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선물 투자’에 숨은 5대 미스터리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1.11.14 15:5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의 선물 투자와 관련해 갖가지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SK는 이미 지난 2003년에도 선물 거래 때문에 손길승 당시 회장이 유죄를 선고받은 적이

▲ 선물 투자로 거액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동남아 지역 출장을 마치고 지난 4월30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후 한 취재진의 질문에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연합뉴스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가 선물 투자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검찰에서는 최회장 형제가 선물 투자 등에 총 5천억여 원의 돈을 투자해 이 중 3천5백억~4천억원가량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돈을 날렸음에도 검찰의 수사를 받는 이유는, 최회장 형제의 선물 투자 창구 노릇을 한 베넥스인베스트먼트에 SK텔레콤 등 SK 계열사가 투자를 했고 그 가운데 9백92억원이 최회장 형제의 선물 투자를 전담했던 인물의 계좌로 흘러가는 이상 징후가 수사 과정에서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많다.

소유한 지분 평가액만 3조원대인 국내 3위 재벌 그룹 총수가 돈이 부족해서 선물 투자에 나섰을까? 선물 거래로 거액의 돈을 단숨에 날릴 수도 있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것이 어떤 거래였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필요한 만큼만 띄엄띄엄 정보를 흘리고 있는 형국이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에도 이번 사건의 의문점은 끝내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03년 SK 비자금 사건은 최근에도 ‘검찰이 행방을 밝힌 비자금은 10분의 1’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건이 잇따라 공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사건의 다섯 가지 의혹을 짚어보는 것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추적했다.

1. SK와 선물 거래의 악연

SK와 선물 거래는 악연이다. 지난 2003년 SK 비자금 사건 때도 선물 거래가 문제가 되어 손길승 그룹 회장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8년부터 4년 동안, 손회장이 에스케이해운의 자금 7천8백84억원을 주주 임원 단기 대여금 명목으로 인출해 선물 투자에 나섰다가 5천1백84억원의 손실을 본 것이다. 그런 쓰라린 경험을 했던 최회장이 다시 직접 선물 거래에 나서서 4천억원대의 손실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 고위험이라는 것을 알고도, 창사 이후 최대 위기를 자초했던 것이 선물 거래였음에도, 최회장은 왜 또다시 선물에 손을 댔을까. 

선물(先物)은 미래에 사고팔 상품을 현재 시점에 정한 가격으로 매매 계약을 하는 파생 금융 상품이다. 여름철에 김장용 고랭지 배추를 밭떼기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싼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면 이득이다. 밀이나 옥수수 같은 농수산물, 원유나 금·고무 같은 원자재, 달러나 엔화, 주가지수 등 시장에서 팔리는 모든 상품을 놓고 선물 계약을 할 수 있다.

선물은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 1을 따면 거래 상대방은 1을 잃는다. 지난 10여 년간 SK 사람들을 상대로 선물 거래를 한 그 ‘누군가’는 1조원대의 돈을 번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운이 좋은 상대가 한 사람인지, 여러 명인지, 어느 나라의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선물 거래를 담당하고 최회장의 돈을 입금받은 베넥스의 금융 계좌까지만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5천억원대의 손실을 기록하고 감방 생활까지 했던 최회장이 선물 거래에 나섰다는 것 자체에 대해 의아해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와 관련해 재계 정보에 정통한 한 인사는 ‘추측’이라는 단서를 달고 “단순한 선물 거래가 아니라 돈의 이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볼 필요도 있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파생상품 거래를 하는 한 펀드매니저는 “거래 상대방을 지정해서 선물 계약을 맺는 상품을 만드는 것은 이론상 충분히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브로커로 선물 거래 라이선스를 쥐고 있는 증권회사만 끼면, 거래가 잘 안 되는 장외 파생상품(OTC) 종목에서는 거래 상대방을 지정해서 맺는 선물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지만 거래 상대방이 누구였는지 국내 금융 당국이나 사정 당국에서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추적 가능한 연결 고리가 베넥스에서 끊어지기 때문이다.

2. 최태원 회장의 경영권이 취약한가

최회장이 선물 거래에 손을 댄 이유에 대해 SK그룹은 공식적으로는 “회장 개인의 일이라 알 수 없다”라고 답하고 있다. SK쪽에서는 여기에 ‘회장 일가가 지분만 있지 돈이 없다’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할 실탄이 없다’라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실제로 지난 2003년 SK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난 뒤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이 ‘지배 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SK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K㈜의 지분을 매집해 경영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때 재계에서는 포스코나 하나은행 등 여러 세력이 나서서 SK의 경영권 방어를 도왔다. 

SK 비자금 사건이 마무리된 뒤 최회장이 가장 먼저 드라이브를 건 것도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를 위한 지배 구조 개선이었다. 그 결과 SK그룹은 현재 최회장이 지분 40%를 가지고 있는 에스케이씨앤씨가 그룹 주력사인 SK㈜의 지분 32% 정도를 확보하는 구조로 변했다.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은 모두 SK㈜가 1대 주주로 자리 잡고 있기에 사실상 에스케이씨앤씨가 SK그룹의 지주회사인 셈이다.

지분 관계만 놓고 보면 SK가 외부의 경영권 공격에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는 구조로 바뀐 셈이다. 때문에 최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돈이 필요해 선물에 손을 댔다’는 것은 적절한 설명은 아닌 셈이다. 

3. 모든 것이 최재원 탓?

이번 사건은 애초에는 ‘최회장의 1천억원대 선물 사고’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최회장의 선물 사고가 외부로 공개되던 시점에서 재계에서는 최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의 손실액도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최부회장도 최회장만큼이나 선물 거래를 즐겨 했다는 것이다. 

검찰발 ‘전언’도 수사가 진행될수록 최부회장에게 타깃이 좁혀지는 양상이다. ‘SK 계열사의 투자금을 차명 계좌를 통한 자금 세탁을 거쳐 직접 빼돌리는 과정’에서 최부회장이 이를 주도한 것으로 보고 검찰이 자금 흐름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부회장이 무리한 선물 투자를 ‘주도’한 이유는 계열사 지분이 너무 적어 이를 확보하기 위한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SK 주변의 전언이다. 

실제로 최부회장의 계열사 지분은 적다. 형제간 공동 경영의 기치를 들고 그룹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지만, 지난 11월9일 기준으로 그가 갖고 있는 SK 계열사의 주식 지분 시가총액은 61억원에 불과하다. 지난 2001년 말 그는 SK㈜의 지분 0.07%와 SKC 지분 3.4%를 갖고 있었지만 10년이 흐른 지금 SKC 0.27%, SK네트웍스 지분 0.08%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애초에도 지분이 적었지만 그나마 있던 지분도 전부 현금화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최부회장의 지분 평가액은 국내 1천대 주식 부호 순위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낮다. 

그럼에도 최부회장이 단독으로 이번 선물 거래 건을 주도하고 그룹 계열사 전문 경영인들에게 베넥스에 대한 투자를 독려할 만한 위치였는지는 의문이다. 최부회장은 지난 1994년 SKC에 입사해 1996년 상무보로 승진해 사업기획실장을 맡았다. 이어 1999년 SK텔레콤에서 신사업 추진책, 2002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2004년 SK엔론 부회장과 SK E&S 대표이사 부회장이 되었다. 그가 다시 SK그룹의 헤드쿼터에 합류한 것은 지난 2009년 3월 지주회사인 SK㈜의 공동대표로 오면서부터다.

4. 로열패밀리 외에는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을 알아낸 이는 누구인가  

2003년의 SK 비자금 사건도 그랬지만 이번 사건의 발화 지점도 오리무중이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아주 깊숙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검찰이 정확히 알고 현장을 급습해 증거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검찰에서는 글로웍스의 주가 조작 사건을 수사하다가 베넥스인베스트먼트가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냈고 이를 수사하다가 최회장 형제와 베넥스 간의 이상한 돈거래를 인지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베넥스에 대한 압수수색은 지난 3월에 있었고, SK 계열사에 대한 돌발적인 동시 세무조사는 지난해 11월에 있었다. 게다가 정기적인 세무조사 담당 부서가 아닌 기획 조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투입되었다. 글로웍스의 박성훈 대표가 주가 조작을 벌인 시점은 2008년부터 2009년 8월. 이후 검찰의 내사가 시작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최회장의 선물 거래 창구였던 베넥스도 이때 박성훈 대표의 전주 노릇을 하며 글로웍스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

검찰에서는 글로웍스 사건을 수사하면서 베넥스에 대한 조사를 벌이다가 ‘우연히’ 베넥스가 최회장 형제의 선물 거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밝히고 있다. 재벌가의 은밀한 돈거래에 관련된 진상은 자연 발화가 아닌 내부자 폭로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말이다.

5. ‘판도라의 상자’ 베넥스와 하빈저  

이번 최회장 선물 거래 건에 연루된 회사는 베넥스인베스트먼트와 하빈저 캐피털 파트너스(Harbinger Capital Partners)이다. 베넥스에는 SK그룹에서 최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김준홍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하빈저는 최회장에게 선물 투자를 권유했다고 알려진 은 아무개씨가 일하던 회사이다. SK계열사들은 하빈저 캐피털은 물론 베넥스에도 투자했고, 베넥스가 하빈저에 투자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은씨는 지난 2001년 미국계 기업 국내 법인의 대표로 부임했다. 그 무렵에는 벤처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재벌 2세가 경영 전면에 나서는 시기와 맞물려 재벌 2세 모임이 각광을 받았다. 은씨는 그 무렵 재계의 젊은 벤처 창업자와 재벌 2세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모임에서 최회장을 만났다.

이번 거래의 또 한 축인 베넥스의 오너는 김준홍씨이다. 김준홍씨를 단순히 유능하고 재주 좋은 엘리트로만 보기는 힘들다. 그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가문의 일원이기도 하다. 김준홍씨의 부인 이혜정씨(43)의 어머니 구자혜씨는 구인회 회장의 외손녀이다. 이혜정씨의 아버지인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은 대림그룹 창업주 이재준 회장의 막내동생이다.

김준홍씨가 SK그룹의 ‘금고지기’로 비치지만 실상 그는 한국 재벌 인맥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인 것이다. 부인인 이혜정씨도 프랜차이즈 사업 등 사업가로 뛰고 있다. 이씨는 지아앤지나라는 회사의 대표이사로 있고, 이 회사에는 김준홍씨도 이사로 이름이 올라 있다. 혜정씨는 큰오빠 이선용씨가 사장을 맡고 있는 아시안스타의 이사이기도 하다. 이선용 사장은 레스토랑 TGIF를 국내에 들여와 성공을 거둔 뒤 롯데그룹에 매각한 인물이다. 이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80학번으로 최태원 회장의 대학 1년 후배이다. 지난해 물의를 일으킨 최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철원 전 M&M 사장도 고려대 경영학과 88학번이다.  

이번 수사 과정에서 김준홍 전 대표와 이혜정씨가 제일저축은행에서 90억원가량을 대출받을 때 세운 보증인이 최태원 회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최회장과 김씨 부부의 관계는 단순히 전문 경영인과 오너 회장의 관계를 넘어선 재벌가 이너서클의 멤버라고 볼 수도 있다. 

▲ 지난 8월1일 SK E&S와 케이파워의 합병에 대해 축사를 하고 있는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연합뉴스

재벌가 2·3세가 금융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과 결합해 사고를 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LG그룹 방계 3세가 지난 2008년과 올 상반기에 구속된 것도 모두 전문적인 금융 지식을 활용해 주식시장에서 작전을 벌이다 일어난 일이다. 재벌가 자제들의 ‘작전’은 재벌 2세 커뮤니티의 폐쇄적인 속성상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그동안 소문으로만 나돌았었다.

이번 최태원-재원 형제는 금액 면에서나 국내 3대 그룹의 핵심 오너가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이전 사건과 규모를 달리한다. 게다가 수사 과정에서 이번 금융 거래의 키 노릇을 한 베넥스 본사 사무실의 압수수색을 통해 검찰이 어떤 자료를 확보했는지도 주목된다. 압수된 서류 속에 또 다른 재벌 2, 3세들의 은밀한 거래 내역이 담겨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베넥스로 들어간 SK 계열사의 돈이 최회장 형제의 돈 관리를 한 무속인 김원홍씨의 계좌로 흘러들어갔다’는 검찰발 전언의 의미도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증거 자료에는 여러 계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에 하나 최회장의 부인인 노소영씨 등 최씨 일가의 계좌가 들어가 있을 경우 이 사건은 아직도 오리무중인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판도라 상자를 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