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왜 노래방 도우미 일에 나서게 되었나
  • 경남 창원·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1.11.2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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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씨의 생은 누구보다 주름이 깊었다. 그동안 겪었던 시련이 깊었던 탓에 유혹에 쉽게 무너졌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네 살 때 입양되었다. 하지만 아들만 셋인 집에서의 ‘더부살이’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김씨의 한 지인은 “지원이가 종종 양부모로부터 학대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공부를 무척 하고 싶었는데 학교에 보내주지 않고 집안일을 시키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마음에 쌓인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가출을 하게 된다. 그러다 지난 1998년 경남 마산의 한 가출 청소년 보호 기관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중학교를 졸업했고, 그 뒤로 줄곧 혼자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자립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비를 버는 것은 필수였다. 하지만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4년 전 즈음에는 창원시의 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모았다. 당시에는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함께 살고 있었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3년 전인 지난 2008년 남자친구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김씨의 뱃속에는 남자친구의 아이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남자친구의 가족측으로부터 조금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아이는 이내 유산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김씨는 돈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빌려준 보증금으로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보증금을 돌려주어야 할 상황에 몰려 ‘돈이 되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사망 이후 폐인같이 살아왔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한동안 인터넷 게임에 중독되다시피 지냈다. 방에 컴퓨터 3대를 두고 게임을 할 정도였다. 인터넷 게임을 통해 한 친구를 알게 되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던 그에게 그 친구는 ‘보도방’에 다녀보라는 제의를 했다. 결국 그가 들어간 곳은 창원시 상남동에 즐비한 한 ‘보도방’이었다.

노래방 도우미로 생활한 지 약 1년 반 만에, 그에게 남은 것은 1천만원이 넘는 빚과 나빠진 건강 상태로 앙상하게 마른 몸이 전부였다.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한 한 노래방 도우미 그리고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아무도 없는 장례식을 치를 뻔했던 것까지. 그의 생은 마지막 장면까지 비참함의 연속이었다.

김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꾸려진 대책위의 최갑순 공동대표는 “김씨의 죽음이 세상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위험한 도시에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더는 김씨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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