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없으면 끝이니까 연주 멈출 수 없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4.2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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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파의 선두 주자’ 피아니스트 손열음씨 / “크든 작든 연주 여행 계속하고 싶어”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국내 클래식계에서 무섭게 커가며 세대교체를 주도하고 있는 20대 연주자 중 대표 주자이다. 손열음을 설명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토종 음악 영재라는 점이다. 1986년생인 그는 원주여중을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며 클래식에도 외국 유학 경험 없이 입상하는 토종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손열음은 오히려 콩쿠르에 입상한 뒤에 독일 유학길에 올라 현재 하노버 음대에 다니고 있다. 한 해의 3분의 1씩을 쪼개 한국과 유럽, 미국에서 투어 공연을 하고 있는 그는 “졸업하지 않고 좀 더 오래 다니고 싶다”라고 말했다.

‘글 쓰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세

두 번째 키워드는 글 쓰는 피아니스트라는 점이다. 그는 한 일간지에 지난해부터 칼럼을 쓰고 있을 정도로 글솜씨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음반 속지 해설서도 직접 쓴다. 그가 쓰는 글의 내용은 한국의 영재 교육 문제부터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다양하다. 그가 쓴 글의 한 토막을 옮겨본다.

“스스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 시절 나는, 낯선 사람만 보면 무조건 울어대 어디에도 데리고 나갈 수 없는 아기였다고 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나는 반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기 시작했는데, 다섯 살 어느 날은 피아노학원으로 향하던 길에 횡단보도에서 대형 덤프트럭이 오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다 이 트럭이 무시무시한 소음을 내며 급정거를 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다 젖었지만 입 밖으로는 찍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나는 그 트럭보다 내가 울었을 때 나에게 던져질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더 두려운 꼬마였다. 7년 동안 나를 가르친 피아노 선생님이 내 목소리를 모를 정도였으니, 나의 낯가림은 타고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내게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만나 정을 나누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임은 당연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일이 바로 내 직업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담대함이다. 그를 포함해 온 가족이 고향팀인 프로농구 원주 동부의 열혈 팬으로 가족 명의로 응원하는 선수에게 ‘보약 조공’을 할 정도이다. 그가 응원하는 팀인 원주 동부는 올해를 포함해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자 손열음은 트위터에 “다른 것 다 떠나서 두 번 연속 2등이라니, 그 기분 나밖에 모를 거야”라는 말을 썼다. 반클라이번 콩쿠르에 이어 지난 2011년 그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또 2위를 했기 때문이다. 반클라이번이나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결선 진출 자체도 대단한 성과인 대회로 꼽히는 만큼 두 번 다 2위에 입상한 것은 희귀한 사례이다.

하지만 그는 2회 연속 2위를 한 경험을 자신의 농담 재료로 썼다. “이런저런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으로만 따지면 내가 남자였으면 군 면제만 세 번이었다. 남자 선후배에게 주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니 아쉽다.”(웃음)  내성적인 성격은 어느새 담대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스스로도 무대에서 “떨거나 긴장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의 한예종 스승인 김대진 교수는 손열음에 대해 “열음이가 처음에 (예비학교에) 배우러 왔을 때 까맣고 꾀죄죄했다. 그런데 피아노에 앉아서 들려준 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열음이는 멘털이 강하다”라고 평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낯선 도시를 연이어 찾아다니며 며칠에 한 번씩 호텔 방에서 짐을 꾸리는 투어 생활에 대해서도 낙관적이었다. “연주 투어가 힘들 때도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좋다. 이게 더 낫다.” 그는 올해만 해도 이미 미국과 독일, 이스라엘, 스위스, 폴란드에서 연주를 했다. 이후 일정도 미국에서 네 번 이상, 홍콩과 일본, 러시아 투어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가 고향이자 집으로 부르는 곳은 원주이다. 한국에 들어와도 연주가 있을 때를 빼고는 원주에 머무른다. 원주의 홍보대사를 자처하기도 하고 원주 시민만을 위한 특별 무대를 갖기도 했다. “번잡한 대도시는 매력이 없다”라는 그가 유럽의 거점으로 택한 하노버도 “나는 너무 조용해서 좋은데 친구들은 너무 시골이라고 싫어 한다”라고 전했다.

서울공화국인 한국이지만 지방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그가 특별히 손해 본 것도 없다고 한다. 물론 그의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예종 예비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레슨비도 크게 들어가지 않았다. 한예종 출신이 클래식이나 무용에서 국제 콩쿠르를 휩쓰는 데 성공한 것은 한예종이 교육부 관할이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이라서 가능했다. 교육부 산하의 일반 대학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라며 그는 국내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꼬집기도 했다.

손열음의 라이브 무대는 오는 5월 서울에서 펼쳐진다. 5월 초 미국의 카네기홀에서 연주한 뒤 서울로 날아온 그는, 5월 초에는 금호솔로이스츠 무대에서 드뷔시를 연주하고 5월 말에는 예술의전당에서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마틴인더필즈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을 연주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이 채택된 사연도 재미있다. 세인트마틴 쪽에서는 이 곡이 손열음이 지난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한 곡이라고 하자 두말없이 오케이 했다고 한다. 솔로 연주자들이 유명 콩쿠르에 입상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시장성 없어지는 것보다 연주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하는 손열음씨. ⓒ 빈체로 제공
손열음은 이 곡을 포함해 지난해 차이콥스키 결선곡을 따로 녹음해 조만간 음반을 낼 예정이다. 해마다 결선 실황을 음반으로 발매해온 대회 주최측에서 하필 지난해에만 복잡한 계약 관계로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차르트나 바흐의 곡을 좋아한다. 바흐의 곡은 더 해보고 싶다. 연주하는 사람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피아노의 ‘구약’으로 불리는 바흐의 클라비어 전곡집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그이지만 피아노의 ‘신약’으로 불리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에 대해서는 “후기 소나타 3곡을 빼고는 별 의미가 없다”라는 소신을 밝혔다. 대신 그는 베토벤의 다이벨리에 대해서는 “꼭 연주회에서 연주하고 싶다. 독일과 미국 무대에서는 레퍼토리로 잡혀 있는데 국내 무대에서는 어떻게 프로그램을 짜야 할지 아직 고민 중이다”라고 말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연주 여행을 다니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손열음은 “결과가 크건 작건 상관 안 한다. 내가 시장성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섭지 않다. 다만 내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발전이 없어진다면 예술가로서는 끝이니까. 하지만 내가 계속 연구하는 한 도태될 것 같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실내악 무대에도 관심이 많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머리를 많이 쓰는 만큼 다른 악기의 실내악 연주에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그것이 재미있고 더 하고 싶다.”

그는 지난해부터 국내 투어 중에는 서울대나 고려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주회를 하거나 병원에서 난치성 환자의 수술 비용을 모금하는 작은 음악회에 등장해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특정 남자를 위한 재능 기부(?)를 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지금 생각으로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게 되면 하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지.” 털털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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