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시장, ‘한국 천하’ 될까
  • 최연진│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2.04.2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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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마지막 자존심’ 엘피다도 매물로 나와…SK하이닉스가 입찰 경쟁에 뛰어들어 주목

최태원 SK 회장(가운데)이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하이닉스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방진복을 입고 막 생산된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 SK하이닉스 제공

‘전자 산업의 쌀’이라고 일컬어지는 세계 반도체 산업에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일본에서 마지막 남은 D램 메모리반도체 업체인 엘피다가 매물로 나온 것이다. 워낙 반도체 시장이 경기가 어렵고 가격이 폭락하면서 불황이다 보니 엘피다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반도체 시장은 2007년 이후 끊임없이 D램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면서 관련 업체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급기야 한국과 타이완 일본, 미국 업체들 사이에 가격을 내리고 물량을 조절하며 막판까지 버티는 치킨 게임을 벌인 끝에 망하는 업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바람에 세계 반도체업계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엘피다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로 한국·미국·일본 업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다. 이유는 엘피다가 비록 망하기는 했어도 매력 있는 반도체업체이기 때문이다. 일본 엘피다는 D램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3위 업체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D램 메모리반도체가 13.1%, 모바일 D램이 17.6%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엘피다는 저력 있는 업체였으나 최근 D램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엔고 현상이 지속되면서 5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 상황에서 다음 달 초까지 만기 도래하는 차입금을 상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2월27일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매각 절차에 들어갔다.

한국이 세계 시장 80% 점유할 기회

엘피다의 매각 주관사인 일본 노무라증권이 3월 말 실시한 엘피다 인수를 위한 입찰 경쟁에 뛰어든 업체는 한국의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미국과 중국의 연합펀드 세 군데이다. 원래 일본 도시바도 뛰어들었으나 1차 입찰에서 너무 낮은 가격을 써내는 바람에 중도 탈락했다. 미국과 중국의 연합펀드는 단순한 사모 펀드가 아니다. IBM에서 떨어져나간 PC사업부가 이름을 바꾼 중국 레노버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한국·미국·중국의 삼파전이 되는 셈이다. 이 싸움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삼국지가 될 전망이다. 입찰 업체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입찰전에 뛰어든 SK하이닉스는 세계 1위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메모리반도체업체이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엘피다 다음 가는 세계 4위 메모리반도체업체이다. 레노버는 반도체 경험이 없지만 세계 PC 시장의 강자이다. 특히 D램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많은 노트북 등을 생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엘피다 인수에 성공하게 되면 D램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이 36.1%로 치솟으며, 세계 1위 삼성전자(42.2%)를 바짝 추격하게 된다. 현재 SK하이닉스의 D램 메모리반도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3%이다. 따라서 엘피다의 시장 점유율 13.1%가 더해지면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겨뤄볼 만할 만큼 몸집을 키울 수 있다. 반대로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타이완의 난야 등 4, 5위 업체들은 감히 SK하이닉스를 넘볼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1등을 바짝 추격하면서 후발 주자들은 멀찍이 떼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잡게 되는 셈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D램 및 모바일 D램 등 주력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어 엘피다 인수에 뛰어들었다. 인수 후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는 실사 작업을 진행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세계 반도체 시장에 미치는 파장도 만만치 않다. SK하이닉스가 엘피다를 인수하면 삼성전자 등 국내 업체들이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80%에 육박하게 되어 한마디로 세계 반도체 시장은 ‘한국 천하’가 되는 셈이다. 당연히 세계 반도체업계가 이번 엘피다 인수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특히 엘피다는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보고 있는 모바일D램 분야에서 애플·노키아·HTC·모토로라 등 세계적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들을 주요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모바일 D램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에서 주기억장치로 쓰이는 반도체이다. 또, 엘피다는 최신 모바일 D램 제조 공법인 실리콘 관통 전극(TSV) 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어서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SK하이닉스가 엘피다를 인수하면 이같은 시장 점유율과 관련 기술, 기업 고객까지 고스란히 넘어오게 된다. 설령 조건이 맞지 않아 인수를 하지 않더라도, SK하이닉스로서는 4월27일까지 예정된 실사 작업을 통해 경쟁사인 엘피다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실사 작업 자체만으로도 경쟁력 높일 기회”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실사 작업 자체만으로도 엘피다의 내부 사정과 기술력, 고객 상황 등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보고 있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엘피다를 인수하게 되면 SK하이닉스는 최대 위협을 맞게 된다. 현재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D램 메모리반도체 분야의 세계 시장에서 11.6%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엘피다의 시장 점유율 13.1%가 더해지면 마이크론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4.7%로 올라가, 하이닉스의 시장 점유율 23%를 앞지르게 된다. 한마디로 2, 3위가 바뀌면서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삼성전자도 추격을 받게 된다. 따라서 SK하이닉스로서는 어떻게든 마이크론의 엘피다 인수를 막아야 한다. 그래서 SK하이닉스는 설령 엘피다를 인수하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입찰에 참여해 입찰 가격 자체를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그래야 마이크론의 부담이 늘어나서 엘피다 인수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 정부의 딜레마도 SK하이닉스에게는 장벽이 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엘피다에 관민 펀드 등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공적 자금이 투입된 국가 기간 산업인 반도체업체를 외국 기업에 매각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특히 그 상대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최대 강적인 한국 기업이라면 일본 내의 정서적 반감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하다. 관건은 가격이다. 실사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가격이 나오느냐에 따라 SK하이닉스의 엘피다 인수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외신에서는 엘피다 인수 가격을 15억 달러(약 1조7천억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1조9천억원의 현금과 지난 3월의 유상 증자를 통한 신주 발행으로 조달한 2조4천억원 등 약 4조원 규모의 동원 가능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범위 안에서라면 인수에 문제가 없으리라는 관측이다.

엘피다 인수전 일정은 4월27일까지 참여 업체의 실사를 끝내고 5월 중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는 수순으로 진행된다. 1차 탈락한 도시바가 SK하이닉스와 공동 인수를 모색했다가 최근 거둬들이기는 했으나, 만약 SK하이닉스가 우선협상대상자가 되면 다시 연대를 모색할 가능성도 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엘피다를 인수할 경우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지는 치킨 게임이 막을 내리고,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 업체들이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약 80%를 점유하며 한국 천하를 이룰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시장 점유율이 80%에 육박하게 되면 후발 업체들의 견제가 무의미해진다. 그만큼 우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차원에서도 긍정적이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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