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정치인 단골 폭행녀' "이회창 후보 낙선된 것 억울해서”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01.0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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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정치인 단골 폭행녀’ 박명옥씨 인터뷰 / “앞으로 폭행 자제”

민주통합당 정동영 의원 폭행 및 박원순 서울시장 폭행으로 보호 감호를 받았던 박명옥씨가 지난 1월4일 인터뷰 도중 가방에서 태극기를 꺼내 펼쳐 보이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는 박명옥씨(63)는 일명 ‘폭행녀’로 불린다. 여러 건의 야당 정치인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안산이 지역구였던 천정배·김영환 민주통합당 의원의 사무실 직원 폭행, 정동영 민주통합당 의원의 머리채 폭행, 박원순 서울시장의 목덜미 폭행을 한 장본인이다. 최근에는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박씨는 누구이고, 왜 그런 행동을 할까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기자는 지난 1월4일 오후 서울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박씨를 만났다. 키는 1백60cm 정도 되었고, 한눈에 보아도 인상이 강했다. 어투에는 전율이 흘러넘쳤다. 그는 약 두 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진보 진영 인사들을 거론할 때는 어김없이 이름 앞에 ‘빨갱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박씨는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가족이 생이별을 했다. 아버지는 국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 포로가 되어 납북되기 직전 탈출했다. 하지만 가족과 연락이 끊겼고, 서로는 죽은 줄로만 알았다. 무남 독녀인 박씨는 어머니와 피난길에 올라 수원까지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수원에 정착해 살았다. 하지만 삶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외동딸인 박씨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그는 “엄마가 과일을 팔면서 생계를 근근이 꾸려왔고,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지냈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쫄딱 망했다”라고 회상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최종 학력은 수원 ‘매산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라고 했다. 생사를 알지 못했던 아버지는 나중에 재가를 해서 다섯 명의 이복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안산에는 결혼하면서 정착했다. 그렇다고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박씨는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은 후 이혼했다. 아들은 남편이 키웠으나 가끔 왕래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전남편이 치매에 걸렸고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박씨는 남남인 전남편을 자기 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병 수발을 위해 ‘요양사 자격증’을 따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나는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빨갱이한테는 악마이지만, 치매 걸린 전남편을 챙긴 것처럼 천사의 모습도 있다”라고 말했다. 전남편은 병세가 악화되어 지금은 집 근처의 요양원에 있다. 박씨와 전남편은 호적상으로는 여전히 남남이다. 아들과는 떨어져서 살고 있다. 큰아들은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말라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둘째아들은 경기도 화성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한다고 했다. 성격이 어떠냐고 묻자 “내 혈액형은 O형이다. 젊었을 때는 사귐성도 있고 주변 사람들과도 잘 지냈는데, 지금은 친구도 없고 그렇다”라며 말을 흐렸다.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아”

지난해 11월15일 민방위 훈련을 참관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폭행하는 박명옥씨. ⓒ 뉴시스
박씨는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과격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주부였다. 하지만 대선 이후에는 인생이 1백80˚ 바뀐다. 당시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전 자유선진당 대표)가 낙선하면서부터다. 그는 “한나라당 지역구 의원실에 당원으로 가입해 선거운동을 했다. 아침에 나와서 밤에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이회창님이 억울하게 낙선했다. 너무 억울해서 한 달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속상해서 끙끙 앓았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박씨는 이후보가 낙선한 원인을 진보 진영 탓으로 돌렸다. 야당에서 제기했던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 ‘차떼기’ 등이 극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이후 진보 진영은 박씨에게 ‘빨갱이’일 뿐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지지했던 대통령 후보를 낙선시킨 ‘악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 전 대표에 대한 박씨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이 전 대표의 이름을 말할 때는 ‘이회창님’이라며 깍듯하게 존대했다. 심지어 종교까지 이 전 대표와 같은 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박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나섰다. 국회의사당, 광화문, 서울역, 경찰청, 검찰청, 법원 등에서 ‘대통령 선거 무효’와 ‘노무현 정부’ 반대를 주장하는 1인 시위를 했다. 뉴라이트 코리아와 어버이연합의 집회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그는 “단체에는 속한 곳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왜 이회창 전 대표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이회창님이 판사 출신이어서 우리나라를 잘 운영하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핵무기도 없애고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어서 우리나라가 선진 일류 국가로 가게 할 사람은 이 전 대표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나도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회창님은 연세가 있으니 먼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박근혜 의원이 양보해야 한다.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박씨는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일각에서는 박씨를 향해 ‘미친 여자’라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박씨는 “나도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일을 한다. 이런 나를 미쳤다고 하는 것은 빨갱이들이다. 애국자들은, 나를 칭찬하고 애국자라고 부른다”라며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박씨의 행동은 현행법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그동안 법정 모독과 폭행 등의 혐의로 치료감호소에서 정신 감정을 받기도 했다. 벌금도 약 1천8백만원을 물었다고 한다. 2006년에는 법정 모독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공주치료감호소로 이감되어 1년 이상을 지냈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폭행한 사건으로 공주치료감호소에서 한 달 동안 정신 감정 치료를 받기도 했다. 경찰은 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이 기각했다. 충남 공주의 국립법무병원(치료감호소)은 법원·검찰·경찰이 의뢰한 형사 피의자의 정신 감정을 수행하는 법무부 소속 기관이다.

박씨는 자신의 행동을 독립운동가들에 비유했다.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도 독립운동을 하면서 감옥에 다녀왔다”라며 가방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기자는 박씨에게 ‘앞으로도 야당 정치인들에게 폭행을 계속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씨는 “검찰청에서 검사님이 폭행하지 말라고 전화가 왔다. 경찰에서도 형사님이 전화 와서 부탁했다. 아들도 운동하는 것은 좋은데 폭행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앞으로) 시위가 있으면 가는데, 폭행은 자제하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씨의 하루 일정이 궁금했다. 그는 “정해진 것은 없다. 그냥 뉴스에서 시위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운동을 하고 있다. 컴퓨터는 하다가 이제는 안 한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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