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개혁’ 외치는 학자들 줄줄이 포진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2.02.01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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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잠룡’들의 경제 가정교사는 누구인가 / 박근혜-김종인, 손학규-김태승·유종일, 문재인-홍종학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대화하는 김종인 비대위원. ⓒ 시사저널 유장훈
1990년 3월 김종인 전 보건사회부장관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급한 부름을 받았다. 노대통령은 그에게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경제 정책을 총괄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경제 성장을 거듭하던 국내 경기는 1989년부터 적신호가 켜졌고, 1990년 1월 무역 수지 적자의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무분별한 아파트 건설로 부동산 투기 붐이 일면서 집값은 폭등했다. 무엇보다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최악의 상황이었다.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는 <시사저널>(제4호, 1989년 11월19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경제는 현재 심각한 구조적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다. (중략) 토지 소유와 관련한 불평등도는 더욱 심하다. 전체 인구의 3%도 안 되는 사람들이 전체 민유지의 70%를 소유하고 있으며, 지난 몇 년간의 지가 상승은 해마다 수십조 원에 달하여 9백만 근로자의 전체 소득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되어버렸다’라고 비판했다.

박근혜측 이한구·김광두도 대기업엔 비판적

손학규 고문과 대화하는 유종일 교수. ⓒ 연합뉴스
노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김종인 경제수석은 심각한 경제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재벌에게 칼을 댔다. 그는 당시 5대 재벌그룹의 기조실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도록 압박했다. 30대 대기업들은 “대한민국이 공산 국가인가”라고 볼멘소리를 냈지만, 청와대의 살벌한 기세에 꺾여 부동산 매각에 나섰다. 이때부터 김종인 전 수석은 ‘재벌 개혁’의 상징적 경제학자로 각인되었다. 이후 김 전 수석이 국회의원(비례대표)만 두 차례 더 역임했을 뿐, 더는 공직에 나서지 못한 이유는 대기업의 강력한 견제에 따른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난해 12월 김종인 전 수석이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사실상 ‘좌장’ 격으로 임명되자, 한 대기업의 중간 간부급 인사는 “내년(2012년) 선거의 화두는 복지가 아니라, ‘대기업 죽이기’가 될 듯하다”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졸업한 김 전 수석은 독일(뮌스터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복지와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적 성향의 경제 철학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기업 프렌들리’를 들고 나왔는데, 정부가 어떻게 국가 운영을 하면서 친기업을 내세울 수 있나. 차기 대통령은 양극화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안을 뚜렷하게 내놓아야 한다”라는 소신을 피력했다.

한때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렸던 김 전 수석은 이후 잠시 박위원장과 소원해진 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멘토’로 알려졌다가, 다시 박위원장의 곁으로 복귀했다. 어쨌든 그는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두 사람에게 모두 영향력을 미치는 위치에 놓인 셈이다.

그 여파는 당장에 나타났다. 박위원장이 지난 1월19일 “대주주가 사익을 남용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폐지로 인한 부작용)를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밝혀 대기업을 바짝 긴장케 했다. 현 정부가 ‘친기업’을 내세우며 출총제를 폐지한 것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발언이었다. 당초 박위원장은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를 들고 나올 정도로 친기업 성향이었다. 엄청난 변화인 셈인데, 물론 그 배경에는 김종인 전 수석이 있다. 김 전 수석은 1월26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오늘 뉴스를 보라. 대통령이 한마디 하니까 당장 신라호텔에서 커피 베이커리 카페를 철수한다는 발표가 나오지 않나. 지금 다보스 포럼에서도 나타났듯이 (대기업 규제는) 시대의 흐름이 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비대위 내에서) 가능한 분위기가 되니까 내가 얘기하는 것이지, 가능하지도 않은 분위기인데 내가 말을 하겠나”라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박근혜 위원장과의 갈등설을 일축했다. 

안철수, 진보적 경제 철학 가지고 있어

정두언 의원 초청으로 강연하는 장하준 교수. ⓒ 시사저널 유장훈
김 전 수석과 함께 ‘박근혜 경제 가정교사 3인방’으로 꼽히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과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상대적으로 ‘시장주의자’ 성향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도 대기업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적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 이의원은 지난해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 대기업들은 아직도 가족 경영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지금 벌써 3대까지 내려가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경영자이면서 주주가 되어 있다 보니까 공사 구별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시장에서 불공정 거래 관계에 대해서 너무 함부로 행동하는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했다. 김광두 원장 역시 최근 박위원장의 출총제 부활 발언으로 대기업의 반발이 심해지자 “개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감방에 가지만 재벌 총수가 저지르면 집행유예나 사면을 받고, 개인이 사업하는 것보다 재벌 총수 친척이 사업하는 일이 훨씬 쉬운 현실에 대해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고 스스로 밝힐 정도로 안철수 원장 또한 상당히 진보적 성향의 경제 철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스터디’를 통해 접촉하고 있는 경제학자들 역시 대부분 ‘반(反)대기업’ 정서를 가진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김종인 전 수석 또한 얼마 전까지 ‘안철수 멘토’로 알려질 정도로 안원장에게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안원장 자신이 벤처기업을 직접 운영하면서 체득한 대기업 위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문제 인식이 상당하다는 전언이다. 그는 지난해 3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한국 경제는 동물원 구조이다. 삼성·LG·SK 동물원이 있고 중소기업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해 그 동물원의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라며 평소 그답지 않게 강도 높은 수위로 대기업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재 여야를 넘나들며 상당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존재 또한 대기업의 입장에서 상당히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장교수가 쓴 경제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은 대권 ‘잠룡’들의 필독서가 되다시피 했다. 특히 경제 공부에 공을 들이고 있는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은 장하준 교수가 국내에 머무를 당시 만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에서도 정두언 의원이 장교수를 초청한 강연회를 열였으며, 한나라당 비대위에서도 장교수를 모셔 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진보적 성향의 장교수는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며, 복지와 분배를 강조한다. 그는 정부가 경제 정책에 일정 부분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장교수는 지난해 7월 한 강연에서 “지금 한국에서는 재벌이 신상품을 개발하고 연구하기보다 금융으로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재벌의 ‘금융 자본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기업이 금융으로 편하게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손고문의 경제 자문역을 담당하고 있는 김태승 인하대 교수와 유종일 KDI 교수는 진보적 성향이 뚜렷한 ‘재벌 개혁론자’들이다. 손고문의 멘토로 불리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또한 정치학자이지만, ‘분배와 복지 없는, 성장만을 위한 경제 정책은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문재인 민주당 상임고문과 가까운 인사로는 최병모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와 홍종학 경원대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특검 출신 변호사인 최대표는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 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홍종학 교수 역시 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로 꼽힌다. 여권의 ‘잠룡’ 정운찬 전 총리 또한 동반성장위원회를 이끌면서 대기업과 연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대권 잠룡 주변이 모두 ‘반대기업’ 학자들로 채워져 있다. 이래저래 대기업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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