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찾아온 연기의 성찬
  • 이지강│영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1.09.25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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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 <의뢰인>의 주인공들 활약 돋보여

주연급 출연진의 면면이 돋보이는 두 영화 <카운트다운>과 <의뢰인>이 관객을 찾아간다. 9월29일 동시에 개봉하는 두 영화는 각각 전도연·정재영(<카운트다운>)과 하정우·장혁·박희순(<의뢰인>)이라는 연기력이 검증된 주연 배우들을 앞세우고 있다. 두 작품은 추석 개봉 영화에 실망한 관객에게 만족감을 선사할 만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카운트다운>은 액션 스릴러, <의뢰인>은 법정 스릴러이다. 두 작품 모두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모든 장르의 영화가 그렇겠지만 스릴러 장르는 특히나 완성도 있는 시나리오와 긴장감을 풀고 죄는 연출이 중요한 성공 포인트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화려하기보다는 현실감 있는 액션을 담아낸 <카운트다운>과 법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주요 무대인 <의뢰인>의 경우라면 이야기와 연출의 힘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이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주연급 출연자의 무게감과 이들이 펼쳐 보이는 연기의 앙상블이다.

<카운트다운>에서 정재영은 생존을 위해 10일 이내에 간을 이식받아야 하는 간암 말기 환자로 분한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들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동정심을 버린 최고의 채권 추심원이지만 아들이 죽은 날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전도연은 성적 매력과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수백억 대 사기를 치는 전문 사기범 역을 맡았다.

정재영과 전도연의 공연은 얼어붙은 얼음과 타오르는 불의 만남이다. 정재영은 아들의 죽음과 돈에 대한 아픈 기억으로 마음을 닫아버렸고, 전도연은 자신을 속이고 감옥에 보낸 예전 동료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른다. 정재영의 무표정과 전도연의 화려함은 두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옷처럼 어우러져 극 초반의 긴장감을 이끌어나간다.

아쉬움 없지 않지만 드라마 완성도 면에서 기대 모아

두 배우의 힘은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카운트다운>은 스릴러를 뽑아낸 솜씨만큼이나 드라마의 흡입력이 강하다. 정재영과 전도연의 매력은 드라마를 통해 더욱 부각된다. 얼음과 불의 만남에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는 완충 장치가 더해지면서 두 연기자의 조화는 서로를 깨뜨리지 않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웃음 뒤의 눈물 또는 액션 뒤의 감동은 한국 대중 영화가 자주 사용하는 공식이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방해하는 장애 요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재영과 전도연의 연기는 <카운트다운>의 위험 요소인 전반부의 긴장과 후반부의 감동을 오히려 작품의 강점으로 돌려놓고 있다.

이경영, 오만석, 미쓰에이의 민 등 조연급의 연기도 훌륭하다. 특히 정재영의 아들 역할을 맡은 다운증후군 배우는 극 후반부 드라마로 이어지며 풀어질 수 있는 긴장을 잘 잡아준다.

<의뢰인>은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법정 스릴러의 낯설음을 세 주연 배우의 연기력으로 돌파하고 있다. 하정우와 박희순은 전작들에서 이미 훌륭한 연기를 펼쳐왔고, 장혁은 드라마 <추노>를 통해 잠재력을 폭발시킨 바 있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변호사 역을 맡은 하정우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추격자>에서 보여준 어둡고 강렬한 모습을 버렸다. 대신 <멋진 하루>나 <비스티보이즈>에서 보여준 넉살 좋고 건들거리는 인물에 더 가깝지만 영화 속 캐릭터와 밀착감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박희순은 ‘나쁜 놈을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서는 정도에 어긋나는 방법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확신하는 검사 역을 맡아 무난한 연기를 펼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살인 용의자 역을 맡은 장혁이다. <추노>를 통해 불같은 감정 표현으로 사랑을 받은 그는 이 작품에서는 대사와 표정을 통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연기로 관객의 섣부른 예상을 유보시키는 연기를 표현했다.

세 배우의 연기 앙상블은 훌륭하지만 이 작품이 배우들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느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빠른 전개를 위해 희생시킨 사건의 정밀한 묘사와 인물의 감정선은 <의뢰인>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법정 스릴러가 한국 영화에 등장했다는 것은 장르를 넓혔다는 점에서는 환영받을 일이지만 캐릭터에 대한 부족한 관심은 아쉬움을 남긴다. <의뢰인>이나 <카운트다운>, 이보다 한 주 앞서 개봉한 <도가니>는 모두 마케팅에 의지하지 않고 연기와 드라마의 완성도로 승부하는 영화이다. 한국 영화의 진검 승부가 기대를 모은다.


허종호 감독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 <카운트다운>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쫓고 쫓기는 남녀의 이야기이다. 회수율 100%를 자랑하는 채권 추심원 태건호(정재영)는 어느 날 간암 선고를 받는다. 이식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통보 앞에 그는 기증자를 찾아다니고, 죽은 아들의 심장을 이식받은 차하연(전도연)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 만남이 순탄할 리는 없다. 서로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살아갈 이유가 분명치 않은 남자와 살아서 버텨야 할 이유가 생겨버린 여자의 조우는 각자가 품은 비밀만큼이나 흥미롭다. 여자의 구원(舊怨)이 불러온 집요한 추격과 뻔뻔한 도주 위로 남녀는 질주하고, 그 질주는 짜릿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화의 3분의 2 지점까지, 그 리듬은 팽팽하다 할 정도로 잘 당겨져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이후이다. 여자의 숨겨진딸이 복수의 ‘리턴매치’에 끼어드는 순간 영화의 리듬은 급속히 늘어진다. 남자가 품은 생에 대한 집착의 배경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가기 시작하면 드라마는 이제까지 영화가 달리던 길에서 멀찍이 벗어나버린다. 꽉 짜인 드라마의 길 위에서 행해지는 갑작스런 유턴이랄까. 사실 이 모든 문제는 데뷔작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욕심에서 기인한 것이나, 그 욕심의 70% 이상을 실현해낸 감독의 뚝심은 그야말로 놀랍다. 때문에 이 모든 아쉬움에도 <카운트다운>은 볼만한 수작이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시장통 카체이싱은 그중에 서도 백미이다. 10여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다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허종호 감독은 충분히 주목 할만한 신인이라 불려 마땅하다. <범죄의 재구성>을 처음 만났던 순간의 흥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분명 이 영화 <카운트다운>을 반갑게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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