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각장애인이지만 더 넓은 세상 본다”
  • 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1.10.2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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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세계장애인위원회 부의장 강영우 박사 / “백악관 정책보좌관 되기까지 장애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시사저널 임준선

“나는 한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다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오늘 나쁜 일이 생기면 미래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는 법입니다.”

<시사저널>은 10월20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국 백악관 장애위원회 정책보좌관을 지낸 강영우 박사를 만났다.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의 눈은 끊임없이 반짝였다. 마치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느릿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바로 ‘긍정의 힘’이다. 그는 “내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도 감사할 일이다”라며 자신의 장애까지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박사는 “실명(失明)한 것은 분명 나쁜 일이다. 하지만 이 나쁜 일 때문에 더 좋은 일들이 생겼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가장 좋은 일은 바로 장애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강박사는 그동안 백악관에서 정책보좌관으로 활동하며 22명의 국가 정상들을 직접 만났다. 현재 그는 유엔 세계장애인위원회의 부의장이자 루즈벨트 재단 고문으로 활동하며 이들과 여전히 교류하고 있다.

‘No where’에서 ‘Now here’로 생각 바꿔

강박사는 ‘실명이 만남의 기회’가 되었던 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지난 1975년 그가 미국 피츠버그 대학 대학원생 시절의 일이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그는 하얀 지팡이에 의지해 사거리 교차로를 건너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옆에 차 한 대가 섰고, 차 주인은 그를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차 주인은 당시 연방 검사장이었던 리처드 손버그였다. 손버그 검사장은 이후 연방 검찰청장 및 법무차관을 거쳐 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1990년에는 미국 장애인 민권법 제정이 통과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강박사는 “손버그 장관과의 인연은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강박사는 원래부터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든 시련들이 그에게 폭풍우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13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축구공에 맞아 망막 박리로 시력을 잃었다. 그가 실명했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8시간 만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집안의 가장이나 다름없던 누나는 평화시장 봉제 공장에서 일을 하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로로 숨졌다.

그는 한동안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강박사는 “어느 날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지 잃은 것에 집착하거나 불행해하기보다 열 가지 가진 것을 헤아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각장애 고아가 된 것은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각장애 고아가 된 그는 곧장 시각장애인재활센터로 보내졌다. 재활센터에서 기초 재활 교육을 받은 이후 그는 서울맹학교에 중등부 1학년으로 입학했다. 맹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자신의 인생 진로를 결정짓는 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당시 맹학교를 졸업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안마사가 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늘 대학에 가서 전문직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라고 말했다.

강박사가 원했던 일은 원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면 심리학을 전공하려고 했었다. 미국 UCLA 교육대학장이 내가 다니던 맹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내 생각을 듣고 ‘네가 원하는 공부는 심리학보다는 특수교육이 더 가깝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고, 그래서 연세대 교육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맹학교에 다니면서 인생의 배우자도 만나게 되었다. 주인공은 당시 맹학교에 봉사 활동을 나온 여대생 석은옥씨였다. 둘의 만남은 이후 부부의 연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는 기회가 없다고 좌절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No where’라는 말을 생각해봐라. (기회가) 아무 데도 없다는 이 말은 달리 보면 ‘Now here’ 즉, 지금 여기에 있다는 뜻이 된다.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반은 해결된다. 지금껏 내 인생이 그랬다”라고 말했다.

‘사소한 좌절’에 무너지는 청춘들 안타까워

강박사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앞도 보지 못한 처지에서 남들보다 5년이나 늦게 학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해야겠다는 의욕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연세대를 졸업한 이후에는 미국 유학을 꿈꾸었지만 그때에도 역시 ‘장애’가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1972년에는 장애가 유학의 결격 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장애인에게 불평등한 법적 조항을 없애달라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되었고, 일리노이 대학 교수 등을 거쳐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역임했다. 또 지난 2006년에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상과 가치관을 실천해온 공로로 루스벨트 재단이 선정하는 1백27명의 위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그동안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와 좌절에 더 익숙했다. 그렇기 때문일까. 강박사는 대학 입시나 취업과 같은 사소한 실패와 좌절에도 금방 무너지는 ‘한국의 청춘’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한다. 특히 그는 교육 전문가로서 한국의 교육 방식에 대해 우려를 느낀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결국 한국의 교육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교육열은 대단하지만 그 방향은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강박사는 “그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명문 대학 진학과 관련된 것이다.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만 해도 (외국인 입학생 가운데) 한국인의 숫자가 가장 많다. 그런데 문제는 낙제하고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도 한국인이 가장 많다는 점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다 보니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얼마 못 가 노력해야 할 동력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한국 교육의 큰 병폐이다”라고 꼬집었다.

강박사는 ‘진짜 성공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동력, 즉 ‘원동력’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노력을 하게 하는 힘이 동력인데 한국에서는 그 동력이 일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거나 좋은 직장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 등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람의 크기는 그가 꾸는 꿈의 크기와 비례한다. 단기적 목적을 이루는 데 매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강박사는 자신의 두 아들 역시 각각 세계적인 안과 전문의와 백악관 특별보좌관으로 길러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난 4월 자신의 성장기와 양육 경험 등을 토대로 한 저서 <원동력>을 출간한 바 있다. 10월 초에는 그의 아내 석은옥 여사도 <해피라이프>라는 책을 출간했다. 강박사는 아내의 책 출간 일정에 맞춰 내한해 각종 강연에 참석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에게 마지막 조언을 덧붙였다.

“나는 시각장애인이지만 누구보다도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다. 생각이 바뀌면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면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나는 지금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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