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뚫던’ 시트콤이 왜 ‘바닥’을 뚫고 있나
  • 정덕현│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1.11.14 15: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이킥>이 암울한 현실을 담아내게 된 이유

▲ 윤유선, 안내상, 윤계상, 서지석(맨 왼쪽부터). ⓒMBC

<하이킥>이 달라졌다. 모순된 세상에 ‘하이킥’을 날리는 그 행위는 여전하다. 하지만 그 동작이 가진 힘이나 뉘앙스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2006년 <거침없이 하이킥>, 2009년 <지붕 뚫고 하이킥>에 이어 2011년 돌아온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에서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 변화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한때는 ‘거침없었고’, 한때는 ‘지붕을 뚫었던’ 하이킥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짧은 다리’가 된 채 역습을 노리고 있을 뿐이다. ‘짧은 다리’는 물론 농담 섞인 말이지만 여기에는 어떤 태생적인 한계의 의미가 풍겨온다. 애초부터 하이킥을 날릴 수 없고, 날리려 한다고 해도 닿을 수 없는 그 ‘짧은 다리’의 비애. 돌아온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 암울한 현실을 밑그림으로 그려넣고 있다.

▲ 이종석, 크리스탈 ⓒMBC

이 ‘짧은 다리’를 대변하는 두 인물이 바로 안내상과 백진희이다. 안내상은 하루아침에 친구 때문에 도산하고 빚쟁이에 몰려 길바닥에 나앉은 인물이다. 반면 백진희는 이 시대 청년 실업을 표상하는 인물로 등록금 빚 때문에 독서실에서도 쫓겨나는 인물이다. 결국 이 시트콤은 홈리스가 된 두 인물에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그들이 몸을 의탁하는 곳은 각각 윤계상과 박하선의 집. 얹혀사는 두 인생의 삶은 처절하다. 안내상은 여전히 그를 쫓아다니는 빚쟁이를 피하기 위해 집에 비상시 신호를 보낼 징을 걸어둔다. 빚쟁이가 들이닥치면 “윤종신!(빚쟁이 중 한 명이 윤종신을 닮았기 때문이란다)”을 두 번 외치고 징을 친 후 일제히 피신을 하는 식이다. 한편 백진희는 얹혀사는 처지가 눈치 보여 음식 잔반을 처리(?)하거나 옆집에서 간을 보겠다며 사실상 한 끼 식사를 하는 식으로 아낀 생활비 목록을 일일이 적어 박하선에게 보여줄 만큼 처절한 삶을 살아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집이 땅굴로 연결된다는 설정이다. 어느 날 안내상은 우연히 지하 땅굴로 떨어지게 되는데, 빚쟁이로부터의 피신처가 되는 이 땅굴에서 그는 다른 탈출구를 만들려 한다. 그런데 그렇게 탈출구라고 뚫은 곳이 하필 박하선네 집 화장실 변기 구멍이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는 백진희가 앉아 볼일을 보고 있다. 이 기막힌 설정은 출구 없는 두 인생의 상황을 절묘하게 이어붙인다. 길바닥에 나앉은 중년 가장이 탈출구를 뚫다가, 그나마 자신의 시공간이라 생각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백진희라는 청춘의 ‘빵꾸똥꾸’를 하게 되는 상황. 이것은 이 시대 힘겨운 두 세대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즉, 승자 독식의 세상에서 패자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그림이다. 이만큼 처절한 시트콤의 풍자가 있을까.

세대 간 갈등 대신 세상의 모든 불안과 우울 담아

▲ 강승윤 ⓒMBC

하지만 그렇다고 <하이킥3>의 현실 인식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뚫리게 된 지하 땅굴은 각자 삶을 살아가던 두 집을 연결시킨다. 땅굴로 인해 박하선네 집과 윤계상네 집 사이에 이른바 ‘실크로드’가 열리는 셈이다. 이 길을 통해 각자 ‘짧은 다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소통하고 교감하게 된다. 물론 길이 늘 좋은 것만 전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분쟁이 생겨 이른바 ‘입가(入家) 절차’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 두 집을 연결하는 땅굴은 이들이 처한 바닥의 ‘짧은 다리’ 인생을 표상하면서도 동시에 이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또 다른 ‘역습’을 노리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때는 ‘지붕을 뚫던’ 하이킥이 이제 ‘바닥을 뚫게’ 된 것은 그만큼 시대가 더 각박해지고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그 어려워진 인물들 간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바닥을 뚫는’ 시대 정서가 반영된 때문인지 시트콤은 웃음 끝에 짠한 페이소스를 남긴다. 웃음의 코드는 권위를 조롱하고 깎아내리는 것이라기보다는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물들의 처절함을 더 과장되게 그리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그래서인지 이 시트콤은 웃기기는 하지만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과거의 ‘하이킥’ 시리즈에 비교해 어둡고 무겁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웃음의 코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마지막 장면, 즉 신세경과 최다니엘이 죽음을 맞이하는 충격적인 결말에서부터 예기된 바 있다. 김병욱 감독은 시대에 흐르는 이 비극적인 정조를 감지한 듯하고, 그래서 한없이 가볍게 웃어오던 대중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리면서 이 웃음이 하나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하이킥3>는 그 정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지붕이 아닌 바닥을 뚫게 된 것이 아닐까.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 뚫고 하이킥>의 웃음의 코드는 수직적인 구조, 즉 권위의 해체에서 비롯된 바 있다. 즉 이 당시의 <하이킥>에는 해체될 대상으로서의 권위, 즉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존재했다. 이순재나 나문희 같은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하이킥3>에는 기성세대를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대신 안내상이나 윤유선을 위시해서 그 아래로 다양한 캐릭터들이 ‘수평적으로’ 더 넓게 포진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사실 시트콤에서 캐릭터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고영욱, 박지선 ⓒMBC

장기판에서 어떤 포진을 취하느냐에 따라 공격과 수비가 달라지듯 시트콤에서 어떤 캐릭터들로 포진시키느냐에 따라 이야기와 웃음의 코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물 구성은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이순재나 나문희 같은 ‘고참’ 세대가 만들었던 수직적인 캐릭터 구조 대신 수평적으로 더 넓어진 캐릭터 구조를 만들어놓고 있다. 그래서 수평적인 캐릭터 구조의 <하이킥3>는 다른 계층이나 계급의 전복이 아니라 같은 계층에서의 충돌과 부딪침을 더 많이 다루게 된다. 박하선네 집과 윤계상네 집이 수평적으로 서 있고 그 아래로 땅굴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구조는 <하이킥3>의 웃음이 이전 <하이킥> 시리즈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잘 말해준다.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직시해서 우울함 넘어서려 해 

시트콤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즉 시추에이션과 코미디가 붙여진 장르이다. 따라서 시추에이션, 즉 상황이 주는 공감대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실 상황과 조응하지 않는 시트콤의 상황은 공감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아마도 김병욱 감독은 이 시대의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저 쉽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만큼 처절하다는 것이다. 실로 모두가 꼭 해야만 할 것처럼 대학에 들어가고, 살인적인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빚을 지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취업이 되지 않아 빚쟁이로 전락하는 상황, 팍팍해진 삶 때문에 하루에도 몇 명씩 삶을 포기하고 마는 가장이 생기는 이 상황에서 어찌 쉽게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 <하이킥3>는 바닥을 치는 중이다. 더러 우울하지만 어쩌랴. 그 우울함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바닥을 외면하기보다는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연대와 역습을 모색하는 데 있는 것을. 

 ‘빵꾸똥꾸’와 ‘뿌잉뿌잉’, 시대의 코드를 담다 

<지붕 뚫고 하이킥> 최고의 유행어는 ‘빵꾸똥꾸’였다. 진지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빵꾸똥꾸’는 용어가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방통위에서 권고 조치를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일종의 욕이라고 볼 수 있는 ‘빵꾸똥꾸’를 통해 독해진 세상을 진지희라는 아이를 통해 느낄 수 있게 했던 유행어였다. 한편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뿌잉뿌잉’은 ‘빵꾸똥꾸’에 비견되는 유행어가 되었다. 삼촌에게 노트북을 얻기 위해 ‘뿌잉뿌잉’ 어색한 애교를 부리는 이종석은 어찌 보면 이 시대 청춘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유행어이지만 그 속에는 그 시대의 코드가 숨어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