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 21세기에 ‘부활의 노래’ 트는 이유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4.1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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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기댄 복고 상품이 아닌 현재형 상품 잇달아 출시…‘대체 불가능한 상품성’에 주목

ⓒ 시사저널 전영기
음악 산업에서 1990년대는 CD 시대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100년 동안 이어져온 LP 시대의 종말기였다. CD 시대도 20년을 못 채웠다. 2000년대 초반부터 MP3와 이의 유통이 가능한 온라인 시장이 발달하면서 CD 시장도 폐장 직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CD에 밀려 숨통이 끊어졌던 LP가 무덤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LP의 부활은 ‘힘이 없는’ 추억에 기대는 복고 상품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진작 오디오 애호가들에 의해 중고 제품이 활발히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이너리티 시장이었고, 그 물건에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의 복고 향수에 기대 생존한 추억 의존형 상품이었다. 그러나 최근 LP의 부활은 추억이 아닌 현재형 상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2009년 1집 앨범을 CD와 함께 LP로 발매했다. LP는 CD 가격의 두 배 이상이었음에도 완판되었다. 영국의 세계적인 록밴드인 콜드플레이는 지난 1월 신보 <MYLO XYLOTO>를 발매하면서 한정판으로 LP와 CD를 함께 수록한 딜럭스 패키지를 발매했다. 이 앨범의 라이선스 음반 가격이 1만5천원대였던 데 반해 딜럭스 패키지는 13만원대였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도 이 LP는 판매에 호조를 보였다. 아이돌 그룹인 2AM도 오는 5월14일 신보의 LP 버전 발매를 공지하고 예약 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1집이 6백장이었던 데 반해 이번에는 1천장으로 규모가 커졌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음반 판매 매장인 핫트랙에서 대중음악과 클래식 코너에 각각 따로 LP 코너를 두고 있을 만큼 최근 들어 LP 판매가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이 매장에서는 팻 메서니나 U2 등 과거의 희귀 음반이나 골동품이 아닌 현재 소비되고 있는 음악이 LP로 판매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국내에 LP 제작 공장이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지난 2005년 유일하게 LP를 찍어내던 서라벌레코드가 문을 닫은 이래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만 LP 공장이 유지되고 있다. 국내에서 LP 음원을 복각해 생산하던 리듬온이나 비트볼 등의 레이블은 이후 미국이나 일본에서 위탁 생산을 하거나, 희귀 음반을 음원으로 CD로 복각 음반을 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국내에서 1970년대의 국내 록 음반이나 배호의 음반에 대한 수요가 꾸준했기 때문이다.

레코드 재킷이나 음반 소개 책자 등 소유욕 부추기는 요소도 있어

다양한 구성이 눈에 띄는, 올해 발매된 록그룹 콜드플레이의 LP 신보. ⓒ 시사저널 전영기
이런 와중에 국내에서 다시 LP를 생산하겠다는 업체가 등장했다. LP팩토리가 그곳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회사의 모토가 ‘추억에 기대지 않겠다’라는 점이다. 이 회사의 이길용 대표는 “추억에 기대는 복고 상품을 만들기 위해 공장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에서 수요도 증가하고 있지만 거기에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하려는 것은 K팝과 맞물린 상품으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아이돌 그룹과 함께 미국이나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특화된 상품으로 LP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2년 전부터 LP 시장이 해마다 100%씩 성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1년에 4백50만장씩 LP를 찍어내고 있다. LP의 대체 불가능한 상품성이 점차 주목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LP가 CD보다 음질이 좋다’라는 류의 주장은 하지 않았다. 다만 LP 고유의 소리가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을 뿐 아니라 온라인 음원으로는 결코 만족시켜줄 수 없는 ‘견물생심’의 소유욕을 LP가 충족시켜준다고 전했다.

실제로 최근 주요 음반 소비자층인 10대나 20대를 겨냥한 아이돌 그룹의 CD 패키지는 갈수록 특이해지고 있다. 온라인에서 한 달에 3천원 또는 5천원짜리 정액제로 소비되는 현재의 사업 모델에서 음반 기획사가 가져갈 수 있는 수입은 상대적으로 적다. 때문에 각 기획사에서는 팬들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특별한 패키지의 ‘딜럭스 패키지’를 판매하는 데에 열심이다. 하지만 CD 한 장의 케이스에 담을 수 있는 콘텐츠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사진도 시원하게 담지 못하고 음반에 수록된 책자도 10쪽 안팎을 넘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변칙 판형이다. 단행본 사이즈만 하게 크기를 키운 CD가 나오는가 하면, 양은 도시락을 연상케 하는 금속 케이스의 판형이 등장하기도 하고 웬만한 달력만 한 크기의 브로마이드가 들어가 있는 CD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아이돌 그룹의 CD에는 멤버들의 사진이 수록된 카드가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고정 팬의 소장 욕구를 부추기기 위한 미끼인 셈이다. K팝이 유행인 해외에서는 더하다.

이 점에서 LP는 CD보다 절대 우위에 있다. 일단 레코드 재킷이나 음반 소개 책자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이 가미될 수 있는 요소가 무궁무진하고 그만큼 팬에게 소유욕을 부추길 만한 여지가 크다. 최근에 등장한 콜드플레이의 LP 신보에는 그래피티 팝업 아트 디자인이 포함된 64쪽 분량의 12인치×12인치 크기의 하드커버 책자가 수록되어 있다. 또 1백80g의 LP는 그림이 인쇄되어 있는 픽쳐디스크이고, 같은 음원을 녹음한 CD도 들어 있다. 즉 소장용으로는 LP를, 듣는 데는 CD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복각 음반을 발매하고 있는 뮤직리서치의 곽근주 대표는 “LP는 감상용이지만 소장용으로 구매하려는 사람도 많다. 영상과는 달리 음악에서는 아날로그 매체에 대한 선호가 강하다. 영상은 LD와 DVD를 거쳐 블루레이까지 가면서 지난 매체는 사장되고 있지만, 음악은 아날로그에 대한 선호를 디지털 뉴미디어가 없애지 못하고 있다. 최신 매체일수록 사용하기 편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음질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음질은 최신 매체일수록 쇠퇴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음악평론가 성우진씨는 “20대 이하의 계층에서는 LP를 MP3에 이어 새롭게 나타난 뉴미디어로 오해하고 있는 층도 있다. LP의 다양성이 분화될수록 그 생명력이 커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이길용 대표는 1972년생이다. 지난해 LP 공장을 차리기 전에는 나인팩토리라는 대표적인 공연기획사에서 책임자로 일했다. 지금도 레이디 가가의 한국 공연 업무를 거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최대 현안은 LP팩토리의 성공이다.

지금까지 LP 공장에 들어간 돈만 5억원 가까이 된다. 그가 공연 기획을 하다가 LP에 눈을 돌린 것은 LP가 복고 상품이 아니라 현재형 상품이기 때문이다. SM이나 JYP 등 국내 대형 기획사에서도 LP 음반 발매를 적극 고려할 정도로 LP가 대체 불가능한 기획 상품이라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벨기에에서 기계를 수입했다. 지금 지구상에 있는 LP 생산 기계 중 가장 최신의 것이다. 4월 말까지는 시험 생산을 완료하고 시제품을 내놓는 것이 목표이다”라고 말했다. 

과거에 국내 생산 LP와 직수입 LP의 음질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국내 음반은 단가를 낮추기 위해 1백20g을 썼다. 해외 음반은 1백80g이었다. 무게가 적을수록 골이 얕게 파져서 음질이 안 좋았다. 또 원료 중 재생 PVC 비율이 30%가 넘으면 안 되는데 이를 어긴 면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그는 이런 규격을 다 지킬 예정이다.

수익성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 등 해외에서도 선주문이 들어왔지만 일단 품질 확인이 먼저이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국내에서도 몇몇 기획사가 관심을 보이고 있고, 재즈 음악인 등 유명 가수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원을 LP로 찍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오고 있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해외에서 20만원대 이하의 보급형 턴테이블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만큼 국내에도 젊은 층이 좋아할 만한 작고 싼 보급형 턴테이블을 소개하고 싶다는 뜻도 나타냈다. “들어보면 안다”라는 것이다. 그는 “전자책 보급이 늘어나도 종이책을 들고 있는 뿌듯함을 대신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견물생심이다. 50대의 카라얀 팬도, 40대의 메탈리카 팬도, 10대의 빅뱅 팬도 팬심은 똑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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