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추억 속으로 ‘컴백홈’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김봉현│대중음악평론가 ()
  • 승인 2012.03.2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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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분수령 세운 지 20년…2010년대 ‘한류 아이돌’의 성장 위해 그들의 ‘유산’ 되새길 필요 있어

ⓒ 스타채널 제공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로 20년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기준으로 대중문화에서 큰 변화가 나타난다. 아이돌과 댄스음악이라는 K팝의 자산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들은 심의에 공개적인 이의 제기를 하거나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등 그 이전 ‘딴따라’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국 대중문화와 음악에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다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필요하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서태지 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해 우리 대중음악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물리적으로 1990년대가 시작된 것은 당연히 1990년이었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부터 1990년대라고 인식될 정도로 그들의 파괴력은 컸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때 신세대 혹은 X세대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처음으로 향유하기 시작한 세대였다. 이들은 개성을 원했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자신만의 문화, 동시에 서구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원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모든 욕망의 시대적 응답이었다. 시대가 그들을 요구했고, 그들은 시대를 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인해 시대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1990년 스타인 김민우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데뷔한 후 곧바로 군대에 갔는데, 제대하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자신을 맞았다고 했다. 그가 군대에 간 사이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진정한 1990년대를 열어젖힌 것이다. 그는 ‘서태지의 90년대’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었고, 결국 몇 번의 실패 끝에 가수 생활을 접었다. 김민우도 분명히 1990년에 데뷔한 90년대 가수이지만 ‘서태지의 90년대’ 이전에 활동했기 때문에 마치 1980년대의 스타처럼 느껴진다. 그럴 정도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0년대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노래의 전주나 반주는 팝송에 비해서 뭔가 허전했었다. 그 차이를 단숨에 메운 것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부터 비로소 전주만 듣고는 가요와 팝송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때부터 한국 지상파 TV의 쇼 프로그램에서 강력한 록 기타 사운드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로 인해 한동안 댄스음악에 기타 반주가 들어가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국이나 대중문화 산업계의 한 부품 같았던 가수를, 자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기획하는 아티스트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서태지 팬들. ⓒ 시사저널 사진팀자료
신세대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은 혁명이었다. 신세대는 자신들의 가수와 함께 기성세대에 대한 반란을 꿈꿨다. 이들은 기성세대보다 훨씬 자유분방했고, 서구 지향적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에 시작된 대중 소비 사회의 주체이기도 했다. 이들의 행태는 기성세대에게 이질적이었고,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로 인해 촉발된 10대의 괴성이 사회를 긴장시켰다. 그에 따라 터져나온 반발이 ‘악마주의’ 논란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정말 진지하게 악마주의 논란을 받아들였다. 그럴 정도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당대에 큰 충격을 가했던 것이다.

시대는 서태지와 아이들 편이었다. 아무리 악마주의 운운하며 막으려 해도 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리하여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신세대가 승리했는데 그 과실을 차지한 것은 누구일까? 바로 아이돌 산업이었다. 아이돌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유산 중에서 댄스음악과 랩만을 발전시켰고, 그것이 오늘날 신한류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획사가 만들어준 댄스와 랩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이제 다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필요한 때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창조성, 자의식, 프로 의식이 한류 아이돌에게 필요한 것이다. 아이돌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유산, 그 또 다른 면을 온전히 계승할 때, 한류가 다른 차원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서태지와 아이들을 둘러쌌던 표절 논란에 얽힌 불편한 진실

서태지와 아이들. ⓒ 스타채널 제공
사실 음악적이든 음악 외적이든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오래전에 포화 상태에 다다랐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흑인 음악을 애호하는 한 사람으로서 특정 이슈를 다시 짚어보기로 한다. 바로 <컴백홈>을 둘러싼 표절 논란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컴백홈>은 표절이 아니다. 그리고 표절이 아니라는 판단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컴백홈>이 일반 가요의 표절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힙합 장르’를 표방하고 나온 곡이라는 점이다. 힙합은 일반 가요와는 달리 ‘샘플링’이라는 고유 작법을 장르 정체성으로 삼는 음악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표절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닌다. 즉, 샘플링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제기한 표절 시비는 모두 무지의 소산이다. 두 번째는, 샘플링의 개념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반적인 기준을 들이대도 <컴백홈>과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의 <Insane in the Brain>은 명백히 다른 곡이라는 점이다. 두 곡 간의 법적인 혹은 제도적인 의미의 표절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에 표절 시비는 왜 불거졌을까? 두 곡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두 곡은 비슷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배경 지식이나 정보 없이 이 두 곡만 듣고 판단을 내린다면 서태지가 사이프레스 힐의 음악을 분명 참조 정도는 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서태지는 <컴백홈>이 사이프레스 힐 류의 음악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이라고 당시에 이미 밝힌 바 있다. 서태지는 1995년 한 라디오 방송(<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해 두 곡의 연관성은 ‘장르적 흡사함’에 기인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뜯어보면 전혀 다른 곡이라는 말이었다. 확실히, 표절 시비와 관련해 서태지는 억울했다.

그러나 동시에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컴백홈>은 표절 여부의 이분법을 넘어서 좀 더 다각도로 살필 수 있는 곡이다. 앞서 언급한 라디오 방송에서 서태지는 의외(?)로 힙합 음악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17년 전인 당시의 환경과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왠지 신뢰도가 하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토(ghetto)를 하나의 고유 지역 이름처럼 설명한다거나, ‘게토 뮤직’이라는 단어를 마치 공인된 음악 장르 용어인 것처럼 사용한다거나, 자신의 랩은 갱스터 랩 스타일이고 양현석의 랩은 게토 랩 스타일이라는 식의 발언 등은 그럴 수 있거나 혹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치자. 문제는 ‘내가 사이프레스 힐에게 빌려온 것은 목소리 톤뿐이며, 그것은 게토 뮤직의 장르적 특성이다’라는 서태지의 발언이다.

사이프레스 힐의 리드 래퍼 비-리얼(B-Real)의 일명 코맹맹이 톤이 ‘장르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금시초문이다. 비-리얼의 랩 톤은 장르적 특성이 아니라 (조금의 과장을 섞자면) 비-리얼 개인의 전유물이다. 사이프레스 힐의 팬이라면 아는 사실이지만, 비-리얼의 평소 목소리는 랩 톤과는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 그의 랩 톤은 그의 고유한 음악적 정체성이라는 뜻이다. 즉, <컴백홈>은 서태지 본인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갱스터 힙합 스타일을 국내에 전도한 곡’이라는 평가보다는 ‘갱스터 힙합을 추구하는 팀 중 하나인 사이프레스 힐의 음악을 그럴 듯하게 재현한 아류작’이라는 평가가 더 어울려 보인다. 보기에 따라 별것이 아닐 수도, 굉장할 수도 있는 차이이다.

한편 <컴백홈>은 곡 자체의 완성도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훌륭한 수준이다. 일명 ‘샘플 CD’의 샘플로 도배(?)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지만 원래 각자 파편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샘플을 미세하게 다듬어 마치 원래 한 곡을 이루고 있던 것처럼 유기적으로 조합해내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서태지가 ‘장르 잡식가’이자 ‘유행 수입자’였던 것도 맞지만 동시에 그는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흑인 음악 애호가로서 돌아본 서태지와 아이들은 어쩌면 애증의 대상일지 모르겠다. <난 알아요>로 ‘랩-댄스’를 선보이고 <컴백홈>으로 힙합 열풍을 일으켰지만 아쉽거나 석연치 않은 부분 역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서태지에게 랩이란, 또 힙합이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가망이야 거의 없겠지만 그가 솔로로도 한 번쯤은 힙합 음악을 다시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17년 전의 그것보다 더 진보한 힙합을 말이다.

김봉현│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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