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앞엔 ‘더러운 과거’도 새롭다?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7.10 06: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멕시코 대선에서 독재 강요했던 정당의 후보 당선…민주혁명당의 12년 실험 ‘물거품’으로

지난 7월2일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당선인이 멕시코시티에서 연설 도중 지지자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 AP연합

마약 전쟁과 추락하는 경제에 지친 멕시코 국민들이 고통스러운 선택을 했다. 이 덕분에 지난 2000년 선거에서 패배한 중도 노선의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 후보가 7월1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횡재를 했다. 선거 결과는 이율배반의 길이다. 삶에 지친 국민들은 12년 전 모처럼 대의 정치의 여명을 열었던 민주화의 꿈을 앗아가고 독재 정치를 강요했던 정당의 후보를 선택했다. 니에토는 TV 토론을 통해 백성들의 불행한 가슴에 호소하는 전략을 폈다. 그 결과 집권 민주혁명당(PAN)의 마뉴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를 10% 가까이 앞서는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71년간 독재를 하면서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PRI당의 재집권은 정치에서 민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멕시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노렸던 보수당의 호세피나 바스케스 모타 후보는 3위에 그쳤다. 세 후보 모두 민생을 공약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서민 경제를 복원하겠다는 니에토 후보의 약속이 가장 크게 주효했다.

마약과의 전쟁에 지친 국민들의 선택

이번 선거를 가장 주목한 측은 미국이다. 미국에 공급되는 마약의 90%가 멕시코에서 반입되는 상황에서 펠리페 칼데론 현 대통령이 지난 6년간 벌여온 마약과의 전쟁을 은근히 지원한 미국은 의외의 결과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멕시코의 마약 거래 규모는 연간 5백억 달러이다. 마약 조직이 사용하는 무기의 70%는 미국에서 밀반입된다. 니에토는 지난해 워싱턴과 뉴욕을 방문해 민주적인 정책과 마약과의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다짐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마약 조직을 과감하게 단속하는 데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이 그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겠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니에토는 한마디로 마약의 폐해가 큰 줄 알지만 다수의 국민이 마약 거래에 생계의 일부를 의존하고 있는 만큼 서민들의 살길에도 숨통을 터주면서 마약 조직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입장이다.

멕시코에서는 지난 몇 년간 마약과의 전쟁으로 민간인 6만여 명이 죽었다. 마약 조직과의 전쟁에서 범죄자보다는 양민이 더 많이 죽었다. 과도한 군사력을 동원한 결과였고 이것이 선거의 패인이었다. 국민들은 아무리 목적이 옳아도 수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고, 니에토 당선인은 바로 이 점을 감안해 마약과의 전쟁에서 완급과 경중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사람이 살고 난 후에야 마약 전쟁도, 그 무엇도 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선거의 이슈에는 마약 외에도 소득 격차, 피폐한 경제 등 멕시코를 짓누르는 각종 현안이 등장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마약 문제가 승패를 갈랐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집권 PAN당의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일종의 ‘전신 권태(general malaise)’ 증세가 만연했다고 분석했다. 마약을 뿌리 뽑겠다는 칼데론 대통령의 집념은 좋았으나 국민을 너무 피곤하게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단임을 규정한 헌법에 따라 오는 12월 퇴임한다.

전 멕시코 주지사를 지낸 니에토 당선인은 애매모호한 경력의 소유자로 지방당에서 중견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그는 유세 기간 중 일체의 이념 색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철저한 실용주의를 표방했다. 쉬운 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라는 것이 공약이었다. 그만큼 멕시코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중점 공약은 경제였다. 일자리를 만들고 임금을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독점 기업인 국영 석유회사의 지분을 민간에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가장 이색적인 것은 마약 카르텔과 적당한 ‘거래’를 통해 거리의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공약이 주효한 것은 멕시코 정치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마약과의 전쟁이 몰고 온 폭력 사태에 국민들이 얼마나 진절머리가 났으면 마약 조직과 타협하겠다는 공약이 표를 모으는 모순을 만들어냈겠는가. 대학생들은 그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때로는 그의 유세 행렬이 시위대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한 일도 있었다. 언론은 편파 보도로 니에토를 옹호했다. 어찌 보면 멕시코 사회 전체가 정신 이상에 빠진 듯하다.

선거 당일 PRI당 본부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PRI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연방 의회 선거에서도 낙승했다. 일부 유권자들은 지금보다는 좀 더 안정되었던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에 PRI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모든 정당이 돈으로 표를 매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PRI는 표 매수에 이골이 났다는 명성까지 얻었다. 한 치과 대학생은 자신의 가족들이 PRI 지지 대가로 유권자 1인당 5백 페소를 받았다고 실토했다.

대통령 당선인의 미스터리한 전략과 전망

지난 7월3일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로페즈 오브라도르가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PRI당은 70여 년의 집권 기간 중 경제를 현대화하고 사회 안정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어느 시인은 이를 ‘자선의 탈을 쓴 귀신’이라고 풍자했다. PRI는 대신 정적을 탄압하고 부정 선거를 일삼았다. 그 결과는 끝내 경제 위기와 부패 스캔들로 귀결되었다. 한 유권자는 부패와 부정 선거가 신물이 나지만 그래도 사회를 안정시킬 유일한 대안은 PRI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투표했다고 고백했다.

니에토 당선인은 ‘미지의 신비’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매사에 ‘전략’으로 행동했다. 그것이 전통적 정치 행보에 맞든 맞지 않든 민초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대다수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서도 공감을 주는 언행에 매료되었다. 그는 말씨가 부드럽고, 외모는 미남형이다.

그는 미스터리한 전략으로 대통령직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대통령으로서 멕시코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도 작동할지는 미지수이다. 이제 관심사는 그가 과거 정실주의로 얼룩졌던 PRI의 어두운 과거로 돌아갈지, 아니면 선거 공약대로 좀 더 겸손한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에 쏠려 있다. 누구보다 그의 다음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쪽은 워싱턴이다. 마약과의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펼칠지 궁금해한다. 그는 선거 공약으로 마약과의 전쟁 강도를 완화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혹시 마약 카르텔을 묵시적으로 용인한다면 미국에는 낭패가 된다. 그는 대선 출구조사에서 자신의 승리가 예고된 일요일 밤 “마약과의 전쟁은 계속하되 새로운 전략으로 하겠다”라고 말했다. 폭력을 줄이고 모든 멕시코인의 생명을 보호할 것이며, 마약 조직과는 어떤 협상이나 타협도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체스광이다. 체스 게임을 마치느라 국제 회의에 늦게 참석할 정도이다. 하지만 체스와 현실 정치는 다르다. 체스가 그렇듯 그는 디테일에 집착한다. “사소한 일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라는 것이 그의 평소 좌우명이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과는 만난 적이 없다. 월요일 오바마가 당선 축하 전화를 했을 때 그는 2008년 승리를 축하한다는 동문서답을 했다. 향후 마약과의 전쟁에서 미국과의 협조를 기대했던 오바마는 머쓱해졌다. 그의 진로는 요약하자면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미국은 속이 탄다.

멕시코 국민들은 부패 때문에 버렸던 정당을 마약 때문에 다시 선택했다. 이번 선거는 여러모로 파격이고 자가당착이다. 그러나 어쨌든 국민의 선택이다. 새 대통령은 멕시코를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이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선거에서 나타난 민의의 진정한 의미를 읽는다면 멕시코의 미래는 기대해볼 만하다고 논평했다.

 

 ▶ “더 큰 김두관으로 돌아오겠다”

 ▶ “이상득, 금융위원회에 솔로몬 관련 전화 했다”

 ▶ 경제 민주화 논쟁은 ‘꼼수의 전쟁’인가

 ▶ 요람을 흔드는 ‘비밀 입양’의 함정

 ▶ 무엇이 ‘개가수’에게 열광하게 하나

 ▶ 대학로에서 오래 살아남는 연극의 4대 요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