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구 없는 은행’들이 몰려온다
  • 조재길│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
  • 승인 2012.04.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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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은행들, ‘스마트 금융’ 서비스에 투자 늘려…중·장기적으로 은행권 고용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1. 지하철 광고 대행업체에 다니는 정동만씨(33)는 최근 한 외국계 은행에 들렀다가 재미있는 체험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번호표를 뽑는 기계와 은행 창구 직원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대형 스크린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씨는 손가락으로 스크린 속 금융 상품 정보를 검색한 뒤 즉석에서 적금 가입을 마쳤다. 은행 직원과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우대금리까지 받을 수 있었다.

#2.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 들른 주부 한 아무개씨(56). 모임을 가진 뒤 회원 3~4명과 함께, 한 국책 은행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나타난 은행 직원을 통해 간단하게 계좌를 개설하고 상품 설명도 들었다. 한씨는 “언제든 넣고 뺄 수 있는 수시 입·출금식 계좌인데도 연 3.5% 금리를 준다더라. 직접 은행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서진원 신한은행장이 스마트 금융센터에서 화상 상담을 받고 있다. ⓒ 신한은행 제공

스마트폰 활용한 은행 거래자 1천만명 넘어

은행이 소리 없이 변신하고 있다. 아예 창구가 없는 은행도 속속 늘어나고 있다. 정보기술(IT) 인프라가 확산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IT에 친숙한 소비자들이 창구에 직접 들르는 것을 번거로워하면서 ‘스마트 금융’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은 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큰 폭의 비용 절감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 이상 전국에 걸쳐 영업점을 1만여 개나 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중 은행들은 올 들어 신금융 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사실상 스마트 금융의 원년이 될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지난해 말 스마트폰을 활용한 은행 거래 등록자가 1천36만명으로, ‘스마트 금융 1천만명’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신한은행은 지난 2월 사이버 영업 조직 ‘스마트 금융센터’를 출범시켰다. 말이 센터이지 고객이 직접 은행 업무를 볼 공간이 따로 없다. 본부의 전문 상담역들이 화상을 통해 고객 응대를 전담하는 구조이다. 때문에 신한은행은 기자들을 초청해 서울 역삼동 신한아트홀에서 시연식을 가진 뒤 곧바로 각종 기기들을 철수시켰다. 이날 시연에 나섰던 서진원 신한은행장은 “요즘 고객들이 이용하는 금융 거래의 90% 안팎은 창구를 거치지 않고 있다. 스마트 금융 서비스를 확대해 고객들이 2~3년 내 모든 업무를 집이나 사무실에서 볼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신한은행 고객은 펀드 상품을 검색하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전문 상담역과 바로 화상 상담을 진행할 수 있다. 상담역은 소비자의 지역과 나이, 비슷한 소득군의 소비 형태 등을 감안해 투자 자문을 해주기도 한다.

우리은행은 올 상반기 중 서울 신촌 및 강남역에 ‘스마트 지점’을 개설하기로 했다. 일반 창구 대신 대형 스크린 등 전자 기기를 설치해 소비자들이 전자 금융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고객 홍보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안테나숍’ 형태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스마트 금융이 뭔지 잘 모르는 고객들을 위해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체험존을 설치할 계획이다. 스마트 금융 서비스가 워낙 편리하기 때문에 한 번 경험해보면 창구를 이용하기 싫어질 것이다”라고 자신했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 역시 상반기 중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에 스마트 지점을 열기로 했다. 소비자들이 무인 점포인 ‘셀프존’에서 예·적금과 펀드, 체크카드 등에 가입할 수 있다. 은행 직원이 상주하지만 재테크 상담에만 집중하는 구조이다.

기업은행은 스마트 금융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KT와 제휴를 맺었다. KT플라자 안에 ‘숍인숍’ 형태의 지점을 설치하기로 했다. 모든 금융 거래 때 종이를 없애고 스마트 기기를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고객이 KT 통신망으로 직원과 대화하면서 화면을 터치해 업무를 처리하는 식이다. 기업은행은 지난해 전국 주요 도로 주변의 공중전화 부스를 리모델링해 자동화기기(ATM)를 설치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길거리 점포’이다.

외환은행 역시 기업은행과 비슷한 방식의 스마트 금융을 도입하기 위해 SK텔레콤과 손잡았다. 외환은행측은 “6월께 SKT와 함께 스마트 금융 시범 지점을 선보일 것이다”라고 전했다.

영업점을 많이 늘리기 어려운 외국계 은행과 지방 은행은 최근 들어 더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마트 금융으로 고객 접점을 크게 확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스마트 금융 지점’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도 외국계이다. 씨티은행은 지난해 2월 목동에 ‘스마트뱅킹 영업점 1호점’을 열었다. 최근에는 이를 전국 24곳으로 확대했다.

외국계·지방 은행 더 공격적… “한계는 없다”

SC은행도 지난해 말 서울 강남역 인근에 ‘스마트 체험 점포’를 연 뒤 스마트 점포 추가를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27곳에 이어 올해 15곳의 오프라인 지점을 폐쇄했지만 스마트 점포는 오히려 늘리고 있다. SC은행은 이를 염두에 두고 대안채널팀을 신설하는 등 소매 금융 영업 조직을 재편했다.

전국 점포 수가 60여 곳에 불과한 산업은행은 스마트 점포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다이렉트뱅킹’이다. 산은은 지난해 9월부터 고객이 온라인으로 계좌를 직접 개설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계좌를 열 때 대면 접촉을 통한 실명 확인이 필요하다는 관련 규정에 따라 고객이 전화나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계약직 직원이 고객을 찾아가도록 했다. 별도 점포를 운영하지 않으면서 아낄 수 있는 비용으로, 예금 고객에게 높은 금리를 지급할 수 있다는 것이 산은측의 설명이다. 또 관계사인 대우증권 영업점 내에 점포 속 점포(BIB·Branch in Branch)를 계속 설치하고 있다. 지방 은행 가운데서는 부산은행이 지난 3월20일 직원 20여 명 규모의 ‘신금융사업본부’를 신설했다. 산하에 U뱅킹사업부, BPR(업무과정재설계)지원부, 안전관리실을 따로 두고 있다.

IT 기기를 활용한 스마트 금융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SC은행 노조의 집단 파업 때 이탈 고객이 1~2% 수준에 그쳤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는 분석이다.

스마트 금융이 확산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보안 문제이다. 창구 직원이 직접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은행들은 소비자 서명 외에 얼굴 윤곽과 홍채, 음성, 지문 등을 적극 활용해 이런 우려를 없앨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기본적으로 모든 상담 내역을 녹화하고 있다.

초기 구축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일반 자동화 기기에 비해 스마트 기기를 한 대 설치하려면 비용이 세 배 이상으로 많이 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꺼번에 스마트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이다. 다만 한 은행장은 “스마트 금융의 경우 비용이 아니라 투자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이 트렌드에서 뒤처지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사람 대신 기계나 시스템이 은행 업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중·장기적으로 은행권 고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은행들이 더는 영업점 확대 경쟁을 벌일 이유가 없어진다는 이유에서다. 한 은행의 미래전략부장은 “이제 소수의 창구 거래 고객을 위해 수많은 점포와 직원을 둘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스마트 금융은 여전히 온라인 뱅킹처럼 부수적인 채널이므로, 은행권 전체의 고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는 시기상조이다. 중·장기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할 과제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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