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왕’의 글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8.12 01: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종의 시문 / 이성계와 함께 지은 연시 ‘밤 깊어 삼경인데도 흥은 다하지 않누나’ 한 구절만 남겨

강원도 영월읍 정양리에 있는 정종대왕 태실비. ⓒ 연합뉴스

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왕이 있다. 정종이다. 이름은 경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로, 고려 말인 1389년(창왕 원년) 7월에 절제사 유만수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고, 1390년(공양왕 원년) 6월에는 지밀직사사 윤사덕과 함께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격파하는 등 무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 후에는 의흥친군위절제사로서, 다시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서 병권에 관여했다. 그런데 1398년 8월 정안군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초 그는 정안군의 공로를 생각해 세자가 되려 하지 않았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되었다.

정종이 남긴 유일한 시문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지은 연구(聯句) 한 구절이다. 즉위한 2년(1400년) 9월에 정종은 이미 세자로 결정되어 있던 이방원과 함께 덕수궁으로 상왕인 부친을 찾아뵙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태조 이성계가  ‘年雖七十心相應(연수칠십심상응)’의 구를 읊었다. “나이 들어 칠십인데 마음이 통하는구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정종은 다음 구를 읊었다. ‘夜已三更興不窮(야이삼경흥불궁)’. ‘밤 깊어 삼경인데도 흥은 다하지 않습니다’라는 뜻이니, 마냥 흥겹기만 하다고 소회를 밝힌 것이다. 이 시구는 정종이 남긴 유일한 한시의 구절이다.

연구 가운데서도 2구로 이루어진 연구는 압운을 할 필요가 없다. 뜻이 통하기만 하는 두 구절을 두 사람이 각각 한 구절씩 주고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그해 6월에 정종은 상왕을 위해 태상궁과 태상부를 설치하고 궁은 덕수궁으로 정했다. 태상부의 이름은 승녕부로 했다. 7월에는 태상왕(태조)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존호를 올렸다. 승녕부는 1408년(태종 8년) 5월에 이르러 태조가 죽은 뒤 전농시에 합쳐진다.

실권은 이방원에게 넘긴 채 격구에 빠져

전통 무예인 격구를 재현한 모습. ⓒ 시사저널 사진 자료
정종은 국왕이었지만 태상왕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실권은 동궁인 이방원에게 거의 넘겨주었다. 정종은 동궁에게 군사권을 넘겨서 감무(監撫)의 직임을 맡겼으나 궁중에 친위 군사를 두려 했다. 하지만 성균 학정의 벼슬이던 정이오는 상소해 “전하께서 동궁에게 감무하는 직임을 맡게 하고서 궁중에다 별도로 삼군부를 설치해 갑사를 많이 양성하시니, 동궁이 감무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궁중의 갑사를 혁파하소서”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정종은 “정이오의 말이 내 뜻에 맞는다”라고 하고, 곧바로 진무소의 갑사를 혁파하고 갑옷과 의장을 모두 삼군부로 보냈으며, 잠저 때 휘하에 있었던 100명만 머물러 두어야 했다.

<정종실록>을 보면, 정종 원년(1399년) 8월4일(신축)의 조항에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이 나온다. ‘조온(趙溫), 정남진(鄭南晉), 조진(趙珍)이 날마다 모시고 격구(擊毬)를 했으므로, 각각 말 1필을 하사했다.’

격구는 타구, 포구, 봉구, 격봉, 봉희라고도 한다. 붉은 옻칠을 한 나무 공이나 수놓은 비단 공을 쳐서 장시(杖匙)로 문을 통과시키거나 작은 구멍에 넣는 무예 경기이다. 장시는 1m가량의 긴 대병부 끝에 가운데가 뚫린 타원형 고리시부를 붙인 형태이다. 격구는 페르시아에서 인도와 중국으로 전파되어, 당나라를 통해 발해와 후삼국에 유입되었다. 고려 태조 2년에 발해 사신 아자개의 환영식을 격구장에서 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의종도 격구에 능했으며, 무신정권 때 무관들도 격구를 즐겼다. 고려 말에는 단오절에 왕이 참관하는 격구 대회를 열었다. 

정종이 함께 격구를 즐긴 조온(1347~ 1417년)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던 조인벽(趙仁壁)의 아들이다. 조인벽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조온이고 둘째가 우의정을 지내게 되는 조위이다. 조온은 고려 말 이성계의 신진 세력에 참여해 조선 개국 후 개국 공신 2등에 책록되고, 한천군에 봉해졌다. 1398년 무인난(제1차 왕자의 난) 때 친군위도진무로서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무인난은 태조의 계비 강씨에게서 태어난 이방석 일파와 태조의 초비 한씨에게서 태어난 이방원 일파가 정권을 다툰 싸움이다. 이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 공신이 29명이었다. 이를 두 등급으로 나누어 1등공신 12명, 2등공신 17명을 정했는데, 조온은 2등공신의 특전을 얻었다.

한시를 잘 지을 줄 몰랐던 왕

정종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몇몇 시도를 했다. 즉위년인 1398년에 정종은 조정 신료들이 세력가에 들러붙는 것을 막기 위해 분경(奔競) 금지법을 제정했으며, 족친 및 권력가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해 서적의 수장과 경전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고, 5월에는 태조 때 조준 등이 편찬한 <향약집성방>(<향약제생집성방>)을 강원도에서 간행하게 했다. 1400년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해 노비에 관한 쟁송(爭訟)을 관할하게 했다. 다만 이 정책들은 대개 정안대군(훗날의 태종, 이방원)이 계획하고 추진한 것들이라고도 한다.

실상, 정종은 격구를 즐기는 등 정무와 관계없는 활동에 마음을 두었다. 정종 원년(1399년) 1월19일(경인)의 <실록> 기록을 보면, 경연에서 <논어>의 절요(節要)를 읽은 후 조박(趙璞)이 이렇게 아뢰었다.

<논어> 한 책은 모두 성인의 말씀입니다. 전하께서 날마다 숙독하셔서 성인을 본받으시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사온데,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옛날 송나라 정승 조보(趙普)가 평일에 읽던 글이 오직 한 질뿐이었는데, 죽은 뒤에야 사람들이 그 책이 <논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근일에 전하께서 항상 격구로 낙을 삼고 계십니다. 군주는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려 가지는 것이 크므로, 아주 짧은 사이라도 게을리하고 소홀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유희에 빠질 여유가 있겠습니까?

이해 여름에 정종은 병을 앓았으나, 건강이 회복된 뒤 8월29일(병인)에 격구를 했다. 10월13일(기유)에는 안개가 끼었지만 격구를 했다. 정종 2년(1400년) 10월3일(갑오)에도 격구를 했다.

정종은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양위한 뒤에는 상왕으로서 인덕궁에 거처하면서 격구, 사냥, 온천, 연회를 더욱 즐겼다. 세종 원년(1419년) 9월에 승하한 그는, 12월에 온인공용 순효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듬해 4월에는 공정(恭靖)의 시호가 더해져 공정온인 순효대왕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숙종 7년(1681년)에 이르러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厚陵)이다.

정종은 국왕으로서의 권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문치 시대의 국왕에게 요구되는 교양이 부족했다. 제왕학의 수업을 받지 않은 채 국왕의 자리에 있어야 했기에, 재위 기간 내내 큰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한시를 잘 지을 줄 몰랐으므로 문신들을 대하면 늘 마음이 불편했을 듯하다. ‘밤 깊어 삼경인데도 흥은 다하지 않누나’라는 외마디의 시구만을, 그는 우리에게 남겼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시사저널 인기 기사]

[2012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20년 만에 일어난 대이변 ‘미래 권력’이 ‘현재 권력’ 눌렀다

[2012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박근혜, 당선 가능성 50%대 선두

[2012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손석희 교수, “정권과 미디어는 늘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다”

[2012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이외수 작가, “대선 전 결정적 한 방 날릴 준비 하고 있다”

‘아동 포르노’ 절반 이상이 국내 청소년 ‘작품’

이명박 정부 5년간 서민 삶은 ‘팍팍’해져도 슈퍼리치는 배불렸다

고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마지막 인터뷰'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