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협조하느니 굶으리라 외쳤던 분”
  • 이상돈│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 승인 2011.11.0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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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에 대한 외손자의 회고담 “최남선·이광수가 ‘중추원 참의 받으라’ 강권하자 발끈”

▲ 고희동 화백이 생전에 작품 활동을 했던 서울 원서동 가옥에서 이상돈 교수가 유명인과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시사저널 전영기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는 춘곡 고희동 화백(1886년 3월~1965년 10월)이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가옥은 고화백이 생전에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한때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뜻있는 분들의 노력과 서울시의 관심에 힘입어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고, 내년 봄에 일반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관직에 있다가 을사늑약 체결되자 그만둬

고희동은 슬하에 1남4녀를 두었는데, 막내딸이 필자의 어머니인 고계본 여사(83)이다. 원서동 집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일제 말기와 광복 직후에 부친을 가까이 모시면서 당시에 겪었던 많은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희동의 부친은 1883년에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등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고영철(1910년대 작고)이다. 고영철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 텐진에서 영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했으며, 보빙사 일행 중 영어를 해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고영철의 부친인 고진풍은 중국어 역관으로, 아들을 네 명 두었다. 셋째 고영희(1849~1916)는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친일 개화파가 되어 한성판윤, 주일 공사, 탁지부 대신 등 화려한 관직을 지냈다. 하지만 고영희는 고종 퇴위와 한일합병에 앞장서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직위와 거금을 하사받아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올랐다. 중국어 역과에 합격한 넷째 아들 고영철은 텐진에서 영어를 배우고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통리아문 주사, 봉화·공원 군수를 지냈으며, 을사늑약 후 관직을 그만두었고 한일합병 뒤에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고희동은 고영철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한시에도 능했다.

14세 때인 1900년에 고종이 외국어 교육을 위해 세운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해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17세 되던 해에 궁내부 주사로 발령받아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번역 일을 했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었다. 청운의 꿈을 가졌을 20세 나이에 국권이 유린되는 것을 보고 관직을 그만둔 고희동은 나중에 “나라가 망해서, 그림을 그리고 주국(酒國)에 빠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고희동은 24세이던 1909년에 동경미술대학에 입학해서 1915년에 5년 정규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로 서양화가가 탄생했음을 세상에 알려서 화제가 되었다. 고희동은 작품 활동뿐 아니라 서화협회를 결성해 안중식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로서 <서화협회전>을 여는 등 미술계 조직 활동을 했다.

서화협회는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많아서 총독부에 감시를 당했고, 결국 <서화협회전>은 중단되고 말았다. 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鮮展)’에 마지못해 두 번 출품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그것을 매우 후회했으며 서화협회가 1939년에 해산된 후에는 어디에도 출품을 하지 않았다. 같이 북촌에 살던 김성수, 송진우 등과 교류가 깊었는데, 그 인연으로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기자가 되어 창간호 제호를 도안했고 신문 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중앙·보성·중동·휘문 등 북촌에 있던 중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김일성, “고희동 용서할 수 없다”며 납치 특명

▲ 초대 예술원장 시절 고희동 화백과 외손자 이상돈. ⓒ이상돈 교수 제공

광복이 되자 김성수, 장면 등과 친분이 있었던 고희동은 자연스럽게 우익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다. 정부 수립 후에는 <국전(國展)>을 발족하고 그 운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했다. 6·25 때는 북한군에 납치될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김일성은 남침을 명령할 때 “남한 문화예술인 중에 고희동과 장발(장면 박사 동생으로,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냈다)은 용서할 수 없다”라면서 인민군에게 이들을 납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서울이 북한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외조부 고희동은 그래도 안전할 것 같은 필자의 부모님 집(종로구 체부동)으로 피신해 오셨다.

하지만 얼마 후에 인민군 병사들이 들이닥쳤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시 시간을 벌어 외조부를 집 뒤의 장작 더미 속에 숨겨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겼다. 인민군이 떠난 후에 필자의 어머니가 외조부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긴 수염을 가위로 자르고 허름한 두루마기와 밀짚모자로 승려처럼 변장시켜서 서울 근교의 절로 피신하도록 해서 간신히 납북을 면했다.

1951년 1·4 후퇴 때 필자의 외가와 친가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영주동에서 집을 빌려 머물렀는데, 필자는 거기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에 나라가 정상화되자 국전 심사위원장과 초대 예술원장을 지내면서 미술계를 이끌었다. 어릴 적에 경복궁 경내에서 열린 국전에 부모님을 따라 가서 외조부 등 많은 사람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정초에 원서동 집으로 세배를 가면 사랑채에는 손님들이 넘쳐흘렀다. 외숙모와 이모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했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고미술품을 수집한 전형필, 외조부에 이어 2대 예술원장을 오래 지낸 소설가 박종화 등이 외조부와 교류가 깊으셨다. 부산 정치 파동, 4사5입 개헌으로 한민당 계열 정치인들이 이승만 박사와 완전히 결별하자 외조부도 자연히 야당 성향을 띠게 되었고, 자유당 말기에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는 단체에 원로 예술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1959년에는 아들이 사업에 실패해서 정든 원서동 집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1960년에 4월 학생 혁명이 일어나자 외조부는 7·29 선거에 출마해서 백낙준 등과 함께 참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5·16이 발생했다. 이듬해에 외조모가 돌아가시자 상심하신 외조부는 장면 박사를 대부로 하여 천주교에 귀의했다.

1965년 3월,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외조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는데, 서울대병원장을 지낸 김동익 박사 덕분에 위기를 넘기셨다. 이 소식을 듣고 제기동 집으로 찾아가 뵈었더니 얼마 후에 장면 박사가 문병차 오셨다. 그 후 병세가 서서히 악화되어 그해 10월22일에 타계했다.

운명하실 때 필자의 어머니가 옆에 계셨고, 우연히 집 앞을 지나가던 수녀님이 종부성사를 해주셨다. 영결식은 사회장으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 공터에서 치러졌는데, 앞자리에 담담하게 앉아 계시던 장면 박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면 박사도 다음해 6월에 세상을 뜨셔서 필자는 한 시대가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2005년에 타계 40주년을 맞아서 서울대 박물관이 <고희동 회고전>을 열었다.

고영철·고희동 부자에 대해 문헌 조사를 한 김란기 박사(역사문화정책연구원장)는 대한제국 시절의 관료들과 일제하의 지식인들이 결국은 친일 행보에 가담하게 되는데도 유독 고씨 부자는 그렇지 않아서 놀랍다고 말한다. 고희동은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았고, 중추원 참의 자리를 끝내 완강하게 거절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던 즈음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원서동 집으로 찾아와서 외조부에게 중추원 참의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외조부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요. 일본이 미국을 이길 수 없소” 하자, 두 사람은 “춘곡이 그걸 어떻게 아시오?” 하면서, “그래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요”라며 중추원 참의를 받으라고 강권했다.

그러자 외조부는 화를 내면서 “나는 차라리 굶을 것이요”라고 했다. 두 사람이 “춘곡은 아사주의(餓死主義)요?”라고 하자, 외조부는 “그렇소, 나는 아사주의요”라고 맞받아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외조부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60여 년 전에 미국을 먼저 방문한 부친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고 상념에 잠겨본다. 돌이켜보면 고영철·고희동 부자는 격동기 한국에서 한 세기를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가셨고, 그러기에 후손들 역시 자존심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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