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두는 광고계의 ‘미친 존재감’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1.12.04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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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광고제 연속 수상 등 주목받는 ‘두산가 4세’ 박서원 빅앤트 대표

박서원 대표는 최근 에세이집 을 펴내 자신의 ‘반전’ 스토리를 전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빅앤트인터내셔널의 박서원 대표(33)는 대중 앞에 등장하면서 세 번의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2009년 반전 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는 광고가 한국인 최초로 세계 5대 광고제의 최고상을 모두 수상했다. “젊은 친구가 기특하다”라는 평가가 대세였다. 그 다음 해에 ‘그 친구 알고 보니 재벌 그룹 회장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반전이었다. 입신양명의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를 기대했던 대중의 호감은 급속히 식었다. 그런데 그 재벌 아들이 스커트(?) 차림에 빡빡머리로 돌아다녔다. 세 번째 각인이었다.

대중 사이에 어떤 이미지이건 간에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2010년에는 대형 건물 전면을 뒤엎는 북쉘프 광고로, 올해는 거리의 금연 재떨이 광고로 뉴욕의 원쇼에서 3년 연속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쯤이면 그의 광고 재능이나 그가 이끄는 광고회사 빅앤트인터내셔널(백앤트)의 솜씨가 ‘재벌 끝발’이나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최근 그는 <생각하는 미친 놈>이라는 책을 펴내고 대중에게 직접 자기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늦깎이로 산업 디자인 배워 재능 펼쳐

성형외과 광고. ⓒ 빅앤트인터내셔널 제공
왜 책을 냈을까.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이라는 시선도 이미 충분히 성가실 텐데. 그는 “3년 전 처음 상을 탔을 때는 책을 내자는 제의를 많이 받았다. 그때는 너무 빠른 것 같아 사양했다. 그러다 3년 연속 상을 타니까 올 들어서부터는 내게 오는 메일의 내용이 바뀌었다. ‘당신 이야기를 내 책에 썼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니까 어차피 남이 내 얘기를 쓰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쓰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점검하고 싶었다. 상을 통해 인정받은 것도 사실이니까 나와 함께했던 친구들의 일을 책으로 내면 누군가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책을 내기로 했다”라고 저간의 사정을 전했다.

그는 책을 통해서 그가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공개했다. 그는 상문고 시절 한 반 55명 중 50등을 했다. 그는 “노느라고 공부 못해서 부모님께 걱정을 끼쳤지만, 나쁜 짓은 하지 말자는 철칙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공부 잘하는 동생과 비교당하는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하고 더는 공부와 관련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의 장래 희망은 계속 바뀌었다. 영화배우, 영화감독, 요리사, 경호원 등이 그의 머릿속에서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가 재벌 집에 태어난 것도 운이 좋았지만, 더 운이 좋았던 것은 그의 부모님이 “무얼 해도 좋다. 네가 해서 즐거운 일이면 된다”라고 그를 격려했다는 점이다.

북쉘프. ⓒ 빅앤트인터내셔널 제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신히 4년제 대학 경영학과로 진학한 그는 3학기 내리 1점대 이하의 학점을 받아들고 자퇴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영어 공부만 해서 간 유학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최종적으로 발견한 자신의 재능은 산업 디자인이었다. 미술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그는 귀국해 육군 사병으로 병역을 마치고 미술학원을 다닌 뒤 2005년 9월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에 입학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박서원 학생은 더는 꼴찌 전문이 아니었다. SVA에서 A학점이라는 것도 받아보고 선생님의 총애라는 것도 받아보았다. 그리고 2006년 동기생 네 명과 함께 빅앤트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 중 두 명은 지금 빅앤트 서울 사무실에서 AE 겸 CFO(한장권)로, 크리에이티브디렉터(마이클 비바웃)로 함께 일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CEO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다. 무늬만 광고인이 아니라 현장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는 광고 일이 왜 좋았을까. “광고는 예술과 상업의 중간점이다. 두 개를 합쳐놓은 모습이다. 재미있는 요소가 많다. 또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라는 점, 아이디어를 끌어올리고, 결과물이 나왔을 때 반응까지 모든 것이 즐겁다. 결국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그는 광고 일에서 “디렉터는 멀리 보고 넓게 보는 안목이 제일 중요하고 크리에이터로서는 호기심이 제일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작은 회사였던 빅앤트는 2009년 반전 광고로 명성을 얻은 뒤 작지만 큰 광고회사로 뿌리를 내렸다. 서울에 10명 안팎, 뉴욕에 5명 안팎의 직원이 근무한다. 서울사무소가 중심축이다. 그는 아버지 회사와 비즈니스로는 별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두산 일은 1년에 한두 건 하는 정도이고 최소 제작 비용을 받는 정도이다”라고 한다. 현재 빅앤트의 가장 큰 광고주는 매일유업이나 동화약품 등이다.

그는 향후에도 빅앤트의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다만 “아이디어 공장으로서, 기존의 빅앤트라는 브랜드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제품을 개발하는 회사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이 점이 그에 관한 네 번째 각인 요소일 것이다. 재벌가 3, 4세 중 경영 수업 중인 차기 경영인이 아니라 전문가로 창업 전선에 포지셔닝한 것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그 또래의 재벌 3, 4세들이 계열사를 이용한 빵집 전문가나 수입차 대리점주로 사업운을 테스트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궤도이다.

‘재벌 의탁형’ 광고 대행 방식에 비판적

금연 재떨이. ⓒ 빅앤트인터내셔널 제공
그는 재벌 계열사 광고회사(인하우스)에 대해서 비관적이었다. 지금 한국의 광고회사 매출 순위는 모그룹의 계열사 숫자와 매출액에 자동 연동되는 구조이다. “내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올 것이다. 외환위기 때 재벌들이 유동성 문제에 부딪히자 광고회사를 팔았다가 최근 몇 년간 다시 거둬들였다. 지금은 아이디어 소스가 고갈되어서, 사람이 없어서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 때문에 재벌 의탁형 편대 비행 체제는 붕괴될 것이다.”

그는 ‘창의력은 엉덩이에서 나온다’는 말을 했다. 진득하게 앉아서 머리가 터지게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승부가 달려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열정도 중요하지만 ‘노력과 근성’을 더 강조했다. 앉아 있을 때 머릿속을 학대하는 그는, 운동도 몸을 학대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 검도를 열심히 했던 그가 요즘 공들이고 있는 운동은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다. 쇳덩이나 밧줄, 화물차 타이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운동이다. 미국 특전사 군인들이 전투 체력을 단련할 때 하는 운동이다. “성격도 공격적이고, 운동도 공격적인 것을 좋아한다. 미술을 공부할 때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 나 스스로를 몰아쳤다. 그렇다고 닦달하지는 않는다. 공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매서운 경영자이기도 하다. 기본급 50만원에 나머지는 성과급으로 지급한다. “마음 편하게 있으면 서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산이다. 내가 더 치열하게 일해야 옆에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래야 조직이 굴러갈 수 있다. 인센티브 평가를 할 때 결과와 과정을 반반씩 반영한다. 그런데 과정이 좋은 사람이 결국 결과도 좋을 수밖에 없더라.”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워밍업을 위해 외모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었다. 그는 남보다 더 번듯한 이목구비를 가졌음에도 삭발을 하고 다닌다. 이른 나이에 탈모 증세일까? “군대 있을 때 머리가 제일 길었다. 군대에서는 삭발하면 반항한다고 해서 삭발하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짧게 잘랐다. 나는 강한 것을 좋아한다. 이 머리는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주관이 분명한 B형이었다. “B형이 나쁜 남자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B형을 나쁜 남자라고 말하는 것은 B형이 많기에 이슈가 되었거나 아니면 B형인 사람이 매력이 많아서 관심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웃음) 그는 책을 통해서 얻는 수익금은 모두 ‘좋은 일’에 쓰기로 했다. 일단 책 인세의 70%는 난치병 유아 환자를 돕는 데 쓰기로 결정했고, 나머지 30%도 더 좋은 일에 쓸 궁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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