 초에도 재발해 또다시 수술이 이어졌다.

무려 5년을 암과 싸워오는 동안 김씨의 몸은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약해졌다. 그 사이에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도 있었다. 올해 8월 중순에는 혼수 상태가 이어져 김씨의 가족들은 장례식 준비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어머니 박씨는 이제 갓 20대를 넘긴 자식을 먼저 보낼 수는 없었다. 밤마다 가슴을 치며 울었다. 박씨는 “차라리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곧 죽을 것처럼 보이던 김씨는 되살아났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김씨가 고대구로병원 완화의료센터를 찾은 것도 이번이 세 번째였다. 박씨는 “남들은 평생 살다가 한 번이나 와볼 수 있을까 하는 곳을 두 달 사이에 세 번이나 오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입원한 지 하루쯤 지나고 나서 김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병동에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 되다 보니, 김씨에게는 별명도 생겼다. 병동에서 김씨는 ‘거울공주’로 불리고 있었다. 주변에 항상 거울을 놓아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거울 보기를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음식을 흘리는 것이 싫어서 늘 거울을 본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턱의 근육과 신경을 제거하면서부터 자신이 음식이나 침을 흘리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 뇌 절개 수술과 얼굴 근육 제거 수술 등 암과의 사투로 얼굴 반쪽을 잃은 김주미씨의 모습. ⓒ시사저널 박은숙
뇌와 턱 수술로 김씨는 반쪽 얼굴을 잃었다. 평소 꾸미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이었다. 성형수술을 받을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김씨는 “방사선치료를 받으면서 턱이 녹아버렸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무리라고 들었다. 의학기술이 발전하면 다른 방법이 생길지 궁금하다”라며 진심이 반쯤 섞인 농담을 던졌다. 아픈 와중에도 기자에게 농담을 건넬 정도로 밝은 성격을 가진 김씨의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올해로 사귄 지 8년이 되어가는 동갑내기 남자친구 권 아무개씨(30)도 있었다. 말기암 환자라고 해서 사랑마저 저무는 것은 아니었다. 김씨의 남자친구 권씨 역시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일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해온 덕분에 올해에는 개인 상점도 차렸다. 김씨는 남자친구가 일하는 상점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이것 홍보도 되는 것인가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빨리 나아서 나도 일을 하고 싶다. 주변의 도움을 받고만 있었는데 이제 무엇이든 내가 돕고 싶다. 빨리 낫고 싶다는 생각에 음식 먹는 것에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 장염에 걸렸는데, 이번 일로 욕심을 좀 줄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요즘 김씨는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몰라도 김씨의 상태는 병원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해보면 몰라보게 양호해졌다. 지난 9월2일 병원에서 만난 김씨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우선은 상태도 나아지고 해서 오늘 퇴원을 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코에 끼워둔 산소호흡기도 뗀 상태였다.

김주미씨의 맞은편 자리에는 김씨가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지난 8월26일 고대구로병원 응급실에 실려 들어와 바로 김씨와 같은 병실로 자리를 옮긴 이철운씨(56·남)였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8월인데도 그는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복수로 차오른 배와 부어오른 다리 때문에 거동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한동안 씻지 못했던 모양인지 그가 머무른 공간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손등과 발등은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갈라져 있었다. “혼자세요?”라는 물음에 그는 갑작스럽게 “내가 다 잘못해서 그렇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거야”라며 두서도 없는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씨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부모님은 모두 이북 출신이었고, 이씨는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벌써 10여 년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부모님께서 원래 살던 곳은 함경도 북청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씨는 “친척이라고 해봐야 외삼촌 하나인데, 살아계시면 올해로 아흔 살이다. 그마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외사촌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잘 모른다”라고 말했다.

혼자인 것에 익숙했던 이씨는 그동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방랑객처럼 살았다. 그는 젊어서는 술장사를 했다고 한다. 서울 종로 일대의 조폭 중에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이씨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매일 술에 취해 잠든 아들 곁에서 기도를 했다. 이씨는 “그때는 술 취해 자느라 기도고 뭐고 상관도 안 했다. 지금은 그런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씨는 문득 ‘이 세계에서 발을 빼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1983년에 자전거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다. 전국 일주를 끝낸 1985년 술장사와 조폭 생활을 깨끗이 정리했다. 이후 제조 공장 등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혼자였지만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지난 2008년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암 수술을 받기 위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몽땅 쏟아부어야 했다. 수술을 받고 나서 그는 가진 것이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 상태 또한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는 경기도 광명시의 좁은 사글셋방에서 혼자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겨울이면 추위와 함께 통증이 몰려와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 이철훈씨의 모습. ⓒ시사저널 박은숙
그 사이에 1백72cm에 94kg이 나가던 건장한 체격은 나날이 야위어갔다. 지난 6월부터 항암치료도 끊었다. 의료진은 그에게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 초 이씨는 ‘이제 죽어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20여 일 동안 아무 음식도 먹지 않은 채 방안에서만 지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통증이 온몸을 감싸왔다. 그는 온 힘을 짜내 119를 불렀다. 고대구로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그는 바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처음 만난 날 이씨는 “이런 몸이 되고 나니까 얼마 못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알고 있어도 무섭다. 눈물이 난다”라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서 다소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도 조금씩 변했다. 기도를 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다가 “나도 기도하는 방법만 알면 기도를 하고 싶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던 분이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실 일이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늘 아른거린다. 세례를 꼭 받고 싶다”라고 조용하게 말했다.

이씨의 요청에 고대구로병원으로 자원봉사를 나온 비르짓다 수녀(72)가 이씨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수녀님의 손길이 닿자 이씨는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비르짓다 수녀는 “죽음의 위험에 있는 사람에게는 ‘조건 대세’라고 약식으로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라며 이씨에게 혹시 주위에 가톨릭 신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그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네 단짝 친구가 있었다. 20년 전에 내가 그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해서 연락을 끊었지만, 그 친구가 독실한 신자이기는 하다”라고 답했다. 수녀님은 이씨의 친구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게서 20년 만에 온 연락이었다. 이씨의 친구는 “바로 찾아가겠다”라고 답했다. 이씨의 주름진 얼굴에 어느덧 미소가 피어났다.

이들의 옆 병실에 머무르고 있는 이병우씨(가명·62)에게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그는 간암 말기 환자였다. 완화의료센터의 의료진조차 “이씨의 현재 상태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라는 말을 했다. 이씨가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이씨는 지난 7월22일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아무 치료도 진행하지 못한 채 8월18일 호스피스 병동으로 몸을 옮겼다.

이씨의 아내 유정희씨(가명·59)는 “7월22일 병원에서 이미 암이 70% 이상 진행되어서 핏줄까지 굳었다는 말을 들었다. 병원을 두 곳 찾아갔는데 처음 간 병원에서는 ‘두 달’ 그리고 다른 병원에서는 ‘한 달이 남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이씨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병실에서 본 이씨는 황달 때문에 온몸이 누렇게 변해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을 잃었다. 온종일 이씨를 돌보고 있는 아내 유씨는 “참 미운 남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라며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부가 결혼한 뒤 몇 년 동안은 이씨가 부동산 사업을 해서 꽤 넉넉한 살림이었다. 하지만 사업이 기울면서 빚이 불어났고, 이씨는 하던 일을 접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술을 마시는 날이면 남편은 폭력적으로 변했다. 생계는 점점 아내 유씨의 몫이 되었다. 두 아이의 교육을 위해 유씨는 자동차 공장 일에서부터 공공 근로, 김밥 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 사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이씨 부부는 수년 동안 각방을 쓸 정도로 서로에게 벽을 쌓고 있었다.

이씨 부부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이씨가 암에 걸려 병원 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의 일이다. 부부는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갔다. 커튼이 내려진 병동의 침실 안에서 유씨가 “당신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해”라고 묻자 이씨는 “다 죽어가는 놈한테 왜 그런 것을 묻냐”라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씨는 “내가 병원에 오니까 당신 손도 잡아본다”라며 한참 동안 이씨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유씨가 머무를 곳은 부부가 함께 살던 서울 구로동의 반지하 전셋방이었다. 유씨는 “아직 젊은데, 이제 갓 신혼 살림을 차린 아들이나 두 아이를 기르고 있는 결혼 5년차 딸의 신세를 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 원예치료사가 이병우씨에게 꽃을 선물하자 아내 유정희씨가 기뻐하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병원에서 이씨는 꽤 자상한 사람이었다. 유씨는 “하루는 남편이 며느리의 생일을 챙겨준다며 어디에 숨겨두었었는지 돈 20만원을 꺼내서 주었다.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희야!”라며 남편 이씨가 유씨를 불렀다. 유씨는 남편의 눈빛만 봐도 무엇이 필요한지 바로 알아챘다. 점점 딱딱해져가는 남편의 손과 발을 어루만지며 유씨는 또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결국 이씨는 지난 9월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의식을 지키고 있었다. 이씨는 아내 유씨에게 “절대 자식에게 짐을 지우지 말고 항상 도움을 주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의 그의 모습은 ‘아버지’였다. 이씨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아내 유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에서 유씨는 “덕분에 병원 생활이 외롭지 않았다. 앞으로 남편 말대로 혼자 지내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유언 때문이었을까. 유씨의 목소리는 예전과는 달리 단단하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 ‘혼자’라는 생각이 오히려 유씨를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결정을 남편에게만 맡겨왔던 유씨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기자는 2주 동안 고대구로병원 완화의료센터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시한부 인생을 만났다. 그 가운데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고, 죽음의 순간에서 가까스로 깨어난 사람도 있었다. 살아있는 시간은 각각 달랐지만 모두가 숨을 내쉬는 매 순간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김주미씨는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고, 이철운씨는 ‘기도하는 삶’을 원했다. 이씨의 아내 유정희씨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후로 ‘혼자서 맞서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찾은 희망은 바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였다.

▲ 고대구로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후원하고 있는 김대홍씨. ⓒ시사저널 윤성호
나무, 우산, 해바라기. 하얀 도화지에 김대흥씨(39)가 그린 그림은 모두 아내 김남순씨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김대흥씨에게 한 살 어린 아내 김남순씨는 편안한 나무 그늘, 궂은비를 함께 맞는 우산, 늘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해바라기와 같은 존재였다. 김대흥씨가 살고 있는 세상의 중심과 같았던 아내가 지난해 12월23일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의 아내는 지난해 6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채 1년을 살지 못하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지난 1998년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일식집의 직원이었던 김대흥씨는 동료였던 아내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지난 2009년에는 서울 구로구에 두 사람만의 식당도 차렸다. 작은 횟집이었지만 두 사람의 꿈을 이룬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은 김씨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씨는 아직까지 고대구로병원 완화의료센터에서 진행하는 사별가족 심리 치료와 미술 치료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처음에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사라져 힘들었다. 아내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 두려웠다. 치료를 받으면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병동에서 아내가 남긴 말이었다”라고 말했다.

병실에서 아내는 돌봐주는 가족도 없이 혼자 죽어가는 다른 말기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 당신에게 받은 사랑을 이곳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김씨는 “그래서 아내의 바람대로 말기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사실 암 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치료비와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기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김씨는 매달 아내가 머무르던 고대구로병원의 말기암 환자를 위한 후원금을 내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매월 첫째 주 화요일을 ‘기부의 날’로 정하고 그날 매출액의 절반을 병원에 기부하고 있다. 김씨는 “기부를 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개인 기부는 내가 처음이었고, 병원의 사회복지팀에서도 이런 전례가 없다 보니 과연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을 했다. 결국 병원장의 허가가 나와 지난 5월부터 첫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기부를 시작하면서 김씨는 삶의 이유를 되찾았다고 한다. 기부는 아내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의 기부 활동을 돕는 이들도 생겼다. 매달 기부의 날이면 김씨의 가게로 찾아와 헌혈증을 주고 가는 한 커피숍 주인과 자신도 기부를 하고 싶다면서 현금을 전달하는 사람까지. 김씨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배우고 싶은 것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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