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암 여객기 폭파’의 진실도 묻히나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5.2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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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범인’으로 지목돼 복역까지 했던 리비아인 사망…의혹 많아 희생자 유족들도 재조사 요구

1988년 12월21일 스코틀랜드 로커비 마을 상공에서 폭발한 런던발 뉴욕행 팬암 여객기 잔해. ⓒ 연합뉴스

1988년 미국 팬암 여객기를 폭파해 2백70명을 죽인 유일한 범인으로 기소된 압델 바세트 알리 알 메그라히가 5월20일 고향인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그의 죽음은 아들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법원에 기소되어 최소한 27년을 복역하는 종신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8년 만인 2009년 의학적 이유로 석방되었다. 그의 죽음은 세계를 경악시킨 테러 사건에 종지부를 찍기는커녕 오히려 사건의 전모를 둘러싼 의혹만 키우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유일한 범인임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가 없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사건의 진짜 범인은 누구이며 2백70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물이 암 때문에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이유로 형기 중에 석방된 조치가 온당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국제적 논쟁이 뜨겁다. 범인의 가족과 희생자의 유가족 모두가 사건 전말에 불만이다. 그만큼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는 얘기이다. 

사건은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12월21일 프랑크푸르트행 몰타항공 여객기에 청동색 샘소나이트 가방 하나가 탁송되었다. 문제의 가방은 독일에서 런던행 비행기로 옮겨져 런던에서 다시 뉴욕행 보잉 747  팬암 103편 화물칸에 실렸다. 이 여객기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향으로 가던 뉴욕 시러큐스 대학생 다수를 포함한 1백89명의 미국인이 타고 있었다. 그날 밤 저녁 7시3분 여객기가 스코틀랜드의 국경 도시 로커비 상공 3만1천 피트의 고도에 이르렀을 때 샘소나이트 가방에 은밀히 장착된 폭탄이 터졌다. 탑승자 2백59명 전원이 사망했다. 지상 1㎞ 상공에서 산산이 부셔져 땅으로 추락한 여객기 잔해는 불꽃놀이를 방불케 하는 비극의 쇼를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지상에 있던 주민 11명도 사망했다. 그래서 총 2백70명이 사망했다.    

국제조사단은 당시로서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역사상 최대의 범죄로 기록된 폭파범을 찾기 위해 전세계 50개국에 걸쳐 1만4천명을 조사하고 면담했다. 그러나 용의자의 정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메그라히는 수사 초기 단계에서 용의 선상에 오르지도 않았다.

폭탄 든 가방이 검색대 통과한 정황 못 밝혀

미국 조지타운 대학의 테러리즘 전문가 브루스 호프만 교수에 따르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는 엉뚱하게도 팬암기의 이륙 지연에서 나왔다. 이 여객기가 예정 시간에 이륙했다면 아마도 대서양 상공에서 폭파되어 잔해 수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추락하는 바람에 수사관들은 로커비 주변 반경 50㎞ 지역을 샅샅이 뒤져 손톱 크기의 플라스틱 파편과 부호가 들어 있는 셔츠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정 결과 청색 플라스틱은 폭탄을 터뜨릴 때 사용되는 스위스제 시한장치로 밝혀졌다. 미국 정보기관은 이와 동일한 장치가 1980년대 리비아 정부에 의해 대량 구매된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의 샘소나이트 가방에 폭탄과 함께 들어 있었던 셔츠 조각은 몰타의 패션 상점에서 판매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상점 주인은 뒤에 메그라히가 그 셔츠를 샀다고 증언했다.

폭탄이 내장된 가방이 공항 검색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시한 장치가 리비아 정보기관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메그라히는 1991년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마침 모아마르 카다피가 지배하는 리비아가 정부 주도의 테러 행위를 일삼는 정황도 메그라히를 기소하는 데에 일조했다. FBI는 즉각 메그라히를 범인으로 수배하고 4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메그라히와 함께 역시 리비아 정보 장교로 활동하던 라멘 칼리파 피마도 공범으로 기소되었다. 카다피는 두 사람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신 가택연금에 처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그 때문에 리비아 경제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중재에 나서 카다피는, 1990년 피의자들을 스코틀랜드 법관들이 참석해 네덜란드에서 진행되는 법정에 신병을 인도하는 데 동의했다. 재판 과정에서 메그라히와 피마는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2백27명의 증인을 세웠으나 피고들은 단 세 명의 증인을 불렀다. 이들 세 명은 그러나 메그라히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2001년 메그라히에게는 최소한 27년을 복역하는 종신징역이 구형되었고, 피마는 무죄 석방되었다. 카다피 정부는 사건 개입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몇 년 후 희생자 유족들에게 27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스코틀랜드 감옥에서 복역하던 메그라히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석방되었다. 스코틀랜드 법은 사망을 앞둔 수감자를 석방해 집에서 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메그라히는 2009년 석방되어 트리폴리로 귀국했다. 그는 공항에서 ‘국민 영웅’의 환영을 받고 카다피와도 특별 면담을 하는 특전을 누렸다. 그의 석방은 팬암기 희생자 유족들의 강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석방 조치가 ‘실수’라고 논평했다.

일부 법학자들, 이란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메그라히는 1952년 4월1일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미국에서 유학한 덕분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리비아의 벵가지 대학에서는 공학 학사 학위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다섯 자녀가 있다. 그는 석방된 후 2년간 트리폴리의 호화 빌라에서 살았다. 그가 진범이라면 그의 안락한 노후는 유족들에게 납득되기 힘든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무죄를 호소하면서 자신을 기소한 조치가 국제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때 미국인과의 회견에서 “당신들은 나를 잘못 재판했다. 내 일생은 깨끗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메그라히는 갔으나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카다피가 사건 개입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거액의 보상금까지 지불한 점으로 판단하면 메그라히는 ‘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다피의 굴복은 메그라히를 진범으로 인정했다기보다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정치적 타협을 했다는 추측을 낳았다. 그가 끝내 범죄를 인정하지 않은 점, 그리고 그를 범인으로 단정한 증거가 불충분한 정황을 고려하면 진짜 범인은 따로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부 법학자들은 이란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한다. 사건 당시 이란은 미국과 첨예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걸프 만에서 미국 미사일의 오발로 이란 여객기가 추락한 사건과 관련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팬암기 폭파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1986년 레이건 행정부가 트리폴리의 카다피 숙소를 폭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가 사건을 음모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처럼 잔혹한 테러 범죄가 메그라히 한 사람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팬암기 희생자 유족들도 사건의 불완전한 종결에 불만을 나타냈다. 이들은 이제 카다피도 사라진 마당에 리비아 정부와의 전폭적인 협조하에 사건 전말을 전면 재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영국·스코틀랜드 정부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이 사건으로 23세 된 딸을 잃은 영국인 짐 스와이어도 의문을 제기했다. 올해 75세인 그는 메그라히의 범죄를 입증할 믿을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메그라히에게 문제의 셔츠를 판매한 점원이 수백만 달러를 준다는 서방 정보기관의 설득에 넘어가 허위 증언을 했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많은 법학자는 이 사건의 수사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정치적 입김이 들어갔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12월 병상에서 메그라히를 마지막으로 만난 짐 스와이어는 메그라히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오늘은 슬픈 날이다”라고 짧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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