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우롱하는 ‘짝퉁 기네스북’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2.02.1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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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및 지자체, 마케팅 차원에서 ‘가짜 인증’ 포장…‘월드 기네스’의 한국 공식 채널은 지난해 해체돼

이태권 LG전자 한국HE마케팅담당 상무(왼쪽)와 오회열 한국 기록원 본부장(오른쪽)이 인증서 수여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LG전자

‘무늬만’ 기네스북이 활개를 치고 있다. 실체도 없는 기관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라고 홍보할 정도이다. 업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한국 기네스 인증을 받았다고 언론에 홍보한 사례 가운데 90% 이상이 사실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기업들이나 지자체의 ‘기네스 마케팅’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LG전자는 지난 1월17일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새로 출시한 프리미엄 울트라북 ‘엑스노트 Z330’이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LG전자측은 자료에서 “국내 최고 권위의 ‘한국 기네스 기록원’으로부터 부팅 속도(9.9초)를 인증을 받았다. LG의 기술력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결과이다”라고 강조했다. LG전자는 탤런트 신민아를 통해서도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주요 일간지에는 ‘LG전자 울트라북 한국 기네스 인증’ ‘기네스가 인증한 LG전자 울트라북’ ‘신민아 기네스북에 도전한다’ 등의 보도가 잇따랐다.

LG전자, 울트라북 보도자료 내고 망신살

<시사저널> 취재 결과, LG전자가 밝힌 ‘한국 기네스 기록원’이라는 곳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LG전자가 당시 기록 인증을 의뢰한 곳은 한국기록원이었다. 이 회사 역시 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기네스협회(이하 월드 기네스)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예상된다. LG전자가 새로 출시된 울트라북을 홍보하기 위해 언론에 허위 보도자료를 뿌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기록원 역시 회사 이름을 바꾼 LG전자에 강하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커지자 LG전자는 보도자료에서 ‘한국 기네스 기록원’을 삭제했다. 아울러 울트라북이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내용도 뺐다.

LG전자의 한 관계자는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할 때부터 한국기록원과 협의를 했다. 한국기록원이 한국 기네스 기록원으로 잘못 나간 것은 단순한 실수이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국기록원의 입장은 달랐다. 김덕은 한국기록원 원장은 “보도자료가 나가기 전에 초안을 검토하는 것이 보통이다. LG전자는 초안조차 보내지 않았다. 한국 기네스 기록원으로 나간 사실도 나중에 언론을 통해 알았다”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LG전자의 과도한 ‘기네스 마케팅’이 부작용을 낸 것으로 평가한다. LG전자의 경우 현재 여러 제품이 월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세계 최초로 듀얼코어를 탑재한 옵티머스2X가 지난 2011년 4월 기네스북에 올랐다. 비슷한 시기 시네마 3D TV 역시 두 개의 세계 기록을 갱신했다. LG전자는 당시 프랑스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시네마 3D TV 범유럽 출시 행사를 개최했다. 이곳에는 소피 마르소, 끌로드 를로슈 등 영화계 인사뿐 아니라 유럽 각국의 취재진이 총출동했다. 참석한 인원만 1천5백여 명에 달했다. 이 자리에는 월드 기네스 심사관도 참석해 있었다. LG전자는 즉석에서 현장 참가자들이 3D 영화를 보게 하는 이벤트를 벌여 화제를 모았다. 현지 언론은 소피 마르소 등의 멘트를 받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역사상 가장 큰 스크린과 가장 많은 인원이라는 기네스 기록은 덤이었다.

국내에서도 그동안 여러 차례 ‘기네스 마케팅’이 진행되었다. LG전자는 지난 8월과 10월 부산과 서울에서 3D 영화 체험 행사를 개최했다. 그때마다 관객 동원 한국 신기록이 갱신되었다. LG전자는 “3D 영화 체험 행사가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이때도 LG전자가 기록을 인증받은 곳은 한국기록원이었다. 회사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LG전자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기록원과 공동으로 이벤트를 벌였다. 그럼에도 보도자료에 ‘한국 기네스 기록원’이라고 언급한 것은 의도적이라고 본다”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11년 월드 기네스의 한국 지사였던 한국기네스협회가 해체되었다. 이후 한국에는 월드 기네스의 공식 채널이 사라진 상태이다. 한국기록원이 현재 월드 기네스의 인증을 대행하고 있지만, 공식 계약 관계는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한국에서 인증을 받아도 기네스나 기네스북과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업이나 지자체의 기네스 기록 남용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김덕은 한국기록원 원장조차 “한국 기네스 인증이나 한국 기네스북 등재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기록원 인증이 정확한 표현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서울 소공동 웨스턴 조선호텔(왼쪽)과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기네스북 인증을 받았다는 인증서. ⓒ 시사저널 유장훈

한국기록원측 “기네스라는 용어 쓰지 마라”

LG전자가 문제의 보도자료를 냈던 비슷한 시기에 신세계 계열사인 웨스틴조선호텔도 ‘기네스 논란’에 휩싸였다. 웨스틴조선호텔은 지난 1월12일 조선호텔 개관 100주년 D-1000 행사를 가졌다. 호텔 관계자는 “지난 1996년 국내 최고(最古)의 서양식 호텔 인증서를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받았다. 이번 행사는 개관 100주년을 앞두고 호텔의 사료를 모집하기 위해 마련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조선호텔의 정문 왼쪽 벽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기네스북 인증을 받았다는 동판이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인증서 역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시에서 발간한 <서울육백년사> 등에 따르면 웨스틴조선호텔은 지난 1914년 조선철도국이 만든 ‘조선호테루’가 원조이다. 외국인(특히 서양인)을 상대하는 한국 최초의 호텔은 1902년 지어진 손탁호텔로 언급되어 있다. 지난 1934년 조선총독부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양식 호텔은 정동에 있는 손탁호텔이라고 지목했다. 이재현 대한황실재건희 상임위원은 “손탁호텔은 독일 여인 손탁 씨가 고종 황제의 자금을 지원받아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웨스틴조선호텔이 어떤 루트를 통해 한국 기네스 인증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조선호텔측은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까다로운 심사를 받았다. 일부 문제가 제기되어서 현재 내부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국기네스협회가 인증서를 남발하면서 월드 기네스로부터 직권 해지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수료만 내면 형식적인 조사 이후 한국 기네스 인증서를 내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웨스틴조선호텔 역시 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세계의 경우 지난 2010년 10월 신세계백화점 창립 80주년 때도 역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세계백화점은 8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신세계의 개점 80주년과 관련해 논란이 일었다. 신세계백화점의 효시는 지난 1930년에 설립된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이었다. 이 백화점은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주인과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 1963년 삼성그룹이 동방생명을 인수하면서 신세계백화점(당시 동화백화점)도 삼성가의 일원이 되었다. 이병철 회장 때만 해도 동방생명을 인수한 시점을 창립일로 보았다. 하지만 이명희 회장은 창립을 개점으로 바꾸면서 역사를 30년 이상 앞당긴 바 있어 의혹의 시각은 더했다.

업계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재계의 ‘기네스 마케팅’이나 ‘최초 마케팅’이 도를 넘어섰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KT는 최근 ‘쿡’ 광고에 등장한 아기가 최연소 모델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밝혔다. 이랜드의 경우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의 양식당이 최다 드라마 촬영 장소로 기네스 신기록에 올랐다고 홍보했다. CJ그룹 계열 CGV는 영화 오래 보기 기네스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공기업이나 지자체 역시 마찬가지다. 경기도와 코레일은 최근 보도자료를 통해 “민원전철 365가 한국 기네스에 등록되었다”라고 밝혔다. 도청 상황실에서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인증식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치적 홍보를 위한 혈세 낭비 논란이 일자 돌연 행사를 취소했다. 이런 사례들이 대부분 ‘기네스 마케팅’을 잘못 활용하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최고’ ‘최초’ 따내려 무리한 경쟁 벌이기도

한국기록원측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한다. 한국기록원측은 “기네스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라고 토로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자극적인 제목을 위해 여전히 ‘기네스’를 남발하면서 내부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유명 종합병원에 대해서는 ‘연간 1천건’ 수술 횟수를 홍보하기 위해 무리한 수술을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이 병원은 최근 거액을 주고 ‘스타 의사’를 데려왔다. 하지만 이 의사가 수술한 환자가 사망하면서 실적주의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해당 병원측은 “환자 유족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1천건 수술 달성 이후 벌인 자축 파티 역시 더 열심히 하자는 의미였다. 실적 때문이 아니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유족측은 “의사가 2011년 수술 건수 1천건 달성을 위해 피해자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유족들이 최근 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서초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해 향후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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