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부활’ 꿈꾸는 중국 기독교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 승인 2012.07.2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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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된 가정 교회만 80만개 추정…신도 수는 6천만명 추산돼 ‘기독교인 1억명설’에 신빙성 더해

중국 쓰촨 성 랑중에 있는 천주교 성당. ⓒ 모종혁 제공
중국 상하이(上海)의 한 외자 기업에서 일하는 덩유에 씨(여). 덩 씨와 그의 남편은 매주 일요일마다 ‘은밀한 장소’에 가 미사에 참석한다. 덩 씨 부부가 예배를 올리는 장소는 한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가정집이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참석하지 못한다. 하지만 덩 씨 부부의 신앙심은 누구보다 깊다. 덩 씨는 “천주교애국회(天主敎愛國會)가 관할하는 성당보다 ‘도시 교회’의 신앙생활이 훨씬 자유롭고 교인 간의 유대감도 깊다. 신분상 위험이 따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라고 밝혔다.

중국 내륙 충칭(重慶)에서 밤무대 가수로 일하는 차오안잉 씨(여)도 정식 기독교 교회가 아닌 ‘가정 교회’에 다닌다. 교인은 30여 명으로 젊은 층이 대다수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중국인 감리교 전도사가 예배와 성경 학습을 주관한다. 차오 씨는 “대학 동창의 권유로 처음 가정 교회를 접했는데 신앙을 통해 피폐해진 마음에 안식을 얻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정부 정책의 설교에만 치중하는 삼자(三自) 교회보다 가정 교회에서 더욱 깊은 신앙심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식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 수는 2천3백만명

최근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종교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열기는 조용하지만 광범위하고 거세게 퍼져 나가고 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적대시했던 마르크스나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하에서 울고 갈 정도이다. 종교 부흥을 주도하는 것은 단연 기독교이다. 2010년 현재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기독교 인구는 2천3백5만명이다. 그러나 리판(李凡) 세계·중국연구소장은 미등록된 가정 교회가 80만개, 신도는 6천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인 1억명설’이 신빙성을 더해가고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35년이다. 이단 종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처음 상륙했다. 경교는 당 황실의 우대 정책 아래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교인을 늘려갔다. 845년 당 무종의 탄압과 878년 황소의 난으로 종적을 감출 때까지 2백여 년간 번성했다. 로마 가톨릭이 중국에 정식으로 진출한 것은 명대 말기이다.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과 민간 풍속에 천주교 교리와 의식을 결합시켜 정착에 성공했다. 특히 마테오리치는 명나라 황실의 고문이 될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다.

청대 초기에 뒤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중국화에 반기를 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과 제사 문제를 두고 예수회와 전례(典禮) 논쟁을 벌였다. 1704년 교황 클레르몽 11세가 도미니코파가 옳다고 판결하자, 강희제는 중국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고 내정을 간섭한다며 선교사의 포교 활동을 금지시켰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양교(洋敎)’라고 낙인찍혀 ‘반중국적’ ‘비애국적’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1840년 아편전쟁까지 지속되었다.

아편전쟁 후 서구 열강은 강력한 선교의 자유를 얻어냈다. 수백 명의 천주교 및 개신교 선교사들은 중국 전역에 앞다투어 들어가 선교했다.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전파하고 많은 사회 개혁 및 봉사 활동을 펼쳤으나 복잡한 중국인의 심정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린 선교사들은 신도와 일반인의 충돌이 발생하면 무조건 신도를 비호했다. 몰수되었던 교회 재산을 회수하면서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1860년대 시작된 반(反)기독교 운동은 1890년대 심화되어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폭발했다. 도처에서 교회가 불살라졌고 수많은 선교사와 신도가 피살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뒤 기독교인의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1900년 70만명이었던 가톨릭 신도는 1920년대 초 2백만명을 넘었고, 개신교 신도는 10만명에서 40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반외세와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대규모 반기독교 운동이 다시 촉발했다. 중국 기독교인들은 이를 반성하고 새롭게 배우고자 하는 계기로 삼았다. 외국 선교사에 의해 좌우되던 교회 지도자도 점차 유능한 중국인 목회자로 대체되었다. 1927년에는 16개 교파가 연합해 중화기독교회가 설립되었다. 중화기독교회는 서구 선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의 자치(自治)·자립(自立)·자전(自傳)을 강조했다.

오랜 내전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기독교는 내실을 다졌다. 1949년 중국 내 기독교 신도 수는 84만명에 이르렀다. 교회 수도 7천여 개에 달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중국인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새로이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에 대해 강력한 간섭과 통제를 시작했다. 정부 부서 내 국가종교사무국을 설치해 중국공산당의 종교 정책을 감독·집행하도록 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목적으로 ‘삼자교회’만을 인정했다. 즉, 모든 교파를 하나로 묶어 조국을 사랑하고 법률을 준수하는 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三自會)가 탄생한 것이다.

‘한 자녀’ 정책이 낳은 외둥이들의 멘토 역할

중국 산시 성 시안의 베이린 박물관에 있는 ‘경교 전래비’. ⓒ 모종혁 제공
1950년대 중국 기독교인들은 일정한 종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중국 정부의 통제와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시기에 성직자와 신도들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다. 수많은 신부와 목사가 홍위병에 의해 구타당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적지 않은 성당과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파괴되었다. 10여 년간 지속된 탄압은 1980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삼자애국운동위원회가 활동을 재개하고 1982년에는 해외의 지원까지 받아들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는 기독교 신앙 열기가 다시 확산되었다. 그 기반에는 문혁 시기에 태동한 지하 교회가 있었다. 지하 교회는 오랫동안 지속된 극단적 정치 운동에 심신이 피폐해진 노동자와 농민 속을 파고들었다. 가정 교회 형태에서 발전한 지하 교회는 부활한 삼자교회와 더불어 기독교 부흥을 주도했다. 급속한 경제 성장에 따른 황금만능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로 정신적 공백을 느낀 중국인들을 성당이나 교회로 끌어당겼다. 특히 젊은 세대의 호응도가 높았다.

오늘날 중국 젊은이들은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에 따라 태어난 외둥이(獨生子女)들이다. 이들 부모 세대는 문혁 시기나 개혁·개방 초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 맞벌이로,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학교에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정서적 불안감이 깊어진 젊은 세대는 자신을 이끌어주고 보듬어 줄 ‘정신적 멘토’를 갈구했다. 이 공백을 메워준 것이 바로 종교였다. 중국 젊은이들은 철저한 사회주의 교육 체계에서 자랐지만 신앙이 가져다준 위안과 자유에 쉽게 동화되었다.

명문대를 졸업해 해외 유학 중 학자의 길을 들어선 허즈밍 씨도 같은 사례이다. 허 씨는 1979년에 태어난 한 자녀 정책 첫 세대이다. 중국정법대에서 경제법을 전공한 뒤 법학자가 되겠다는 목표로 독일에 건너갔다. 석사 과정을 밟던 중 기독교를 접하게 된 그는 전공을 바꿔 신학자가 되었다. 허씨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귀국해 지금은 한 지하 교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학에 나설 때까지 내 의지대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영혼의 자유를 얻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지하 교회에 대한 탄압도 완화했다. 외국 선교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한, 신도가 예배를 보다 잡혀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기독교의 확산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견제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5월 발생한 서우왕(守望) 교회 사건이 대표적이다. 베이징의 대표적인 가정 교회였던 서우왕교회는 정부 당국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의 임대 연장 거부로 예배당을 잃었다. 교인들이 옥외 예배를 열려고 하자 목사는 가택연금당하고 신도들은 연행당했다.

중국 정부와 바티칸 교황청 간의 갈등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교황청이 1951년 타이완 정부를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한 이래 바티칸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가톨릭은 교황을 정점으로 한 로마 교황청이 세계 각국의 주교 등 종교직을 서품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천주교애국회를 따로 출범시켜 ‘자선자성(自選自聖)’ 원칙을 내세우며 주교를 독자적으로 임명하고 있다. 7월3일 중국이 하얼빈(哈爾濱) 주교로 지명한 웨푸성(岳福生) 신부도 교황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서품되었다. 미사도 바티칸과는 다른 라틴 방식으로 봉헌한다.

지하 교회 지도자들, ‘종교 자유’ 집단 청원

중국이 이와 같은 횡포를 일삼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중국 공민은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다. 어떤 국가 기관이나 사회단체와 개인은 공민의 종교를 하지 못하게 하거나 종교를 강압하지 못하며,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시하면 안 된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호한다. 종교를 이용해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공민의 신체를 손상하며 국가 교육 제도를 방해할 수 없다. 종교 단체와 종교 사무는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라는 중국 헌법 제36조이다. 공안 당국은 이 조항을 들어 옥외 예배와 선교 활동을 엄금하고 있다. 종교사무국의 허가를 받지 않는 지하 교회는 ‘정상적인 종교 활동’이 아니기에 탄압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외국 세력 배제를 외치며 외국 교회나 선교사의 포교 활동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정부 당국의 탄압과 견제에도 중국 기독교의 앞날은 밝다. 기독교인 대다수가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자로, 중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도 계층이다. 지난해 7월 고속철도 사고 발생 이후 원저우(溫州)에서 일어난 시위는 그들의 힘을 잘 보여주었다. 당시 100여 명의 유족이 고속철도역 입구를 막고 ‘우리의 전통과 믿음에 따라’ 장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즉, 영안실에서 시신을 화장하도록 한 정부 정책과 달리 기독교 방식으로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겠다는 요구였다.

원저우는 ‘중국의 유대인’이라 불릴 정도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백만장자 비율이 중국에서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 비율도 중국 최고이다. 인구 9백만명 가운데 공식 등록된 기독교 인구만 70만명에 달한다. 여기에 지하 교회 교인까지 포함하면 전체 인구 중 30%가 기독교인으로 추정된다.

지하 교회가 강력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역량을 늘리는 점도 주목된다. 지난해 5월 베이징·상하이·원저우·시안(西安)·청두(成都) 등 중국 각지의 지하 교회 지도자 20여 명은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종교 자유의 보장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지하 교회 지도자들이 집단으로 공개 청원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국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목적 없이 오직 기도를 통해 신앙 활동에 전념할 뿐이라며 정부 당국에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1999년 파룬궁(法輪功) 탄압과 같이 지하 교회를 겨냥한 대응이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과거 종교에 뿌리를 둔 민중 봉기에 무너졌던 역대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한다. 중국 기독교가 신앙에만 안주하느냐, 아니면 사회 변혁에도 나서느냐에 따라 중국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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