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사유화’ 차단할 장치 만들어라
  • 고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
  • 승인 2012.03.1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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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불법 사찰, “청와대가 증거 인멸 지시” 진술로 실체 분명해져…검찰 부실 수사도 책임져야

얼마 전 2010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의 증거를 없애 재판을 받고 있는 당시 장진수 주무관이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검찰이 증거 인멸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검찰의 지원관실 압수수색이 벌어지기 이틀 전 최종석 당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으로부터 ‘민간인 사찰 기록이 담긴 지원관실 관계자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없애라’라는 지시를 받고 하드디스크를 파기했다는 것이다.

이미 짐작은 했지만 거의 사실로 접하고 보니 먹먹함과 절망, 분노, 슬픔이 온몸을 감싼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세계가 부러워했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이 일로 국가는 철저히 사유화되어 뒷골목 조폭만도 못한 타락한 공직자들의 노리개가 되어버렸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헌법 제7조의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제12조의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 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한다’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라는 명령은 휴지 조각이 되어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형편없이 내려간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

장 전 주무관의 폭로를 통해, 이 사건에서 청와대는 지시하고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물어뜯고 검찰은 비호하고 은폐했다는 정황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 기관들이 총체적으로 공모해 저지른 박해의 대상은 다름 아닌 평범하고 나약한 민간인에 불과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 개인의 삶은 송두리째 파탄 나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명색이 정권을 운영하고 국가의 수뇌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념과 진영을 떠나 그에 맞는 당당함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그들은 사건이 불거지자 짜 맞추기 수사를 통해 윗선의 존재를 은폐하고 그 죄를 아랫선의 사찰 실무자들에게 떠넘겨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비굴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앞으로 수사가 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사건의 실체는 사실상 명명백백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뭘 지켜보고 발뺌하고 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런데도 지금 사건 은폐의 당사자들은 마치 남 일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은 3월7일 “사건에 대해 새로운 것이 나오면 검찰이 판단할 일이지 청와대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전체 공직자들을 이끌어나가는 지도부 위치에 있는 청와대가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증거 은폐 지시의 공모자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권재진 당시 민정수석은 현재 법무부장관 자리에 앉아 있고, 최종석 행정관은 외국 대사관에 나가 있으며, 이영호 전 비서관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사도 공직 어디에선가 버젓이 활개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사건 은폐의 공모 의혹을 받아왔던 검찰의 비호 정황도 좀 더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장 전 주무관은 “최행정관이 그런 지시를 하면서 ‘검찰이 (하드디스크 파기를) 문제 삼지 않기로 민정수석실과 얘기가 되어 있고 검찰에서 오히려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압수수색 당시에도 검찰은 중요 문서 자료를 일절 압수하지 않았고, 자신을 조사하던 수사 검사는 누군가와 수시로 통화하면서 갑자기 추궁을 그치더라고까지 말한다. 검찰이 왜 수사에 늑장을 부리고 캐야 할 것을 캐고 들지 않았는지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는 대목이다. 장 전 주무관의 폭로가 나오자 검찰은 재수사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골적인 부실 수사로 일관하던 검찰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수사를 벌일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 정말 검찰이 재수사에 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부실 수사에 대한 책임을 먼저 규명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도리이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 관계자들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전격 압수수색해 압수 물품을 들고 차량에 오르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사실 민간인 사찰이 이번 사건에 국한된 일만은 아니다. 현 정권하에서 국가정보원, 기무사 등에 의한 각종 불법적 민간인 사찰 의혹이 빈번하게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국정원은 ‘대운하 반대 교수 모임’ 교수 사찰, BBK 사건 담당 재판부 압력 시도, 시민·사회단체 후원 기업 자료 요구, 노동부 국정감사 사찰, KBS 후임 사장 논의 등 언론 정책 관여, 종교 대책 회의 참여, 환경영화제 지원 중단 개입, 희망제작소·아름다운가게 활동 개입, 조계사 경내 행사 취소 개입 등 무수한 의혹들을 받아왔다. 기무사도 불법적인 민간 사찰의 의혹을 받아왔는데, 몇 해 전 민주노동당이 증거로 입수한 기무사 소속의 군인 S씨의 수첩에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를 포함해 민간인들을 광범위하게 사찰해온 내용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도대체 대명천지에 이 무슨 해괴한 일들이란 말인가?

지난 몇 년 사이에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형편없이 강등되어왔다. 국제 인권 감시 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2011년 한국을 기존 언론 자유국(free)의 지위에서 부분적 언론 자유국(partly free)으로 강등시켰다. 2011년 언론 자유 지수는 전세계 1백96개국 가운데 홍콩과 함께 공동 70위를 기록했다. 프리덤하우스는 미국의 보수적 인권 단체로서, 2007년만 해도 한국을 정치 자유 1등급 국가로 분류하는 등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단계를 높게 평가해왔다. 그러나 이번 강등으로 한국은 국제적으로 인권 퇴행국으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민간인 사찰 막기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야

지금 피 흘리는 민주주의를 일으켜세우는 일만큼 중요한 기본이 있을까? 민주주의가 없으면 민생도 없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 사유화를 막을 확실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함과 아울러 국가 기관들 상호 간에 철저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해서 어느 누구도 국가 권력을 이용해 전횡을 일삼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의회가 행정부를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강화시키고, 정부 권력이 자의적 통치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각 권력 기관들의 독과점적 권한을 분산시키고 상호 견제하게 만드는 제도 개혁이 시급하다.

검찰·경찰을 비롯한 사법 기구 개혁과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해 국가 권력에 의해 국민의 인권이 침해받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과 군·공안 기구의 민간인 사찰을 엄격히 차단하고, 패킷 감청과 위치 추적 등 시민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제도로써 금지해야 한다. 시민의 온·오프라인에서의 의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사상·언론·문화의 자유를 가로막는 각종 검열 및 통제 장치를 폐지하며,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정치권이 여야를 초월해 나서야 한다. 일찍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물타기를 해온 느낌도 없지 않다. 심지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비협조적인 여당 의원들에 대해서조차 사찰을 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는 어느 진영에 국한된 정쟁 사안이 아니다. 이 사건은 아무리 평범하게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 누구에게도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가공할 만한 신체와 재산상의 위협이 갑자기 엄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암울한 군사 독재 시절, 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간첩으로 몰려 수십 년씩 감옥살이를 했던 일들이 있었다. 어느 누구의 손길도 미치지 않는 거대한 국가 권력의 밀실 속에서 인간 백정들의 고문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사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전체 국민의 극소수라고 해서 남의 일이라고 할 것인가? 바로 나 자신과 부모 형제에게 부지불식간에 닥쳐올 수 있는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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