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타협 안 되는 국회에 절망했다”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1.12.18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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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불출마 선언한 정장선 민주당 사무총장 / “서울시장 경선 당시 ‘박원순 쇼크’로 변화 깨달아”

ⓒ 시사저널 이종현

정치권에서 불출마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장선 민주당 사무총장의 불출마 선언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부터 경기도 평택시 을에서 내리 3선을 한 정총장은 내년 총선에서도 당선이 유력한 것으로 점쳐졌다. 속된 말로 호남 지역구에 안주하는 정치인도 아니었고, 비록 3선임에도 18대 국회 들어 국회 지경위원장과 사무총장을 맡은 것 외에는 딱히 당의 ‘은덕’을 입은 실세 정치인도 아니었다.

그는 대표적인 민주당 내의 ‘온건 협상파’였다. 지난 11월 ‘한·미 FTA 비준안’ 처리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지만, 민주당 등 야당의 완강한 반대와 한나라당의 일방적 강행 처리로 묻히고 말았다. 그는 “대화와 타협이 완전히 실종된 지금의 국회에서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라고 밝혔다. 여러 불출마 선언들이 이어지지만 그 자체에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지금, 그나마 정총장의 ‘진짜’ 불출마 선언은 우리 정치권에 경종을 울려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12월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총장을 만났다.

이번 불출마 선언에 대해 정치권 주변에서는 다들 놀라워하는 분위기이다. 내년 총선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컸던 만큼 민주당에서도 아쉬움이 큰 것 같다.  

당이 좀 더 많이 변화해야 한다. 지난 10월3일 서울시장 야권 단일화 후보 경선 때 ‘박원순 쇼크’를 받았다. 그때도 내가 당의 사무총장으로 경선을 총괄 지휘했는데, 여론조사상에서는 우리 당의 박영선 후보가 지고 있었으니까 현장 투표에 승부를 걸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 조직을 많이 동원했다. 그런데도 SNS로만 나선 박원순 후보의 지지자들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충격을 느꼈다. ‘아,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했다. 그동안 우리가 양당 체제 속에 너무 안주해왔다.

그때부터 불출마를 고민한 것인가?

아니다. 훨씬 전부터 고민이 있었다. 지난해 4대강 예산안을 강행 처리할 때 국회가 거의 난장판이 되는 것을 보고, 더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해보고, 만약 이런 상황이 또 오면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국회에서 이러는 것은 일과성이지만, 하루하루 살기 어려운 국민들에게 이런 모습을 계속 보여주어야 하는 것에 대해 진짜 비참함을 느꼈다. 3선까지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많이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출마 선언을 할 결심을 굳힌 것은 언제였나?

‘한·미 FTA 비준안’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 간 6인소위 등을 통해서 한창 협상을 벌일 때, 내가 ‘FTA 비준안 처리 문제는 여야가 끝까지 타협해야 한다. 아니면 국가적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겪게 될 것’이라고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다. 그때 사실 보도자료 말미에 ‘이번에 여야 타협이 안 되고 몸싸움이 벌어지면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라는 문구를 넣었었는데, 당내에서 같은 협상파였던 김성곤 의원이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그때 그 두 줄을 뺐다. 사실 그때 이미 결심을 했다.

가족들이 불출마 입장에 선뜻 동의하던가?

아내도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다’라고 내 결심을 지지해 주었다.

가족들은 정의원이 정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그런 것은 아니다. 두 아들들은 오히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듯하다. 큰아들은 군에 입대했고, 작은아들은 내년에 대학에 입학하는데, 그 애들은 어릴 때부터 아빠가 국회의원이었던 모습만 봐왔기에, 막상 아빠가 국회를 떠난다고 하니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나 보더라. 그래도 ‘아빠 생각 지지하니까, 아빠 편하신 대로 하시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것도 이미 한 달이 다 된 얘기이다.

이번 불출마 선언을 계기로 정치권 전체가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런데 막상 정의원 한 명의 희생으로 그냥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도 있다.

오늘 장세환 의원도 불출마 선언을 했던데…. 그분은 초선인데 참 안타깝다. 물론 물러나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국회 모습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흔히 우리가 정치권의 변화를 얘기할 때 인적쇄신만 얘기하는데, 그것은 당연하고, 더해서 제도와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 국회의 자정 능력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풀어나가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누구나 다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얘기한다. 한 국회가 끝나면 누구나 다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음 국회에서 잘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한다. 그러면서 또 선거에 나서서 국회 바꾸겠다고 약속하고, 공약 발표하고…. 계속된 그런 반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일부 언론에서는 한·미 FTA에 대해 민주당이 무조건 반대만 한 데 회의를 느껴 불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실제 그런 것인가?

일각에서 내가 마치 한·미 FTA 비준안을 찬성한 것처럼 오해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당론을 따랐다. ‘선(先)보완, 후(後)논의’였다. 여야가 이 부분은 조금씩 양보해가면서 대화를 통해서 합의를, 아니 최소한 합의가 안 되면 야당이 들어가서 표결은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었다. 결국 국회라는 곳은 대화와 타협을 하는 곳이 아닌가.

정확히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인가? 아니면 정계 은퇴까지 염두에 두는 것인가?

불출마 선언이다. 정치 문제는 시간을 좀 더 갖고 생각해보려 한다. 우선은 지나간 삶을 반추해보고, 민생 현장에 들어가서 직접 느껴보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할지 시간을 갖고 정리할 생각이다. 정치를 계속할지, 아니면 아예 다른 길을 가야 할지를….

우리 국회가, 그리고 정치권이 왜 이렇게 불신을 받는다고 보나?

우리의 교육이 어릴 때부터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지 않다. 또 이를 자꾸 야합으로 보는 선입견이 깊숙이 배어 있다. 조직의 논리가 강하게 대두되고, 당론을 정할 때 거기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경직성이 심하다.

지금 한나라당 쇄신파의 탈당도 잇따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중도 온건파가 합쳐서 신당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얘기도 나온다. 혹시 거기에 관심이 있나?

정의원은 “열심히 일만 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때 정말 서글펐다”라고 말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나는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도 않을 사람이니까, 당연히 거기에는 관여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을 하려면 진작부터 오래 협의해서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하겠다’는 수순이 되어야지, 선거 임박해서 당내 충돌에 의해서 당을 뛰쳐나와 신당을 하겠다고 하면 그 진정성을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 준비되지 않고 급조된 정당은 더 이상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

민주당에서 정작 불출마 선언을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도 많다. 예를 들어 중진이나 호남 지역에 안주하는 의원들 말이다.

꼭 중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엄격한 공천 기준과 그에 따른 냉정한 평가가 제도적 장치로 마련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당의 지지율을 조사해서 그 지역구 의원이 당 지지율보다 낮을 경우는 교체 대상에 포함한다든지 하는 것 같은. 무조건 선수와 지역만 따지는 것은 오히려 요식 행위가 될 수 있다.

지금 민주당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하다. 꽉 막힌 것 같다. 여당도 그렇지만, 야당도 마찬가지다. 외부와의 벽이 단절된 것 같고, 뭔가 자꾸 좁아지는 느낌도 있다.

당내에서 항상 협상을 강조하는 온건파이다 보니, 혹시 ‘사쿠라(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이른다)’로 몰리지는 않나?

(웃음)누가 그런 얘기 하더라. 그래도 내가 온건 중도파이지만, 그래서 당내에서 일부 불만은 있지만, 그래도 사쿠라 소리는 안 한다. 내가 별로 욕심을 내지 않고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내 정치 철학이 정책의 차이는 얘기할 수 있어도, 상대방을 비난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지금껏 3선을 했지만, 당내에서 내가 자리 한번 요구한 적도 없다.

불출마 이후에 무슨 계획을 갖고 있나?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일을 저질러놓고 봐야지, 미리 구체적으로 다 생각하고는 못 저지를 것 같더라. 우리 가족 형편이 그리 넉넉한 것이 아니다. 당장 애 둘이 대학생인데, 지금 아내가 교사로 일하고 있다. 우선 아내 봉급으로 생활해야 하고, 아주 소소한 것으로는 ‘차는 뭘 타고 다니지?’ 하는 것부터. 그런 걱정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그래서 일단 다 접어두고 결정을 했다. 이제부터 걱정을 해야 하는데, 아직 5개월 임기가 남아 있다.

5개월 후면 그야말로 실업자 신세가 되는 셈인데, 당장 두 아들의 대학 등록금부터 걱정이겠다.

내 나이(54세) 또래에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하거나, 나간 사람이 많다. 나도 그중의 한 명꼴인데, 그런 고통도 함께 느껴보고자 한다. 우선 차도 소형차로 바꿔서 직접 운전하고 다닐 계획이다. 평소에도 기차를 많이 탔기 때문에 장거리는 기차로 움직이면 된다. 당장이야 돈벌이는 좀 어려울 것 같다. 누가 직장을 제의해주면 고맙겠지만….(웃음)

지방의회 의원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야말로 풀뿌리 정치인인데, 처음 정계에 입문했을 때는 꿈도 꽤 컸을 법하다.

청와대 정무비서실에서 오랫동안 있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데, 거기서 지방자치 제도를 직접 만들었다. 그러면서 지방자치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고, 내 고향에서 시장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초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자마자 평택시장에 도전했는데, 선거 두세 달 남겨두고 갑자기 조그만 평택시가 3개 시군이 통합되면서 엄청나게 큰 대형 도시가 되었다. 불과 30대였던 내가 통합 평택의 시장에 도전하는 것은 버거웠다. 그래서 도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은 어떻게 되었나?

도의원 5년 하던 중인 2000년 2월에 민주당에서 제안이 왔다. 그해 4월 16대 총선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는 도의원이 명예직이어서 월급이 없었다. 활동비조로 받은 돈의 총액이 한 달 평균 100만원도 채 안 되었다. 너무 힘들어서 아파트도 팔고, 진짜 어렵게 생활했다. 5년 동안 도의원 하면서 밥을 거의 얻어먹고 다녔다. 아내의 교사 봉급으로 애 둘 키우기가 버거웠다. 그래도 5년간 도의원 하면서 해마다 우수 의원으로 선정되어 주변에서 권유도 많았고, 나 또한 좀 더 큰 정치를 해보자는 꿈을 키웠다.

12년간 국회의원 하면서 돈은 좀 모았나?

모을 틈이 어디 있나?(웃음) 부끄럽지만, 내 재산이 지금 가진 아파트 포함해서, 글쎄 다 털면 한 4억원이 좀 안 될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어도 급여의 실수령액이 월 7백만원 정도이다. 전에는 그보다 적었고. 그런데 아시다시피 나가는 돈은 워낙 많다. 아내 생활비 한 3백만원 정도 주고, 아파트 대출 빚 갚고 뭐 그랬다.

정치를 하면서 가장 후회했던 때가 언제였나?

나는 골프도 거의 안 친다. 올해도 두세 번 나갔을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나가야 하니까. 여행도 아내와 1박2일 잠깐 다녀온 것 빼고는 거의 가본 적이 없다. 그 외에는 정말 일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해도 국회의원들은 만날 일은 안 하고, 싸움만 하고, 자기 뱃속만 차린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때 정말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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