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있는 드라마’누가, 어떻게 만드나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2.21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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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브로커-선수가 삼각 커넥션 형성…폭력 조직·연예계 인사까지 개입돼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현대건설과 흥국생명 경기 전 양 팀 선수와 감독들이 최근의 승부 조작 사건을 사죄하는 인사를 하며 깨끗한 경기를 다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스포츠에 유독 생중계가 많은 것은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점 때문이다. 승패를 알고 보면 흥미가 떨어진다. 그런 스포츠에 ‘각본’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불법 스포츠 도박으로 돈을 벌기 위해 선수를 움직여 승부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스포츠팬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국가 대표급 현역 선수가 승부 조작에 연루되었던 프로축구의 승부 조작은 예고편 격이었다. ‘승부 조작’이 스포츠 토토에 베팅이 걸려 있는 거의 모든 종목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관련자와 종목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비인기 구기 종목도 ‘불법 스포츠 도박의 먹잇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팀플레이로 인해 승부가 갈려 승패를 조작하기 힘들다고 알려진 종목까지 오염시킨 승부 조작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수법을 알아보았다. 

승부 조작은 크게 세 축으로 이루어진다. 경기장에서 범죄를 실행하는 선수는 승부 조작이라는 피라미드의 가장 하부 단계에 있는 존재이다.

최상위에는 뒤에서 판을 만들고 지시를 내리는 전주(錢主)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직폭력배이다. 프로스포츠의 승부 조작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은 조직폭력배 검거였다. 지난해 4월 창원지방검찰청은 마산 지역의 조직폭력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기존의 사업들뿐만 아니라 승부 조작까지 개입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판돈을 마련해 베팅을 키우고 조작을 실행할 주연인 선수들을 로비하는 데까지 이들이 뒤를 받쳐준다. 판 하나를 설계하는 데 드는 돈은 최소 1억원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브로커이다. 이들은 전주와 선수를 연결시켜준다. 선수와 인연이 있고 신뢰를 받는 인물이어야 하는 만큼 다수가 전직 선수 출신이다. 그들은 선후배 간의 인간관계와 의리에 호소하며 ‘배우’를 모은다. 브로커를 만난 적이 있다는 프로축구 선수 A씨는 “선배가 밥을 먹자고 해서 몇 명이 함께 갔더니 선배가 브로커를 소개하더라. 처음에는 브로커를 운동했던 선배라고 말한다. 그렇게 두세 번 만나면 그때부터 제안이 들어온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13일 프로배구 승부 조작 파문과 관련해 한국배구연맹(KOVO) 주최로 프로배구 부정 방지 교육 및 자정 결의대회가 열렸다. ⓒ 연합뉴스
현역 선수도 몇 차례 조작을 경험한 뒤 직접 브로커로 나섰다. 상무 소속이었던 전 국가대표 김동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착수금까지 전달했다. 계좌 추적과 남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동화 박스 등에 현금을 넣어 전달했다. 충격적인 브로커도 있다. 바로 연예인이다. 지방 구단 소속인 프로축구 선수 B씨는 “알고 지내던 개그맨 형이 있는데 어느 날 보고 싶다며 내려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승부 조작 제안을 하더라”라고 전했다. 최근 프로배구 승부 조작을 파헤친 대구지검 강력부는 “연예인 매니저가, 조작될 승부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고 베팅을 했다고 알고 있다”라고 발표해 승부 조작 조직이 폭력 조직-연예계-스포츠계까지 광범위하게 세를 뻗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람들은 ‘승부 조작’에 대한 선입관이 있다. 우선은 낮은 연봉의 무명 선수가 승부 조작에 노출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관이다. 특급 스타가 고작(?) 수백만 원을 받고 승부 조작에 가담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축구의 최성국·김동현, 배구의 박준범·임시형 등 국가대표 출신 스타 선수가 관련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그런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승부 조작은 대중과 언론 매체의 관심이 적고 팀 기강이 해이해진 팀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군팀인 상무이다. 프로 무대에서 뛰지만 군인 신분이기에 연봉이 적어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또한 군인 신분이라도 개인별로 휴대전화를 지니고 있어 외부와의 접촉도 어렵지 않았다. 시즌 막바지 순위권에서 멀어진 팀도 집중 타깃이었다. 여자 종목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 배구의 유명 선수 두 사람도 검찰에 소환되었다. 스타크래프트로 대표되는 e-스포츠도 이미 조사를 받고 선수 퇴출이 이루어지는 등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한국배구연맹 홈페이지

첫 볼넷·쿼터별 스코어 등 베팅 항목도 다양

축구의 경우 점수가 많이 나지 않고 골키퍼와 수비진이 한 번의 결정적 실수를 함으로써 승부 조작이 가능하다. 이와 달리 야구, 농구, 배구는 스코어가 많이 나고 결정적 상황이 많은 종목이라 의도적 실수를 범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불법 스포츠 도박판에서는 단순히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 대해서도 베팅을 걸고 있었다. 지난해 축구계에서 승부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야구는 절대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전문가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구도 가능했다. 

대표적인 것이 ‘첫 볼넷’이라는 방법이다. 선·후 공격에 관계없이 먼저 볼넷을 내주는 팀을 맞추면 된다. 이런 방식이면 여러 선수를 매수할 필요도 없고 특정 선수의 플레이 조작만으로 조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농구의 경우는 쿼터별 스코어를 놓고 베팅판을 벌인다. 한 쿼터에서 팀 득점이 특정 수치 이하일 경우를 놓고도 베팅을 벌인다는 것이다. 자유투 성공 여부에 대한 베팅도 존재한다. 야구의 경우에는 승패가 아니라 볼넷이다. 배구는 서브 상황이 애용된다. 서브 에이스 횟수나 공격 형태에 대한 베팅까지도 가능하다. 베팅 종목은 결과에 그치지 않고 한층 세분화되었고, 방법이 날로 지능화되고 있는 것이 스포츠 승부 조작이라는 범죄의 진화이다.

이러한 베팅은 공식적인 스포츠 토토가 아닌 음성적 채널로 진행된다. 합법적인 채널은 베팅액에 한도가 있고 검찰 조사 후 감시의 눈이 심해졌기에 이들은 승부 조작의 장소로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를 애용한다. 포털 사이트 카페나 자체 사이트를 구축해서 불법적으로 진행되는 스포츠 도박은 시장 규모가 1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미 포털 사이트나 인터넷 방송 사이트의 스포츠 중계방은 불법 베팅 사이트 소개 글로 넘쳐나고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스포츠 도박의 천국인 중국, 유럽과도 연결되고 있다. 검찰에서 수사에 들어갔지만 조직이 해외에 있어 조사에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그들에 대한 일망타진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결국 몸통이 아닌 브로커와 선수 같은 가지만 쳐내는 것이 현재 검찰 수사의 한계라는 지적이 많다.

일각에서는 독과점 형태인 스포츠 토토에 대한 단독 사업권을 푸는 것이 이같은 사태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부가 세금은 늘리고 싶고 도박을 장려하는 모양새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특정 기업에 몰아준 형태가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불법 스포츠 도박을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축구, 야구, 배구, 농구 외에도 승부 조작이 만연하고 있다는 지적 또한 나오고 있다. 불법 스포츠 도박이 ‘태릉선수촌에 입촌하는 거의 모든 구기 종목’을 대상으로 도박판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가 선수까지 썩게 하고 있는 불법 스포츠 도박의 뿌리까지 도려낼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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