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교체’한 선수협, 추문 벗나
  • 박동희│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2.01.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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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와 관련한 비리 폭로와 고소·고발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유명 선수는 물론 감독 등 야구계 스타의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다. 야구계 인사들이 “이러다 야구계가 공멸하는 것이 아니냐”라며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야구인은 “고통스럽더라도 추락한 선수협 이미지 개선을 위해 피고름을 짤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선수협 추문의 발단과 진행 과정을 집중 취재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한국의 마빈 밀러다.” 지난해 초 한 베테랑 선수는 선수협 권시형 사무총장을 가리켜 그렇게 표현했다. 밀러는 메이저리그 선수 노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을 6천 달러에서 1만 달러로 높인 주인공이자 빅리그 구단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자유계약선수(FA) 제도를 이끌어낸 투사이다. 밀러가 선수노조 사무총장을 맡은 16년 동안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은 1만9천 달러에서 24만1천 달러로 높아졌다.

권총장을 밀러에 빗댄 것은 그만큼 선수의 권리 찾기와 복지 증진에 그가 크게 이바지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즈음 권총장은 구단 전유물이던 선수 초상 사용권을 선수협 소유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나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구단을 상대로 비타협적인 투쟁을 펼치며 선수협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지난해 4월4일. 뜻밖의 소식이 전해지며 권총장은 ‘한국의 마빈 밀러’에서 ‘비리 혐의자’로 추락했다. 그날 한 방송사가 ‘권총장이 야구 게임 개발업체로부터 프로야구 선수 초상 사용권 독점 사용과 관련해 금품 로비를 받은 정황이 포착되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라고 전한 것이다. 느닷없는 소식에 선수들은 “믿기지 않는다”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잘 아는 몇몇 야구인은 “예견된 일이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수협의 빛과 그림자, 초상 사용권

온라인 야구 게임은 사실성과 재미를 위해 실제 구단과 선수의 이름, 사진을 그대로 사용한다. 한 게임사 대표는 “이용자가 실제 선수를 플레이하며 자신이 그 선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지금껏 실명을 쓰지 않은 야구 게임은 모두 망했다”라며 왜 선수 실명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지 설명했다.

게임업체는 실제 구단 로고와 선수 실명을 쓰는 대가로 2009년까지 KBO의 마케팅 자회사인 KBOP에 초상 사용권료를 지급했다. KBOP는 이 가운데 70%를 8개 구단에 고르게 배분하고, 나머지 30%를 선수협에 배당했다.

선수협은 KBOP와 계약을 맺고 2006년 8월7일부터 2010년 12월31일까지 약 4년간 프로야구 선수의 초상사용권을 KBOP에 위탁한 터였다. 당시 초상 사용권은 매우 생경한 법적 용어였고, 선수들은 자신들의 엄연한 권리가 구단 소유인 것으로 알았다.

그러던 2009년 6월. 전 LG 투수 이상훈이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실명 캐릭터를 사용한 두 게임업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초상 사용권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당시 이상훈은 “내 허락 없이 이상훈 캐릭터를 쓰는 것은 불법이다. 당장 내 캐릭터를 게임에서 지우라“라고 요구했다.

게임업체에서는 “이미 KBOP와 정상적인 계약을 맺고서 선수 실명을 사용하므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역 선수는 KBOP와 계약을 맺은 게임업체가 쓸 수 있지만, 은퇴 선수는 예외였다. 게임업체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수를 인정했다. 이를 통해 선수협은 초상 사용권이 선수에게 있음을 자각했다. 이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야구 게임 ‘마구마구’를 서비스하는 CJ인터넷이 그해 5월 선수의 초상권 및 KBO 소속 8개 구단의 팀명·엠블럼을 3년간 독점하는 ‘프로야구 라이선스 독점 계약’을 KBOP와 체결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마구마구’의 라이벌 격인 ‘슬러거’는 졸지에 2010년부터 선수의 실명을 사용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선수협은 즉각 “여러 업체와 계약을 맺으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데도 어째서 KBOP가 특정 업체와 독점 계약을 맺었는지 의문이다. CJ인터넷과 KBOP가 맺은 독점 계약을 인정할 수 없을뿐더러 KBOP와 체결한 초상 사용권 위탁 계약도 2010년이 끝나면 재계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선수협은 “앞으로 CJ인터넷은 선수의 실명을 사용하지 마라”라며 CJ인터넷의 독점 계약 확보로 서비스 중단 위기에 처한 ‘슬러거’의 개발사 와이즈캣과 접촉한다. 선수협 비리는 바로 이때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야구계의 정설이다.

사업 중단 위기에 처한 와이즈캣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권 전 총장은 “2009년 10월 지인으로부터 와이즈캣 임원인 김 아무개씨를 소개받았다”라고 술회했다. “선수협은 독자적으로 초상 사용권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었고, 와이즈캣은 초상 사용권 계약을 통한 서비스 지속을 희망했다. 서로의 바람이 통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권 전 총장의 주장이다.

권 전 총장과 김씨는 사업적 관계로 인연을 맺었지만, 매우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권 전 총장의 지인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손민한 선수협 회장도 함께 어울렸다. 김씨가 권 전 총장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했다”라고 귀띔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게임업체와 선수협의 잘못된 만남?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연말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이가 틀어졌다. 김씨가 권 전 총장을 사기 혐의로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고소한 것이다. 김씨는 소장에서 “와이즈캣으로부터 받은 대부분의 자금이 권 전 총장에게 뇌물로 제공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 전 총장은 검찰 조사에서 “김씨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며 전면 부인했다. 이러면서 당시 김씨가 고소를 취하해 흐지부지되었다.

검찰 수사가 재개된 것은 지난해이다. 금융정보분석원에 ‘와이즈캣의 자금 흐름이 수상하다’라는 첩보가 들어오면서부터다. 검찰은 그해 3월25일 와이즈캣 자금 관리 담당자의 집 등 모두 일곱 곳을 압수수색해, 관련 장부와 회계 기록 등을 확보하고, 계좌 3백여 개를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100억원대 비자금 가운데 일부를 와이즈캣 관계자가 가로챈 단서를 확보했다. 이와 함께 100억원 가운데 상당액이 선수협으로 부당하게 흘러간 것으로 파악했다. 검찰은 권 전 총장을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그는 “나는 참고인일 뿐이다”라며 비리와 무관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검찰의 판단은 달랐다. 그해 4월 검찰은 ‘권 전 총장이 게임업체로부터 프로야구 선수의 초상 사용권과 관련해 25억원을 받았다’라며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그를 전격 기소했다.

그렇다면 당시 권 전 총장의 정확한 혐의는 무엇이었을까. 검찰은 공소장에서 ‘선수의 초상권 사업 업무를 수행하던 권씨가 게임업체 등에 독점 사용권을 주겠다고 접근해 명품 시계, 자녀 유학 비용, 판교 부동산 매입 비용, 현금 등 총 1백13회에 걸쳐 수십억 원을 수수했다’라고 명시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검찰 기소 내용을 보면 권 전 총장은 게임업체로부터 부동산 구입비조로 4억8천만원을 받았고, 자녀 해외 유학비 1억5백만원, 현금·접대비·산삼·백화점 상품권·스포츠 회원권 등으로 5억3천만원을 받았다. 해외여행 및 출장비로 3천6백만원, 법인카드 지원액으로 1천2백만원을 수수했다. 이와 함께 검찰은 권 전 총장이 게임업체로부터 7억원을 대여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는 증여라며 각종 불분명한 금액까지 합쳐 배임 규모가 26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 전 총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씨가 자신의 부정을 나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연일 제기되는 추가 의혹

권 전 총장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나 몰래 와이즈캣 대표로부터 ‘선수협으로부터 초상 사용권을 받아주겠다’는 명목으로 총 66억원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로비 자금이었지만, 대부분의 돈을 김씨가 착복했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김씨가 내게 책임을 씌우려고 고소한 것이었다. 부동산 구입과 자녀 해외 유학비 지원도 뇌물과는 거리가 멀다. 전적으로 김씨가 호의로 지원한 돈이었다. 그 돈도 다시 돌려줬다. 호의가 문제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초상 사용권 계약과 관련해 대가성으로 돈을 받은 사실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뇌물 수수자 대다수가 대가성을 부인하고, 이를 호의로 주장한다. 권씨가 현직 총장이 아니었다면 김씨가 그처럼 상당한 규모의 호의를 베풀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권 전 총장은 재판 중에도 사무총장직을 수행했다. 선수들은 권 전 총장의 재판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사건의 추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사실 아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이때 선수들에게 적극적으로 권 전 총장의 비리 의혹을 설명한 이가 있었다. 전 프로야구 선수인 강병규였다. 강병규는 권 전 총장의 재판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자료를 정리했다. 그리고 트위터를 통해 권 전 총장의 비리 의혹을 공개했다. 일부 선수는 강병규가 사기 혐의로 재판 중인 점을 들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선수협 문제에 개입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병규는 “나는 선수협을 만든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선수협이 옳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라고 반박했다. 강병규의 활동으로 선수협 비리 의혹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선수들도 조금씩 이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던 지난해 11월 각 구단 선수 대표는 대전에서 모여 손민한 회장과 권총장에 대한 해임 안건을 논의했다. 선수들이 처음으로 선수협 비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머리를 맞댄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권 전 총장이 현직을 수행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권 전 총장은 “비리 혐의는 인정할 수 없지만, 불미스러운 일과 관련해 책임을 지겠다”라며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해 12월9일 선수협 정기총회에서 선수들은 손민한의 후임으로 박재홍(SK)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임시 이사회에서 전 삼성 투수 박충식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신임 집행부를 구성한 선수협은 ‘투명한 운영’을 구호로 내걸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했다. 그 첫 시작으로 2000년 선수협 발족 이래 처음으로 외부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이전에도 회계법인이 감사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회계사가 직접 책임지는 회계감사는 생략한 채 회계법인의 검토의견서만 제출받을 뿐이었다.

회계 감사 결과, 몇 가지 의혹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박회장은 “최근 3년간 급여 이외 약 4억원에 달하는 돈이 성과급, 복리후생비, 업무추진비, 판공비조로 전임 집행부와 직원에게 지출되었다. 권 전 총장의 부인과 직원 자녀에 대한 의료비 지원액이 회장 결재 없이 지급된 한편, 권 전 총장 퇴직금 중간정산금도 과다하게 집행되었다”라고 밝혔다.

박회장은 “권 전 총장의 자가용 구입비도 선수협 통장에서 지급되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권 전 총장에게 규정에도 없는 체력단련비 6백36만원, 헬스클럽 회원권 구입비 1천8백39만원이 지급되었다”라고 폭로했다. 그는 이어 “이보다 더 큰 비리가 있었다. INP가 비리의 몸통 역할을 했다”라고 주장했다. 선수협은 초상 사용권 비리 의혹과는 별개로 회계감사를 통해 밝혀진 새로운 의혹들을 앞세워 1월9일 부천지청에 손 전 회장과 권 전 총장을 배임 혐의로 고소했다. 현재 손 전 회장과 권 전 총장은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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