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 재입북에 ‘영사관 루트’도 있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07.3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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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 대신 북한 공관 찾아가 공식 입북하는 사례도 있어 탈북자 재입북 계속 늘어날 전망이지만 뾰족한 방지책 없어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넘어가고 있다. 최근에 입북한 박인숙씨와 전영철씨 등은 북한에서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박선영 전 자유선진당 의원은 제주도에 거주하던 여성 탈북자 세 명이 최근 재입북했다며 구체적인 신원까지 거론했다.

올해 입북한 탈북자가 100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 당국은 “탈북자들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재입북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 재입북한 탈북자 수도 수 명에 그친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시사저널>은 제1085호(2010년 8월10일자) 커버스토리에 ‘탈북자 2백여 명 북한으로 다시 넘어갔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누가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상세하게 밝혔다. 이 중에는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사가 보도된 후 관계 기관에서는 기자에게 전화해 “누구인지 알려달라”라며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전체 탈북자를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점도 알아달라”라고 하소연도 했다.

비행기 타고 들어가 공항 환영까지 받아

북한에 있는 가족을 탈북시키기 위해 재입북한 남수씨(왼쪽 ⓒ 시사저널 유장훈)와 최승찬씨(오른쪽 ⓒ 연합뉴스).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남 현상’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누가 갑자기 사라졌다”라거나 심지어 “북한에서 누구를 보았다”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돈다. 일부 탈북자가 두만강을 건너 설을 쇠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다시 북한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또 어떤 경로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기자가 만난 탈북자들은 ‘재입북’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한 탈북자는 “마음만 먹으면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라고 전했다. 탈북은 어려워도 입북은 아주 쉽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탈북자들의 상당수는 남한에서 돈을 벌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가족들의 탈북 자금을 마련한 후 브로커를 통해 탈북하도록 시도한다.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혈혈단신 북한으로 재입북한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재입북한 탈북자들을 보면 열에 아홉은 가족 때문이다.

탈북자들의 입북 루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중국-북한 접경지대로 가서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 도강하는 것이다. 탈북 브로커 대신 가족들을 직접 탈북시키기 위해 주로 이용된 루트이다. 하지만 위험 부담이 뒤따른다. 북한 당국에 적발될 경우 목숨을 내놓거나 장기간의 수용소 생활을 감내해야 한다.

북한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통해 공개적으로 넘어가거나 제3국을 통해 입북하는 방법도 있다. 이런 경우는 ‘재탈북’을 시도한다기보다는 ‘자수하고 광명 찾는’ 것에 가깝다. 북한은 탈북자들에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돌아와 자수하면 용서하고 환영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볼모로 협박해 재입북을 유도하기도 한다.

박인숙씨도 평양에 거주하던 아들이 지방으로 쫓겨가면서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에서 생활고를 겪던 박씨도 결국 북한의 회유책에 넘어갔다. 박씨는 입북 수개월 전부터 거주하던 집을 처분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국가보위부 등 북한 당국과도 연락하면서 ‘입국 시기’도 조율했다. 그는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탈북자 중에는 ‘탈북-재입북-탈북’을 반복한 영화 같은 삶을 산 사람들도 있다. 유태준씨(44)와 남수씨(55)가 여기에 속한다. 이 중 유씨는 탈북자 중 ‘재입북 1호’이다. 북한 함흥 석탄판매소 판매지도원으로 일하던 유씨는 1998년 11월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이듬해인 12월에 남한에 들어와 대구에 정착해 살았다.

하지만 그는 탈북 2년째인 2000년 6월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재입북을 감행한다. 그가 선택한 입북 루트는 ‘두만강 도강’이다. 유씨는 항공편을 이용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북한 초소 경비병에게 중국 돈 4백 위안을 뇌물로 주고 두만강을 건넜다. 함경북도 무산에 도착한 후에는 다시 뇌물을 주고 위장 신분증도 빌렸다.

하지만 유씨는 입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보위부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는 ‘조국 반역죄 및 국경 월경죄’로 3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약 1년 정도 교화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석방되었고, 노동자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유씨는 2001년 11월 감시가 소홀해지자 걸어서 사업소를 탈출한 뒤 압록강을 건넜다.

‘재입북 2호’는 남수씨이다. 남씨는 유태준씨보다 한 달 정도 늦게 입북했다. 그는 북한군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1995년 4월에 탈북해 이듬해 1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남씨는 5년만인 2000년 8월 돌연 북한으로 돌아갔다. 유씨처럼 북한에 두고 온 가족 때문이다. 남씨는 원래 직접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들어간 후 밤 사이에 가족을 데려오려고 했다. 이를 위해 탈출 비용으로 7천만원을 마련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탈출 후 사용하기 위해 두만강 중국 쪽에 5천만원을 따로 묻어두었다. 나머지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자신이 소지했다.

그런데 남씨는 자연적인 한계에 부딪쳤다. 때마침 장마철이어서 두만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물살이 너무 셌다. 도강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남씨는 당초 계획했던 ‘비밀 입북’을 포기하고, 합법적으로 북한에 들어가기로 했다.

베이징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 가서 ‘입북 의사’를 비쳤더니 며칠 후 북한에서 네 명이 데리러 왔다. 이들의 신원은 ‘국가보위부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 그해 8월8일 순안공항을 통해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는 많은 환영 인파가 나와 있었고, 꽃다발도 받았다.

그 뒤 남씨는 남한 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우월성에 대한 선전 사업에 투입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고급 휴양시설의 총괄지배인(사장)이라는 일자리도 받았다. 헤어졌던 가족들과도 만났지만 ‘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의  곁에는 늘 감시자가 따라다녔다.

그러던 2003년 6월 남씨는 다시 한번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으로 공사 자재를 보러 간다고 출장 신청을 하고, 가족들과 베이징까지 나왔다. 남씨의 아내는 도중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남씨의 아내는 북한에서 5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2009년에 탈출해 남한으로 들어왔다.

국경 경비 강화돼 ‘도강 루트’는 위험천만

1996년 자전거 고무 튜브를 몸에 둘둘 말고 예성강을 건넜던 최승찬씨(44)도 고향에 남겨둔 가족을 탈북시키기 위해 2004년 1월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국가보위부에 자수한 뒤 가족들과 만나 북한에 정착했다. 앞의 세 사람은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혈혈단신 북한으로 들어간 경우이다.

이들은 재입북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넜다. 하지만 ‘도강 루트’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북한 당국에 붙잡히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게 된다.

한 탈북 브로커는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후에 국경 경비가 강화되었고, 경비 요원들도 다 바뀌었다. 지금 강을 건너 몰래 들어가면 붙잡히기 십상이다. 잘못하면 총알 세례를 받고 처참하게 죽는다. 만약 잡히면 ‘재탈북’은 사실상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재입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탈북자들의 범법 행위가 뚜렷하지 않는 이상 여권을 가지고 중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중국에 들어간 탈북자들 개개인을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보니 중국에서 북한측 요원들과 접촉하거나 영사관 등을 통해 쉽게 입북할 수가 있다. 앞으로도 탈북자들의 주요 입북 루트는 중국 입국-북한 요원들과 접촉-영사관에 입북 의사 전달-평양 입국 등이 주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에 대한 관리는 관할 경찰서에서 맡고 있다. 보통 보안과 형사 한 명이 관리하는 탈북자는 50~70명에 이른다. 이들을 일일이 챙길 수가 없는 형편이다. 또 탈북자라고 해서 결격 사유가 없는데 해외여행을 제한할 수도 없다.

서울 일선 경찰서의 한 보안과 형사는 “탈북자들이 국내에 입국하던 초창기에는 보안과 형사들이 감시자 역할도 하고 보호자 역할도 했다. 지금은 탈북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생활을 간섭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싫어한다. 이런 현장 상황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강조했다.

한창권 탈북인단체총연합 회장은 “탈북자의 재입북은 막을 수가 없다. 지금은 무방비 상태이다. 탈북자들이 한곳에 뭉치게끔 하면 통제도 되고 정보도 알 수 있다. 탈북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탈북자들의 재입북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기밀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남한의 주요 시설물, 군사 시설물, 탈북자 명부 유출, 합동심문조의 수사 기법과 요원들의 신상 유출 등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에서 북한 전문가로 활동해온 한 대북 전문가는 “북한에서 탈북자의 가족을 협박하고 ‘네가 오면 살려 준다’고 하는데 안 갈 수가 없다. 탈북자 중에는 북한의 유인책에 속아 중국이나 제3국에서 포섭되어 ‘이중 간첩’이 되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이런 식으로 남남(南南) 갈등을 조장하려는 노림수도 있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알 수 있는 기밀이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의 것들이다. 중요한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는 크지 않다고 본다. 다만 탈북자 심문 기법 등을 꾸준하게 새로 도입해서 역이용당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재입북자들, 북한에서 정말 호사 누릴까  

북한은 탈북자들을 체제 선전에 역이용하고 있다. 탈북자는 철저하게 막지만, 재입북자는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당비를 가져오거나 고급 정보를 가져오는 탈북자에게는 노동당 입당이나 ‘좋은 자리’를 보장해주기도 한다. 실제 탈북자들에 따르면 5만 달러(약 6천만원) 정도를 당에 바치면 탈북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탈북자들은 재입북에 앞서 남한에 있는 재산을 먼저 정리한다. 집을 팔고, 전세금을 빼고, 은행에 저축한 돈을 찾아서 ‘목돈’을 챙긴다. 그런 다음 중국으로 건너가서 북한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재입북자에 대해서는 ‘가족과 잘 살고 있다’라는 말이 들린다.

그렇다면 모든 재입북자가 환영받는 것일까.

한창권 탈북인단체총연합 회장은 ‘시한부 호사’라고 주장한다. 그는 “북한의 사탕발림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동안 수많은 탈북자가 재입북했지만 모두 기자회견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재입북자 중에서 선별해서 이용할 뿐이다. 겉으로는 잘 대해주는 척하지만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버린다. 평생 감시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박인숙씨나 전영철씨가 TV에 나온 모습을 보았는데,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다. 얼마나 두렵고 겁이 나면 그런 표정을 짓는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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