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에 낀 기름 덩어리들
  • 안동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 승인 2012.08.12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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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갈 일이 있어 차를 몰고 학교를 나섰다. 도중에 구청 건물 옆에 정차하게 되었다. 새로 지은 구청 건물이 커다란 초록색 유리 상자처럼 보인다.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 옆쪽으로 10년 전 특혜 분양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던 고층의 아파트단지가 보이더니 뒤이어 또 다른 초록색 유리 상자 위에 선명한 IT 기업 로고가 눈에 띈다. 낙동강을 건너니 다리 옆 준설토가 눈에 들어왔다.

일을 마치고 같은 동선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등심에 얼기설기 낀 기름 덩어리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블링에는 좋지만 건강에는 좋지 않은. 지방 및 중앙 정부, 공공 기관, 가계, 기업을 총망라해 모든 경제 주체가 과거 10년 동안 저렇게 경제에 기름 덩어리를 남겼구나. 저 기름 덩어리들은 겁 없이 부채를 너무 많이 섭취한 결과물이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기업 부채가 1백7%로 가파르게 상승하는 와중에 최근에는 기업 대출 연체율이 1.7%로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우리 경제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가계 부채는 최근 불황형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GDP 대비 89% 수준으로 한계치에 근접했다. 4백20조원 규모의 국가 부채는 GDP 대비 33%로 양호한 수준처럼 보이지만 공공 기관 부채가 4백63.5조원으로 국가 채무를 추월했다. 지방 정부의 부채는 지난해 8천3백15억원이 감소하면서 증가세가 주춤했으나 반대로 지방 공기업 채무가 49조4천2백95억원으로 급증하고 있다.

지난 2003년 이후 경제 주체들이 앞다투어 레버리지를 통해 무리한 투자를 한 후유증이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인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워낙 단기간에 충격이 컸기 때문에 기저 효과로 반등의 세기도 강했다. 우리 경제의 경우 그나마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 전체의 레버리지 정도가 낮은 데다 부동산 침체를 동반하지 않아서 회복도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유럽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 하락이 본격화되면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보다 양호하다고 안심했던 레버리지 수준마저 더는 안전한 상황이 아니게 되었고, 이제 중소기업과 가계 부문을 필두로 디레버리징이 시작되고 있다.

디레버리징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불황기에 한계에 부딪혀 비자발적으로 디레버리징을 하는 경우 경제는 더 침체에 빠지고 이는 곧 다시 디레버리징을 부추기게 되는 악순환을 말한다. 경기가 호황일 때 미리 군살을 뺐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흘러간 옛 노래이다.

현재 세계 경제는 시계 제로의 형국이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견조하다고 하지만, 글로벌 경제 4대축의 하나인 유럽이 본격적으로 회복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 경제 전망은 암울하다. 개별 경제 주체 입장에서는 위험 관리를 위해 디레버리징이 필요하지만, 거시 경제 측면에서 보면 성장을 위해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애초에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맞춘 문제로 잉태되니 현재의 역설적 상황을 타개할 명확한 해답은 없다. 다만 외부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 부문은 디레버리징을 통해 위험 관리를 하고 정부 부문은 재정 지출 확대를 통해 경기 추락 속도를 제어하며 반등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유산소 운동을 통해 기름기를 빼고 근육 운동을 통해 근력도 키워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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