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상처 돌보는 ‘영원한 봉사자’
  • 한면택│워싱턴 통신원 ()
  • 승인 2012.04.0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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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세계은행 총재 지명자는 누구인가 / 에이즈 퇴치 등 앞장 서며 ‘아시아계 최초’ 기록 잇달아 수립

지난 3월23일 미국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김용 다트머스 대학 총장(가운데)을 세계은행 총재에 지명한다고 공식 발표하고 있다. ⓒ EAP연합

한국계 김용 다트머스 대학 총장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의해 세계은행의 차기 총재에 발탁되었다. 1944년 창설된 세계은행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계가 총재로 지명된 것이다. 김용 지명자는 아시아계로서는 최초의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이라는 기록에 이어 아시아계 최초의 세계은행 총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전망이다. 김용 세계은행 차기 총재 지명자는 과연 누구이고 왜 발탁되었을까.

그는 1959년 12월8일 서울에서 태어나 1964년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했다. 현재는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한인 이민 1.5세로 꼽힌다. 영문 이름은 JIM이고 한국 이름은 용으로 ‘짐 용 김’으로 불리고 있다. 부모와 함께 정착했던 아이오와 주에 있는 머스카틴 고등학교(Muscatine High School)에서 전교 회장을 지내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미식축구팀의 쿼터백과 농구팀의 포인트 가드로 활동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입학했다가 아이비리그 브라운 대학으로 전학해 졸업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1991년 메디칼닥터 M.D와 1993년 인류학 박사 학위를 잇달아 받았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의학 박사와 사회과학 박사 통합 학위 프로그램의 첫 입학자였다.

‘미국의 25대 리더’에 꼽히기도

김용 총재 지명자는 2003년 맥아더 천재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가 선정한 ‘미국의 25대 리더’에 꼽혔다. 2006년에는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포함된 바 있다. 보스턴에 있는 아동병원 소아과 의사인 임윤숙씨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지구촌 개발도상국가들의 경제 개발을 금융 지원하는 세계은행의 차기 수장을 맡게 된 김용 총재 지명자는 태생부터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가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점은, 그의 아버지가 치과의사이자 교수였고 어머니는 철학박사였다는 데서 유추해볼 수 있다. 아시아계로서는 최초로 아이비리그 대학인 다트머스 대학 총장으로 선임된 2009년 10월 그는 뉴욕에서 열린 한인커뮤니티 재단의 연례 만찬에 등장해 자신의 가족사를 소개한 바 있다. 그의 선친은 김낙희씨로 1987년 별세했다. 부친 김낙희씨는 6·25 전쟁 당시 17세의 나이로 고향인 북한 남포에서 홀로 월남해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치과의사이자 대학 교수가 된 인물이었다.

김용 총재 지명자의 어머니는 전옥숙씨로 철학박사이다. 김용 지명자는 그의 부친이 뉴욕 유학 시절 한인 파티에 왔던 모친 전옥숙씨를 만나 로맨스를 키운 끝에 결혼해 자신이 생겨났다고 전했다. 어머니에 대해 김지명자는 “전쟁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들을 돌보려고 마산에 머무르면서 당시 경기여고의 부산 피난 학교로 통학했던 억척이였던 것 같다”라고 소개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내륙의 작은 백인 농촌마을 머스카틴에 정착해 아이오와 대학 치대 교수로 지냈고, 어머니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퇴계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당시 아이오와 머스카틴에는 김총장 가족과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가족 등 아시아계로는 딱 두 가족만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용 총재 지명자는 처음에는 의사의 길을 걷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의 “야, 인마”라는 우리말 호통을 듣고 결국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김용 총재 지명자는 처음에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1년 반을 다닌 후 아이비리그의 명문 브라운 대학으로 전학했다. 그의 진로가 바뀐 것은 브라운 대학 2학년 기간 중 아이오와 주 머스카틴의 집을 찾았을 때였다.

아버지 김낙희씨가 운전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김용 지명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이 났던 아홉 살 때 ‘‘상의 불평등을 없애겠다’라고 했던 다짐대로 “철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갑자기 자동차를 도로가로 몰아 세우고서는 “야, 인마”라고 호통을 쳤다. 한국말을 잘 알아 듣지 못했지만 “야, 인마”라는 우리말 호통이나 자동차를 멈춘 아버지의 모습으로 볼 때 무언가 야단치는 것이 틀림없었던 것으로 느꼈다고 김지명자는 토로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해도 좋지만 우선 의대 인턴이나 끝마쳐라. 한국계로서 미국에서 살려면 기술이 꼭 필요하다”라며 의사가 되라고 압박했고 김지명자는 결국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김지명자는 “아버지는 매우 실용적인 분이었고 철학박사인 어머니는 ‘너는 누구인가,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라는 등의 거대 담론을 즐겨 얘기했다. 상반된 두 가치가 나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김용 총재 후보는 하버드 대학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된 뒤 교수로도 재직했다. 하버드 의대에서는 1993년부터 2009년까지 장기간 근무하며 의사로서, 교수로서, 연구자로서, 행정가로서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업적을 쌓았다.

빈곤 국가에서 공중 보건의로 활약해 주목

오늘날 김용 총재 지명자를 미국의 주류 학계와 세계 무대에 서게 만든 토대는 그가 국경 없는 의사회와 같은 비영리 의료 봉사 조직을 만들어 지구촌 빈곤국의 질병 퇴치에 일찌감치 뛰어들었기 때문으로 간주되고 있다. 김용 지명자는 1987년 3명의 동료들과 함께 ‘파트너스 인 헬스’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빈곤 국가 아이티에서 결핵 퇴치 의료 운동을 벌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대 초까지 10만명의 아이티 결핵 환자를 완치시키면서 국경을 허문 공중 보건의 활동을 벌였다.

김용 지명자는 아이티에서 결핵 퇴치 활동을 펼치면서 제약회사 등과 협상을 벌여, 값은 매우 싸면서도 효능은 아주 좋은 의약품들을 구입하는 능력을 선보였다. 아이티에서는 결핵 환자들을 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1인당 1백50달러 내지 2백 달러를 들여 10만명 이상의 결핵 환자들을 완치시키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결핵 환자 한 명이 치료를 받으려면 1만5천 달러 내지 2만 달러를 들여야 할 때였으니 얼마나 효율성 큰 의료 활동을 펼쳤는지를 알 수 있다.

김용 총재 지명자는 자신이 세운 파트너스 인 헬스를 2003년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새로운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김지명자는 2004년에는 WHO 에이즈 담당 국장을 맡아 주로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퇴치에 앞장섰다. 그는 이때에 ‘3X5 이니셔티브’를 내걸었다. 3백만명의 에이즈 환자들을 2005년까지 치료하겠다는 담대한 도전이었다. 물론 이 목표에는 미달했으나 기록적인 에이즈 치료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4년 이 방안을 내건 이후 올해까지 아프리카에서만 7백만명의 에이즈 환자들이 치료를 받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지명자는 4월20일께 이사회 의결을 거쳐 6월부터 세계은행 총재로 일하기 때문에 아직은 다트머스 대학의 제17대 총장으로 남아 있다. 그는 2009년 3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아이비리그의 총장에 선출되었으며 2009년 7월1일부터 정식으로 총장직을 수행해왔다.

김지명자는 지구촌 빈곤국들을 돌면서 결핵, 말라리아, 에이즈 퇴치에 앞장섰던 공중 보건 의사이자 탁월한 의료 행정가이다. 또 아시아계 최초의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을 맡았다가 이제는 세계은행 총재로서 세계 경제를 수술해 빈곤을 퇴치하고 빈부 차를 해소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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