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편으로 역주행하는 러시아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1.10.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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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총리, 내년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점진적 민주화에 기대 걸었던 국민들 절망감 깊어져

20년 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스탈린 세력의 쿠데타 음모를 분쇄하고 러시아의 개혁과 민주화를 선언했을 때 세계는 환호했다. 동서 냉전의 폐허에 새로운 화해의 장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마저 부풀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로는 토요일인 지난 9월24일 과거로 방향을 돌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내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2000년부터 4년 임기의 대통령을 두 번 역임했다. 그의 출마는 이론상 선거를 거쳐야 하지만 선거는 요식 절차일 뿐 사실상 대통령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푸틴이 스스로를 대통령에 임명했다”라는 서방 언론의 풍자는, 풍자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이 푸틴의 방식이고, 스탈린의 유산이다. 푸틴은 내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하면 개정된 헌법에 따라 6년 임기의 대통령을 두 번 할 수 있고, 그의 치세는 2024년까지 계속된다. 그때 푸틴은 72세가 된다.

개정 헌법에 따라 최장 12년 통치도 가능

푸틴은 2008년 헌법의 임기 제한 규정에 따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총리를 맡았다. 총리 시절에도 실질적으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한 그가 4년 만에 정식 대통령으로 복귀한다. ‘푸틴 대통령’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그가 만들어갈 러시아의 모습 때문이다.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재임 중 러시아를 상당한 수준까지 개혁하고 민주화했다. 그러나 푸틴의 복귀는 ‘정상적인 러시아’의 종말을 의미한다. 소련 비밀경찰 KGB와 군부 요직을 거친 푸틴은 권위주의와 통제를 먹고사는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가 향후 12년 동안 지배할 러시아는 ‘악몽의 시나리오’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과 서방 분석가들의 전망이다.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역할 교환을 발표한 날 집권 통합러시아당 대회장은 열광과 박수의 열기로 뜨거웠다. 러시아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양 축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민주화를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은 절망과 한탄 속에서 총 24년에 걸친 푸틴의 집권에 진절머리를 냈다. 러시아인들은 소련 해체 후 자유의 단맛을 보았다. 그 동안에도 그 소중한 자유가 푸틴 때문에 억압당하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푸틴의 12년은 악몽 그 자체이다. 푸틴의 복귀를 진작부터 예상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러시아의 민주화를 액면대로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도 역사의 선순환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사실이다.

▲ 러시아의 푸틴 총리(왼쪽)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지난 9월2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집권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EPA 연합

메드베데프는 전당대회 연설에서 자신과 푸틴의 역할 변화에도 러시아의 민주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 다짐은 허공 속으로 흩어져 들리지 않았다. 러시아 최대의 석유회사 가즈프롬을 경영했던 메드베데프는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에 민주화 마인드가 충만한 인물이다. 아이패드(iPad)를 사용하고 법치주의를 신봉하며 권력의 부패를 증오한다. 그에 비해 푸틴은 옛 소련의 부활을 꿈꾸는 인물이다. 그는 이념의 포로이자 민족주의 광신자이다. 체첸의 봉기를 유혈로 진압한 행적에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소련 붕괴의 책임을 서방에 돌리면서 그 원한을 갚을 날을 기다려오다가 이제 그 기회를 잡았다.

메드베데프는 대의원들에게 대통령에 불출마한다고 밝히면서 왜 푸틴을 대통령으로 추대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고 여운이 담긴 말을 했다. 자신은 전도가 험난한 러시아를 이끌어갈 역량이 모자란다는 점도 시사했다. 그에게 희미하나마 기대를 걸었던 다수의 사람이 실망감, 심지어 배신감마저 느끼는 표정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푸틴은 당당하다. 러시아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신을 판단한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매사에서 나타난다. 오바마를 ‘신나치’로 매도한 발언은 안하무인 격이다. 푸틴은 메드베데프가 앞으로 자신을 잘 도울 것이라고 말했으나 푸틴 시대의 개막은 메드베데프의 영원한 퇴장과 같은 의미가 된다. 아울러 러시아의 퇴행을 함축하기도 한다.

대다수 러시아인은 정치보다는 먹고사는 문제를 중시한다. 그래서인지 푸틴의 복귀를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삶의 질만 올려준다면 그가 12년을 해먹든 평생을 해먹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에 눈을 뜬 일부 엘리트 러시아인들에게는 푸틴의 존재가 섬뜩하다. 스탈린의 부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권위주의 러시아’의 탄생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의 중립적 정치 분석가인 드미트리 오레시킨은 시스템 균열이 생기지 않는 한 러시아는 ‘푸틴 정체기(Putin stagnation)’로 접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한 푸틴이 복귀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중첩한 위기에 처했다는 의미도 된다고 분석했다. 결국 푸틴식의 단호한 조치들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에서 소련의 공산주의가 ‘관료 부패주의, 정실주의’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정실 인사와 석유로 생긴 부의 독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미 관계도 후퇴할 것이라는 전망 나와

▲ 지난 9월25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이 푸틴의 대통령 복귀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

일요일 아침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접한 반체제 인사들은 고르바초프의 이상이 무너진 공간에 브레즈네프의 18년이 환생한 듯한 혼란에 빠졌다. 푸틴 치하에서 러시아의 반체제 운동은 거의 맥을 추지 못했으나 그 심도는 깊어졌다. 평생 반정부 운동을 해온 63세의 한 여성은 푸틴의 재등장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에 비유했다. 파멸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정 인사들은 지금까지는 유가 상승으로 정권을 유지했으나 앞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해질 것이고, 게다가 세계 경제의 침체까지 겹쳐 푸틴식 철권통치가 파멸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한 20년간 자유의 공기를 마신 러시아 국민들이 KGB식 탄압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푸틴이 직면한 도전은 만만찮다. 동방과 서방,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러시아의 국익을 챙기는 일은 어렵다. 오바마의 등장으로 많이 진전된 대미 관계를 갑자기 대결 국면으로 전환하는 것도 도박이다. 이 점에서 푸틴은 당분간 기존의 국제 관계를 현상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전쟁 물자를 러시아 영공을 통해 운반하는 공조와 리비아 사태를 둘러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협력 관계에 약간의 마찰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카네기국제평화지원재단의 이사이자 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콜린스는 푸틴의 치세가 러시아와의 관계 재설정(reset)을 표방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촉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그동안 메드베데프가 추구해온 대미 외교 노선이 푸틴식으로 바뀔 것은 자명하며 이것은 곧 마찰과 긴장을 의미한다고 그는 분석했다. 문제는 앞으로 푸틴의 승낙 없이는 어떤 정책도 추진할 수 없다는 점이 전과 달라진 현실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될 만한 것은 러시아의 국내 문제가 워낙 심각한 만큼 아무리 푸틴이라도 대외적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다.

뉴욕타임스는 푸틴 시대에 대해 이같이 엇갈리는 전망에도 많은 러시아인이 이번 사태를 ‘종말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으로 보고 있다고 논평했다. 이제 러시아인들에게 자유는 보드카를 살 수 있는 것뿐이라는 한 반체제 인사의 푸념이 함축적이라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푸틴은 어차피 푸틴일 뿐이라는 체념과 자학, 심지어 허무주의가 많은 러시아 국민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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