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 대륙으로 몰려가는 한국 감독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1.10.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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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위험한 관계> 등 ‘메이드 인 차이나’ 영화들 연출해 주목…시장은 급팽창하는데 인력 부족한 중국이 ‘손짓’

▲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중국 배우들과 나란히 선 곽재용 감독(왼쪽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소재는 경국지색의 대명사 양귀비이고, 주인공은 중국어권 최고 스타인 판빙빙과 왕리홍이다. 주요 목표 시장은 중국이다. 11월 촬영을 시작해 내년 2월 크랭크업 할 <양귀비> 얘기이다. 겉을 보나 속을 보나 영락없는 중국 영화이다. 그러나 메가폰을 쥔 사람은 곽재용 감독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와 <엽기적인 그녀>로 이름 높은 충무로의 중견 연출자이다. <양귀비>는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인 지난 10월7일 제작발표회를 열고 공식 출발을 알렸다. 조금은 낯선 조합이지만 <양귀비>가 끝이 아니다. 한국인의 손길이 깃든 ‘메이드 인 차이나’ 영화들이 속속 등장할 전망이다.

문화적 동질감도 있고 연출 능력도 검증된 감독들에게 ‘눈독’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은 중국-싱가포르 회사가 손잡고 만드는 <위험한 관계>를 연출할 예정이다. <위험한 관계>는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던 18세기 말 프랑스의 쇼데를르 드 라클로의 동명 소설을 밑그림으로 삼는다. <위험한 관계>는 충무로에서도 배용준·전도연 주연의 <스캔들>로 만들어져 국내에도 친숙한 소설이다.

<국가대표>의 김용화 감독도 중국과의 합작을 저울질하고 있다. 허영만의 동명 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길 <미스터 고>가 합작 대상이다. 고릴라가 야구하는 모습을 3D로 담을 이 영화는 중국과의 합작을 통해 대륙 시장 진출을 타진하려 한다. 김감독의 경우는 중국 회사에 직접 스카우트된 곽재용·허진호 감독과는 다르지만, 최근 충무로에 불고 있는 중국 붐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 감독들이 잇달아 중국에 진출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중국 영화 시장은 세계에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중국 영화 시장 규모는 1백1억7천2백만 위안으로 2009년(62억6백만 위안)보다 63.9%나 늘어났다. 중국 영화 수익만 해도 1년 사이에 63.3%나 급증했다.

중국에서는 급속히 팽창하는 시장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좋은 작품을 거대 시장에 내놓으려 해도 이를 뒷받침해줄 마땅한 영화 인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적 동질감도 있고 연출 능력도 검증된 한국 감독에게 중국 영화계가 눈독을 들이는 이유이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중국의 힘이 영화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충무로 인력의 중국 진출은 2007년 <집결호>가 신호탄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특수 효과 스태프가 이 영화의 전쟁 장면을 담당하면서 중국 진출의 물꼬를 텄다. <집결호>가 특정 분야 제작 노하우 전수에 그쳤다면, <양귀비>와 <위험한 관계>는 영화를 총지휘하는 감독을 ‘수출’한다는 점에서 훨씬 진일보한 단계라 할 수 있다.

폐쇄적인 중국 정부 정책 등 경계해야

▲ 지난 9월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 나란히 선 장바이즈·장동건·장쯔이·허진호 감독(왼쪽부터). ⓒAP연합

영화진흥위원회도 중국 진출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여러 영화사도 영진위의 이런 정책 기조에 맞추어 합작 등 중국과의 다양한 사업 방법들을 구상하고 있다. 규모가 1조원가량인 한국 영화 시장에 머물다가는 영화 산업의 근본적 영세성을 면하지 못한다는 위기감, 세계 최대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작용한 결과이다.

중국이 영화인에게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경계의 눈빛도 날카롭다. 충무로 몇몇 영화사가 2000년대 중반 베이징에 지사를 설립하며 신시장 개척을 도모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과 인력에 대해 문호를 적극 개방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외국인에게는 폐쇄적인 중국 정부의 정책과 사회의 시선이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베이징에 지사를 운영했던 한 제작사 관계자는 “중국에 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워낙 규제가 많고 우리 문화와 맞지 않는 점도 많다. 감독의 중국 진출, 한·중 합작 등을 마냥 장밋빛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 ⓒSPBV영화 제공
<헬프>는 1960년대 초,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미시시피 주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제는 100년 전에 철폐되었지만, 흑인은 여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가사 노예였고, 어머니는 하녀였으며, 나는 가정부였다”라는 대사처럼, 흑인은 쇠사슬로부터는 벗어났지만, 계급적 불평등과 인종 혐오로 인해 사회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인 중산층 여성은 흑인 가정부에게 살림과 육아를 다 맡기면서도, 흑인 가정부가 병을 옮긴다며 집 안 화장실도 쓰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는 제쳐두고 백인 아이를 키우며 평생을 보낸 그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 노동을 하다가 황당한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되곤 했다.

주인공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의 손에서 자란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 결혼해 주부가 되는 것을 꿈꾸는 친구와는 달리, 저널리스트를 꿈꾸며 지역 신문사에 입사한다. 처음 맡은 살림 칼럼의 조언을 듣기 위해 흑인 가정부의 도움을 받던 스키터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그들의 삶이 담긴 책을 출판하기로 한다.

당시는 마틴 루터 킹과 케네디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흑인 인권운동이 고조되었던 시기이자, 이에 반대하는 백인의 테러가 빈발하던 시기였다. 한 번도 자신들의 억압을 말할 기회가 없었던 흑인 가정부에게는, 이를 말하는 것조차 테러를 무릅써야 할 만큼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영화는 눈물겨운 그들의 고발을 생생히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용기와 우애를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낸다. 관객은 울고 웃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특히 자신의 집 흑인 가정부에게는 그렇게 모질게 대하면서, 아프리카 기아 인구를 돕겠다며 자선 행사를 여는 백인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민중을 외쳤던 1980년대 운동권은 왜 대학 청소노동자의 처우를 돌보지 못했을까? 스스로의 위선을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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