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라응찬·이휴원’ 배출할까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2.04.10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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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신화’ 명맥 끊겼던 은행들, 최근 고졸자 채용 적극 나서…은행끼리 ‘최초’ 기록 경쟁도

지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은행은 고졸자들의 ‘춘추 전국 시대’였다.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투신했다가 요직에 오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신한은행 내분 사태’를 촉발했던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도 각각 선린상고와 군산상고, 덕수상고를 졸업했다. 이들은 신한은행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국내 은행권을 대표하는 파워 인맥으로 거론되었다. 이휴원 신한금융투자 부회장, 이재우 신한카드 사장, 김성철 전 국민은행 부행장, 김정민 전 국민은행 부행장, 유희태 전 기업은행 부행장, 박영호 전 우리은행 부행장, 이장규 전 하나은행 부행장보 등도 ‘고졸 신화’의 대표적인 인사로 꼽힌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고졸 신화’의 명맥이 끊겼다. 은행권이 고졸 출신을 꺼리면서 학력 인플레이션이 가중되었다. 일부 은행은 응시 자격을 4년제 대졸 이상으로 제한하는 바람에 국가인권위에 제소당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이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은행권을 중심으로 고졸 채용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은행장들까지 나서서 고졸 행원의 연수 현장을 챙길 정도이다. 은행별로 보면 신한은행의 고졸 취업자가 지난해 1백2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우리은행(85명), 기업은행(67명), 산업은행(48명), 농협(33명), 외환은행(32명), 국민은행(8명) 순이었다. 올해도 예년 수준, 혹은 그 이상의 고졸 행원을 뽑을 예정이다. 은행연합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18개 은행이 내년까지 채용할 고졸 인력은 2천7백여 명에 달한다. 특히 우리은행은 당초 목표치보다 두 배나 많은 2백명을 선발하겠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우리은행의 한 관계자는 “고졸 행원을 뽑아 창구에 배치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직원들뿐 아니라 고객도 모두 긍정적이어서 올해 채용 인원을 대거 늘려잡았다”라고 설명했다.

“정부 눈치 보기 따른 결과” 지적도 있어

이 과정에서 은행별로 신경전도 벌어지고 있다. 국민은행과 기업은행은 현재 ‘최초’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민은행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3월 특성화고 취업 지원을 위해 교과부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실제 입행은 10월이었지만 채용은 이미 3월에 결정된 만큼 고졸 채용을 한 것은 우리가 가장 먼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업은행측은 “지난해 1월 이미 서울여상 학생 두 명을 시범적으로 채용했다. 국민은행이 처음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라고 반박했다. 산업은행과 신한은행도 남자 행원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시중 은행들이 채용한 고졸 행원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때문에 산업은행은 “1990년 초반 은행권에서 사라졌던 남자 상고 출신 채용을 부활한 곳은 산업은행이 최초이다”라고 강조했다. 신한은행측은 “지난해 채용한 고졸자 중 35%가 남성이었다. 규모 면에서 남성 채용은 우리가 가장 앞서 있다”라고 말했다.

은행권 일각에서는 “결국 은행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지적한다. 이대통령은 지난해 7월 고졸 채용을 장려하는 발언을 잇달아 내놓았다. 행안부는 고교 졸업(예정)자를 일반직 9급으로 선발하는 공무원 임용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교과부는 전국 주요 시·도와 고용 채용을 약속하는 MOU를 체결했다. ‘고졸 신화’로 유명한 김동연 기획재정부 2차관까지 나서 고졸 취업 지원 사업을 챙길 정도였다. 때문에 금융권 일각에서는 은행들의 고졸 행원 뽑기 경쟁이 “이벤트성 행사가 아니겠느냐”라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고졸 채용은 보여주기 식의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지난 2년간 꾸준히 준비해온 사업이다”라고 해명했다.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도 최근 열린 신입 행원 사령장 수여식에서 “고졸 신입 행원은 단순히 정책 목적에 의해 추진된 것은 아니다. KDB산업은행이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은행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 발굴 과정이다”라고 강조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기업은행 강서중앙지점에 근무하는 김인정 계장(18)은 지난해 1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새내기 행원이다. 남학생들과 단체 미팅을 했다는 대학생 친구들의 얘기가 부러울 법도 했다. 김계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친구들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대학에 다닌다. 나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있다. 2년 후에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면 정규직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대학에 다닐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계약직 신분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다. 대졸자보다 업무나 처우 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 격차는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계약직이라는 핸디캡도 본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김계장은 말한다. 그는 “기업은행의 경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김계장의 일터를 방문했을 때도 대졸 인턴사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서울의 명문대를 나온 재원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최근 승진한 이애리 과장이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과장 역시 고졸 출신으로, 계약직에서 출발해 책임자급(4급)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규직으로 전환된 후에 책임자 승진 대상이 되기까지는 7년 정도가 걸린다. (이과장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일반 대졸자보다 빠른 5년차에 과장으로 승진했다고 들었다. 열심히만 하면 학력과 신분의 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국내 은행권은 지난해부터 고졸 채용을 대폭 확대했다. 우리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김지수 계장(18)은 그 덕을 톡톡히 본 경우이다. 김계장은 우리은행에 처음 지원서를 제출해서 한 번에 합격했다. 그것도 85명의 동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는 “지난 15년 이래 처음으로 고졸 행원을 뽑았다고 들었다. 합격 통지를 받고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부둥켜안고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말했다.

연수를 마치고 본점 창구에 배치된 지 5개월 정도가 지났다. 김계장은 이미 은행 고객들 사이에서 꽤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TV에서 보았다”라면서 커피를 놓고 가는 이른바 ‘할아버지 팬’까지 생겼다고 은행측은 귀띔한다. 그는 “나이가 어려 보여서인지 손님들이 많이 기억해주시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창구에서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 손님이 ‘지수씨에게 가겠다’라고 해서 무안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도 ‘고졸’이라는 핸티캡에 대한 압박이 적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을 졸업한 행원과 경쟁할 경우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와 사회생활에 대한 차이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멘토에게 도움을 청한다. 우리은행은 현재 특성화고를 졸업한 신입 행원을 위한 ‘WOORI 언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신입 행원이 은행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선배 직원 한 명을 멘토로 지정해 연결해주는 제도이다. 김계장 역시 지정된 멘토를 찾아 틈틈이 조언을 받고 있다. 그는 “업무에서부터 인생 이야기까지 폭넓게 도움을 받고 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수 언니도 많이 챙겨주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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