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 당서기 떠나면 ‘충칭 모델’도 구조조정 될까
  • 모종혁│중국전문 자유기고가 ()
  • 승인 2012.02.2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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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충칭 시를 무대로 펼쳐져온 개혁 실험, ‘왕리쥔 부시장의 망명 시도 사건’으로 전환점 맞아

중국 대륙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 충칭(重慶). 기원전 1천여 년부터 충칭은 고대 왕국 파(巴)의 수도였다. 전국 시대 말기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파국은 오랜 세월 동안 중원과 색다른 독립 국가로 번성했다. 수나라 이후부터는 유주라고 불리다가 남송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190년 왕자 조돈(趙惇)은 유주를 다스리는 공왕(恭王)에 봉해지고, 한 달 뒤에는 황제에 오르면서 도시 이름을 ‘경사가 겹치는(雙重喜慶)’ 충칭이라고 고쳤다.

지난 2월 초까지만 해도 충칭은 또 다른 겹경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는 충칭 시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영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충칭을 무대로 벌어지는 개혁 실험이 중국식 발전 모델로 격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월6일 일어난 왕리쥔(王立軍)의 망명 시도 사건은 장밋빛 환상을 수포로 만들어놓았다. 지난 2008년 말부터 보시라이가 벌여온 ‘공산당을 찬양하고 범죄를 소탕하는(唱紅打黑)’ 정치 이벤트의 우스꽝스럽고 허무한 결말이었다.

지난 3주 남짓 동안 보시라이를 둘러싸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국내외 보도를 유추해보면, 보의 낙마와 충칭 모델의 폐기는 예정된 수순인 듯싶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과 여론의 추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충칭 모델의 몰락은 잘못된 판단이다. 충칭 시 당서기직과 정치국 중앙위원 자리를 모두 내놓은 보의 추락은 돌이킬 수 없지만, 충칭 모델은 이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중국 충칭 시의 중앙에 위치한 인민대례당. 베이징의 톈탄(天壇)을 모방해 건축한 인민대례당은 충칭의 상징물이다.

보시라이의 정치 이벤트에 가린 개혁 성과

충칭은 양쯔 강(長江)과 자링(嘉陵)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도시이다. 중국 내륙에서 유일한 직할시이며, 인구는 3천2백만명에 넘는다. 전체 면적은 8.24만㎢로 한국의 5분의 4에 달한다. 충칭은 우리 민족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940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의 참화를 피해 충칭으로 터전을 옮겨왔다. 광복군을 창설해 군사 기반을 갖췄고 대일 항전 선포를 해 일본군과 아시아 전 전선에서 싸웠다. 1945년 8월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조국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다.

거대한 땅 크기만큼이나 충칭은 단일 도시라 생각하기 힘든 구조를 지녔다. 두 강이 합쳐지는 반도 형태의 도심에는 베이징과 상하이 못지않게 수십 동의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여기에서 2시간 정도 벗어나면 산과 논밭이 펼쳐지는 농촌 지대이다. 도심에는 첨단 유행을 좇는 젊은이들이 활보하지만, 농촌에서는 우리의 1970~80년대 거주 환경과 생활 수준을 겨우 영위하는 농민들이 고된 삶을 살고 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충칭은 내륙이라는 입지적 조건으로 인해 외자 기업의 관심과 투자가 적었다. 여기에 열악한 산업 인프라와 낙후된 기술력은 중국 기업조차 진출하기를 꺼리게 했다. 하지만 지난 2~3년간 충칭이 거둔 경제적 성과는 눈부시다. 2008년 전국 5위, 서부 지역 3위에 불과하던 충칭 시의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2009년 전국 3위, 서부 지역 1위로 상승하더니 지난해에는 전년에 비해 16.4%나 증가해 처음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이는 8% 성장에 그친 베이징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지난해 충칭 시 GDP는 1조11억3천만 위안, 1인당 GDP는 3만4천7백5위안을 기록해 1조 위안(1백79조3천억원) 클럽에 새로 가입했다. 이처럼 충칭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거둔 배경에는 IT 산업의 비약적인 도약이 있다. 2009년 HP와 폭스콘이 처음 진출한 이래 충칭의 IT 산업은 해마다 50% 이상 급성장했다. 특히 노트북은 지난해 2천5백만대를 생산했고, 올해 생산 목표치는 5천만대에 달한다. 전통적인 지주 산업인 자동차, 오토바이, 화공, 기계 등 중공업도 견고히 성장해 경제 성장의 일익을 담당했다.

충칭이 대내외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외형적인 경제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충칭 모델로 일컬어지는 도시화 정책과 호구(戶口)제 및 사회복지 제도 개혁, 국유 기업의 개조, 공공 임대주택의 시행 등 다방면에서 벌어지는 개혁 정책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의 도시화는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경제성장률을 따라가지 못했다. 2010년 현재 중국의 도시화율은 49.68%에 불과하다. 13억 인구 중 절반이 아직 농촌에 사는 현실은 중국의 낙후성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서 도시화가 더딘 이유는 불평등한 호구제 때문이다. 계획경제 시대 중국 정부는 인구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호구 등기 제도를 실시했다. 호구제는 단순히 도시와 농촌 주민을 구별 짓는 데 그치지 않았다. 도시 호구를 가진 주민은 의료·교육·양로·주택 보조금 등 다양한 복지 혜택과 생활 인프라를 제공받았다. 이에 반해 농민은 일정한 토지 사용권을 얻는 데 그쳐야만 했다.

개혁·개방 이후 농촌의 과잉 노동력은 곧 도시로 유입되어 농민공이 되었다. 농민은 도시에서 저임 노동자로 일하며 중국을 무역 대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한몫했다. 이러한 농민공의 희생을 바탕으로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을 구가했지만, 그 결실은 고스란히 도시민의 몫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농민공에 대한 각종 차별이 지속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도시민에게만 의존하던 내수 소비도 점차 한계에 다다랐다. 이를 타개하고자 중국 정부가 전면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도시화와 호구제 개혁이 중국 중앙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충칭이 모든 명예를 다 차지한 데는 황치판(黃奇帆) 충칭 시장이 거둔 국유 기업 개조 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충칭에 오기 전 황 시장은 상하이 푸둥(浦東) 신구 개발의 실무자를 지냈다. 황 시장은 부채 규모가 크고 경쟁력이 없었던 국유 기업의 문제점을 근본부터 뜯어고쳤다. 먼저 시 정부 산하의 자산공사가 국유 기업의 불량 채권을 매입토록 했다. 도심에 자리 잡았던 국유 기업을 교외로 이전시키고 회사 부지를 부동산 개발회사에 비싸게 팔아넘겼다.

부채가 없어지고 자본금이 확보되자, 국유 기업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이익이 늘어나자 자산공사의 불량 채권을 조금씩 매입해 부실을 털어냈다. 남은 이익은 이전한 교외 주변의 향진 기업을 육성하는 데 쏟아부었다. 이렇게 국유 기업을 개조하고 발생하는 수익을 활용함으로써 기업과 일자리가 더 많이 늘어났다. 기업과 일자리의 증가는 곧 충칭 시의 재정을 튼튼하게 해주었다.

지방 정부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고 당내 영향력이 컸던 보시라이의 주도와 중앙 정부의 지원이 받쳐주면서 실험은 급물살을 탔다. 2020년까지 1천만명의 농민에게 도시 호구를 주고 다양한 사회복지 혜택을 주는 개혁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래 최대 규모이다. 충칭의 도시화와 호구제 개혁이 성공한다면 성장에서 분배로, 수출에서 내수로 뒤바꾸려는 중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 기조는 연착륙이 가능해진다.

당서기 교체, 개혁 동력 되살릴 기회 될 수도

민생 순찰에 나선 보시라이 충칭 시 당서기. ⓒ 시사저널 모종혁
하지만 3년여 간의 과도한 정치 이벤트는 개혁에 필요한 자산을 낭비했다. 지난 수년간 23만여 차례에 걸쳐 벌어진 혁명 가요 보급 행사에 수억 위안의 경비가 소모되었다. 범죄 소탕 작전에 투입된 예산은 규모가 훨씬 커서, 2009년에는 무려 48억 위안(약 8천5백92억원)이나 쓰였다. 그 덕분에 1백50여 개의 야외 경비소가 생기고 범죄 발생률은 대폭 줄어들었다. 그러나 본질을 벗어나 외형에 치우친 나머지 개혁의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보시라이의 낙마는 충칭 모델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보시라이가 일으킨 홍색 운동에 의해 가려진 충칭 모델에 대한 재평가와 정책 추진의 정상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보시라이 후임으로 저우창(周强) 후난(湖南) 성 당서기가 거론되는 점도 주목된다. 저우창은 충칭에 있는 시난(西南) 정법대학을 졸업했다.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서 일하기 전 사법부에서도 오랫동안 근무했다.

충칭을 잘 이해하고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저우창이 차기 충칭 시 당서기가 된다면 충칭 모델은 내실 있는 발전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정법대학의 한 교수는 “충칭 모델로 대표되는 ‘공동부유(共同富裕)론’은 보시라이의 전매 특허가 아니다. 보시라이의 조기 낙마는 충칭 모델에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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