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는 노출의 계절에 얕아지는 ‘에로스’ 진정성
  • 이나미│신경정신과 전문의 ()
  • 승인 2012.05.06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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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이미지 넘쳐나 가슴 떨리는 사랑 찾는 데 방해

ⓒ 연합뉴스
‘에로배우·에로영화’라는 단어 때문에 ‘에로스’라는 단어는 종종 ‘야한’ ‘성적인 징그러운’ ‘노골적인’ 등등의 어감으로 다가오지만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에로스이다. 로마 시대에는 큐피드라고도 했다. 에로스는 관능적인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밤의 신 닉스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혼돈·대지·지하 세계의 신들과 더불어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더불어 이런저런 사랑의 장난을 친다. 메디아를 전처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지 않나, 디오니소스를 미치게 해서 오라(Aura)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한 다음 불에 날개를 데게도 한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프로디테가 프시케(Psyche)라는 아름다운 처녀를 질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못생긴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라고 에로스에게 명령했지만, 에로스 자신이 프시케를 사랑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을 질투하는 프시케의 언니들 때문에 안타깝게 헤어지지만, 아프로디테가 프시케에게 준 어려운 과제를 다 완수해서 결국 여신이 된다. 에로스와 결혼해 헤도네(Hedone) 혹은 볼룹타스(Voluptas)라 불리는 딸을 낳는다. 헤도네는 헤도니즘, 즉 쾌락주의의 어원이고, 육감적이라는 뜻의 Voluptuous의 어원이기도 하다.

야한 차림을 할수록 쉬운 상대로 생각해 

성적 욕구인 리비도가 인간 정신의 근원이라고 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에로스를 삶에 대한 욕구로 규정하고, 죽음에 대한 본능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로 명명한다. 타나토스는 밤의 신인 닉스(Nyx)와 어둠의 신인 에레보스(Eroebos)의 아들이며, 잠의 신인 히프노스(Hypnos)의 쌍둥이이다. 사랑의 신과 죽음의 신이 모두 밤의 신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잠은 죽음과 유사하게 의식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섹스는 보통 잠들기 전이나 잠이 깰 때쯤 하게 되니, 사랑 역시 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융의 심리학에서는 에로스를 단순히 관능적인 사랑의 상징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욕구로 파악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넓게 보자면, 타인과의 관계 중 하나인 것이다. 에로스란 단순히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헌신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심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와 유교로 동서양이 모두 근엄했던 19세기 때에 비하면 21세기에는 거의 전 지구적으로 성적 표현의 자유가 넘쳐나는 추세이다. 적지 않은 연예인들이 누가 더 세게 벗나 경쟁을 하고, 꽤 많은 일반인도 남보다 더 야하게 입고 싶어 한다. 아예 거의 란제리만 입거나, 하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그런 여성들의 심리가 바바리맨의 심리와 어떻게 다른지 묻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바바리맨들은 성추행범으로 체포되는데, 왜 노출 여성들은 그대로 놔두는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다수의 사람은 여성들이 이런 옷차림을 하는 이유가 남성들을 육체적으로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짐작한다. 실제로 거리를 활보하는 창녀들의 옷차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전부가 남성들과 즉각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한 옷차림을 하는 여성들 대다수가 남자들이 자기 몸에 시선을 주는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와서 만지고 희롱하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발적으로 스트립걸이 되는 여성들의 심리와 비슷하게 몸으로 상대방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그 이상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이 강렬한 힘을 갖고 있는 듯 착각하기도 한다. 조신한 옷차림이 꼭 정숙함을 보증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야한 옷차림이 반드시 문란한 성생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복근을 열심히 만들어 틈만 나면 웃통을 벗어젖히고, 좀 더 섹시한 옷차림을 한 남성들의 여자 관계가 꼭 복잡한 것은 아니다. 열심히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이유가 자기만족을 위한 관리라는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섹시한 외모에 많이 투자하는 이들일수록, 정작 사랑에는 서툰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 지나치게 야한 차림을 하고 나서면 거의 대다수 이성은 쉬운 상대라고 생각해 진지한 관계를 맺는 것을 꺼린다. 영어에는 ‘부티 걸(booty girl)’이라는 속어가 있다. 엉덩이가 크고 예쁘다는 본래의 뜻을 벗어나, 아무 때나 부르면 달려와 성적 대상이 되고 스스로 발깔개처럼 상대방에게 천한 대접을 받는 것을 자초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흑인 창녀들을 비하하는 말로 쓰여서 백인 창녀를 ‘white booty girl’을 줄여 ‘whooty girl’이라고도 한다. 남자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특히 성적인 서비스를) 다 해준다는 뜻의 경멸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노출 또한 의지이자 선택의 문제…벗은 몸 보여주었다고 친밀한 관계로 볼 수 없어

반면에 남자들 중에서 지나칠 정도로 야하게 자신의 용모를 꾸미는 데 집착하는 경우는 ‘chocolate boy’라는 속어를 쓴다. 선탠을 해서 초콜릿 색 피부를 자랑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저 잠시 달콤하게 먹고 나면 그만인 대상이라는 의미도 있다. 영화 제목이기도 했던 ‘지골로(gigolo)’도 돈 많고 나이 든 여성의 성적 파트너가 되어주는 이들을 말한다. 스스로 도발적인 옷차림을 하고, 뭇 이성들의 시선을 끌 때는 이런 오해를 받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오해가 아니라 자신이 성매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옷차림으로 정확하게 밝히는 경우도 있다.      

아주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데에 대한 반동인지 성에 대한 개방적인 담론으로는 모자라, 자신의 속옷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가능하면 더 많이 벗으면서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은밀한 시선을 노골적으로 모욕함으로써 그동안 억압되었던 자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옷을 점잖게 입건, 뻔뻔하게 입건, 속옷을 집어던지건,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의지이자 선택이므로 남들이 강제하거나 평가할 문제는 아닐 듯하다. 다만 성에 대한 이미지가 넘쳐나, 발기 부전과 불감증이라는 증상을 덤으로 얻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을 돈이나 권력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갖는 아마존이나 남태평양의 원시 부족들에게 비아그라나 질 윤활제나 포르노그라피나, 더 뇌쇄적인 옷차림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성을 사고파는 경우이든, 하룻밤 치정으로 끝나는 관계이든, 사랑하는 감정 없이 성관계만을 갖는다고 진정으로 친밀한 감정이 오갈 수는 없다. 서로를 알고 영혼 깊숙한 곳을 공유하며 교감하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몸을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벗은 몸을 보여주는 관계라고 해서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연예인들이 무대나 화면에서 벗고 나왔다 해서 우리가 그들을 잘 안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화면은 화면일 뿐이다. 어쩌면 요즘 사랑은 아예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은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유혹적일 때가 언제였던지 한번 생각해보자. 난데없이 벌거벗고 내 앞에 나섰을 때였는가. 아니면 수줍고 조심스런 얼굴로 조금씩 다가왔을 때였는가.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에 빠져들면서 서로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에로스적 열망은 고조된다. 둘만의 비밀스러운 몸의 추억도 없고, 어렵사리 한 꺼풀씩 벗어가는 가슴 떨린 순간도 생략된 뻔한 관계에 과연 어떤 사랑의 향기가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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