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중고’에 시달리더니 한국에서 돌파구 찾는다
  • 도쿄·임수택│편집위원 ()
  • 승인 2012.07.0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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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들, 구미·파주 등에 공장 짓는 등 직접 투자 확대 / 동일본 대지진 이후 엔고·환경 규제·전력 부족 등 피해 탈출 ‘러시’

지난해 11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경남 창원시가 일본 기업 70여 곳을 대상으로 투자 유치 설명회를 가졌다.

지난해 1월 PAN계 탄소 섬유 분야의 세계적 기업인 일본의 도레가 탄소섬유를 양산하는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경북 구미 3공장에 6백3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결정했다. 당시만 해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동안 일본 기업들의 투자는 주로 판매 법인을 설립하거나 한국 기업에 지분을 투자하는 형식이었다. 이번처럼 부품 소재 공장을 설립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도레의 구미 공장 투자가 주목된 이유는 바로 직접 투자를 해 첨단 기술로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기업들의 한국에 대한 크고 작은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아사히카세이케미컬, 쓰미토모 화학, 소프트뱅크텔레콤, 이비덴, 테진 등 부품·소재·화학 분야의 일본 유수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최근 예로는 지난 5월 액정디스플레이(LCD)와 플라즈마디스플레이(PDP)용 유리를 제조·판매하는 일본전기초자가 경기도 파주에 약 3백30억 엔(4천6백20억원) 규모의 설비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이 회사는 최신 제조 장치를 일본에서 파주 공장으로 이전할 계획이어서 단순하게 공장을 설립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는 기술 유출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 핵심 기술력이 있는 공장을 외국에 세우는 것을 꺼렸으나 이제는 인식이 바뀌고 있다. 투자 분야도 제조업 중심에서 음식·물류·은행·보험·의류와 같은 서비스 분야는 물론 IT소프트웨어 분야까지 다양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캐주얼패션 브랜드인 유니클로가 서울 명동에 아시아 최대 매장을 연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본 기업들은 6중고에 시달려왔다. 엔고(高), 높은 법인세, 파견 금지 등의 노동 규제,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느린 대응, 전력 부족, 환경 규제 강화 등이다.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실행한 시점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이다. 엔고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법인세 인하 조치는 논의만 있을 뿐 기업측의 입장이 좀처럼 반영되지 않았다. 전기료가 비싼 것은 그만두고 대지진으로 인해 절전마저 해야 하는 지경이다. 기업 입장에서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기업의 해외 탈출 러시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인재 활용 등 투자 목적 ‘업그레이드’

한국에 대한 투자는 2009년 20억 달러 정도에서 지난해에는 24억 달러에 가깝게 이루어졌다. 한국에 대한 투자 붐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첫 번째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였다. 당시는 어려움에 빠진 한국 기업들을 지원하는 성격도 있었다. 두 번째는 2002년 무렵이다. 주로 한국 대기업에 물건을 판매하거나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투자였다. 이번 세 번째 투자는 1, 2차 투자 붐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단순히 판매 목적만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다. 또 인건비나 전기료가 싸다, 법인세의 실효 세율이 일본에 비해 낮다, 세금 우대 제도가 있다, 공항·항만·도로 등 산업 인프라가 잘 정비되어 있다, 음식이 맛있다는 등의 이유만은 아니라고 일본무역진흥기구 서울사무소 오오스나 마사코 소장은 설명했다.

부품 소재 공장을 설립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인재들을 활용하기가 좋다는 점이다. 닛산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시즈오카 현 후지 시 JATCO 사의 경우 서울 현지법인에서 JATCO 본사에 필요한 연구·개발 업무를 하고 있다. 연구·개발 업무를 한국 법인에 맡기는 이유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가 일본보다 쉽다는 점이다. 기업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경기도 평택에 투자한 일본의 한 회사도 일본 본사보다 한국 회사가 박사급 인재가 많고 인재의 질이 높다고 밝혔다. 기계는 일본 본사에도 없는 최첨단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공장의 비중을 높게 생각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한국을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생산·수출의 거점 지역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워 물류 비용이 싸고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 또 인건비를 제외하면 한국과 중국의 비용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도 있다. 잠재적인 고객인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많이 진출했다는 점도 한국에 진출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실제로 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이 수원·평택·천안·구미·울산 등에 많이 진출했다. 이 지역은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의 기업들이 있는 곳이다. 이런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베이징·톈진·상하이에 진출해 있다. 일본 기업들이 중국 공략을 위한 전략으로 한국 기업들의 공급망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한국이 미국, 유럽, 아세안 등과 맺은 FTA를 활용하기 위함이다. 한 사례로 도레가 2013년부터 10년간 9백40억 엔(1조3천억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한·미 FTA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탄소섬유는 미국의 보잉787이나 프랑스의 에어버스 A380 등 최신형 항공기의 구조 재료로 대량 사용되고 있다. 도레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탄소 섬유를 수출하면 FTA 효과를 전혀 볼 수 없으나, 한국에서 수출하면 관세가 전혀 없다. 이 점을 간파한 것이다. 최근에 진출하는 기업들은 한국 기업과의 전략적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한국 기업과 연계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한·일 기업 간의 협력을 통한 비즈니스 모델이 주목되고 있다. 몽골, 아부다비, 인도, 멕시코 등에서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은 플랜트·인프라 분야에서 공동으로 투자·개발을 하고 있다. 또 인도네시아와 브라질에서는 자원 개발 사업을 하고 있다.

수익성에서도 투자 성과 우수

한편 한국에 진출하는 일본 기업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에 따른 문제점도 생겨나고 있다. 한국에 나와 있는 일본 기업인들의 모임인 서울재팬클럽(Seoul Japan Club)에서는 해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 기업들의 애로 사항을 조사해 한국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노무·노사에서 금융, 지적재산권, 나아가 일상생활 관련 문제들까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지적재산권에 대한 요구 사항이 제일 많다. 한국에 진출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업의 특성상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한국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수익성 측면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 성과가 우수하다는 것이다. 일본무역진흥기구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20개 국가를 대상으로 수익성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은 최상위급 국가로 조사되었다.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이 늘어나는 데에는 한국 지방 정부들의 발 빠른 움직임도 한몫하고 있다. 한 사례로 부산시는 해외 이전을 고려하는 일본 기업들이 증가한다는 점을 감안해 강서국제물류도시에 66만㎡ 규모의 일본 기업 전용 공단을 조성할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 기업은 어떤 부분에서는 라이벌 관계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지만 또 다른 큰 부분에서는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최상의 파트너이다. 지금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일 관계는 향후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글로벌화된 기준 준수해…중국 진출에도 전략적으로 유리”
 
일본무역진흥기구 서울사무소 오오스나 마사코 소장 인터뷰


1956년생으로 이시가와 현 가나자와 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와 공공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아시아경제연구소 연수실장을 거쳐 지난해 3월 서울사무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한국 지방 정부와 일본 지방 정부 간의 경제협력 모델인 RIT 프로젝트 사업에 열심이다. 한국 내 일본 기업인들의 모임인 Seoul Japan Club(SJC)의 산업정책위원회 회장직을 맡아 한·일 가교 역할에도 힘쓰고 있다. 취미는 등산·골프이며, 스키는 대회에 나갈 정도로 프로급 실력이다.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익성이 있다는 것이다.

첨단 기업들의 경우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는 없나?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진출 시 계약서 작성에 신경을 많이 쓴다. 걱정이 되어 진출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진출해서 얻는 이점이 많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부품·소재 산업의 숙련자들이 정년퇴직을 해 갈 곳이 없는데, 한국에서 그런 인재들을 영입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공장 및 연구·개발 연구소를 만드는 데 한국의 인재뿐만 아니라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의 숙련자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기술 유출이라고 한다면 일본 숙련자들이 한국에 오는 자체가 유출 아니겠나. 일본 기업들은 해외 진출에 대해 과거보다 적극적인 것 같다. 특히 한국 기업은 글로벌화된 기준을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 중에 한국이 미국, EU, 아세안 국가 등과 체결한 FTA를 활용한 사례가 있나?

그렇다. 지난해 일본무역진흥기구가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수출할 때 FTA 효과를 활용하고 있다. EU 여덟 개 회사, 아세안 일곱 개 회사, 인도 두 개 회사 등이다. 또 향후 이용을 검토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수입의 경우에는 수출만큼 많지는 않으나 활용한 사례는 있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일본의 산업 공동화가 문제 될 것 같은데?

큰 걱정이다. 그동안은 엔고로 해외에서 번 돈을 송금해서 그나마 경상 수지가 좋았다. 하지만 해외에서 송금한 금액에 대해 세금을 징수당하기 때문에 기업들, 특히 글로벌 기업들이 송금하지 않고 해외에 별도의 법인을 만들어 이익금을 관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아시다시피 일본 법인세의 법정 실효 세율(도쿄 도)은 38.01%로 아주 높다. 이런저런 부담을 감내하면서 일본 국내에서 기업 활동을 요구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좋지 않다.

중국 진출의 거점 기지로서 한국에 진출하는 기업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 일본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는 경우보다는 한국을 통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이 있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에 많이 진출해 있지 않나. 그리고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있고. 일본 기업들의 약한 부분을, 한국 기업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한·일 협력 방안에 대한 좋은 모델은?

한국 기업은 완성품에 강하다. 하지만 제조·장치 산업이나 부품 산업은 좀 약하다. 이 부분은 일본이 아주 강하다. 일본이 강한 분야의 산업이 한국에 진출해 한국 공장에서 완제품이 만들어진다면 상당한 경쟁력을 가질 것이다. 아울러 부품·소재 산업에서 기술 이전이 이루어지면 한국 기업에게도 좋아 자연스럽게 협력 모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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