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과 ‘조작’ 사이 줄 타는 유럽중앙은행
  • 조명진│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2.08.12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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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총재의 채권 매입 재개 발언에도 시장 ‘시큰둥’정치적 이해관계로 독립성 보장 못 받는 것이 한계

지난 8월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기자회견 도중 눈을 감고 있다. ⓒ EPA 연합

이탈리아 중앙은행장 출신의 드라기는 2011년 11월부터 유럽중앙은행(ECB)의 세 번째 총재직을 맡았다. 이탈리아의 재정 적자가 심각하기에 출신 국가를 도와야 되는 처지였다. 그래서 일부러 운신의 폭을 좁게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며 총재직을 맡았다. 실제로 드라기 총재가 취임한 직후 독일 중앙은행의 바이드만 총재는 정부 재정을 돕기 위해 중앙은행이 관여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채권 시장에 대해 압력을 가함으로써 드라기 총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코노미스트> 8월3일자에 따르면, 드라기 총재는 유로존 국가 중에 구제 자금이 필요한 회원국이 개혁 조치에 순응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ECB가 채권 매입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 7월 런던에서 열린 투자자들을 위한 모임에서 “ECB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할 태세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결연한 드라기 총재의 발언에도 시장의 반응은 드라기 총재가 유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걱정을 드러내고 있다. 드라기 총재의 조치가 투자자들이 바라는 만큼 즉각적이고 대규모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설립 초기에 권위 인정받았던 ECB의 변화

그러나 ECB가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유로존 회원국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무한정의 금액을 조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CB는 발권 은행으로서 막대한 액수의 돈을 발행하는 잠재 능력과 가격 안정을 유지해야 하는 한정된 법적 위임권 사이에 균형 있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ECB는 채권 국가와 채무 국가 간의 갈등 그리고 개혁을 단행하는 국가들에 대한 시장 압력과 채무 불이행을 막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입장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드라기 총재가 두 가지 모럴 헤저드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이탈리아같이 국가의 개혁을 추진하게 하는 리스크이다. 둘째는 ECB의 장부에 모든 리스크를 감춤으로써 채권자들에게 더 부담을 나눌 필요가 없음을 유도해야 하는 위험이다.

베룰루스코니 총리 시절의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ECB는 직접적으로 경제 개혁을 강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드라기 총재는 자신의 정책은 파산한 정부에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통화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1998년 설립된 ECB는 초기에는 권위를 인정받았다. 다니엘 엑케르트는 저서 <화폐 트라우마>에서 이를 두고 “유럽중앙은행은 여러 측면에서 독일연방은행의 합당한 후계자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독일연방은행을 모범으로 삼아 만들어진 유럽중앙은행은 제도적으로 독일연방은행보다 한층 더 강한 정치적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었다”라고 평가했었다. 덧붙여 이러한 정치적 독립성을 유럽중앙은행의 2대 총재인 장 클로드 트리셰의 노련함 덕분이었다고 치켜세운 바 있다.

트리셰 총재는 세계의 모든 발권 은행 총재들 가운데 가장 결연한 태도로 안정적인 화폐를 옹호했다. 2008년만 하더라도 그는 금융 위기가 긴박한 단계로 치달을 때까지 원자재 가격 폭등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 위험을 억제하기 위해서 기준 금리를 올렸다. 그리고 금융 위기가 계속 진행되던 와중에도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와 일본 은행이 실행한 양적 완화 정책을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ECB는 나중에야 비로소 다소 약화된 형태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때도 유럽중앙은행이 매입한 것은 국채가 아니라 저당 채권이었다.

정부 채권을 직접 매입하는 행위는 대체로 문제의 소지가 많은 일로 간주된다. 발권 은행이 국채를 매입하면 잠재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 찍어낸 돈으로 채권값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돈을 빨아들일 상품과 서비스의 양이 늘어나지 않은 채로 통화량만 늘어난다. 그럼에도 다수의 경제학자는 한 나라의 경제가 병들 경우, 불황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특별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트리셰 총재가 이끄는 ECB는 오랫동안 일본과 미국이 걸어간 길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이런 사실은 ECB의 강인함을 알리는 징표로 해석되었다. 2009년까지 ECB는 깨끗하고 원칙에 충실한 발권 은행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10년에 접어들자 유럽중앙은행은 단 몇 달 만에 수년 동안 고수해온 입장에 등을 돌렸고, 이로 인해 10년 동안 쌓아온 신뢰를 상실해버렸다는 것이 엑케르트의 평가이다.

ECB의 독립성을 흔드는 것들

이런 행동은 ECB 총재가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 국채 취급 방식이 그 한 예이다.  그리스가 담보에 대한 최소한의 안정성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데도 과연 유럽의 은행들이 계속해서 그리스 국채를 ECB의 대출 담보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2010년 1월만 하더라도 트리셰 전 총재는 그리스를 위한 특별 규정을 거부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넉 달도 지나지 않아 이 말은 번복되었다. 그해 5월3일에 트리셰 총재는 그리스 채권의 등급에 상관없이, 설령 그것이 정크본드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담보로 받아들일 것임을 천명했다.

그것은 ECB와 독일연방은행의 전통에 대한 극단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변덕스런 행동은 ECB가 정치권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시장 떠받치기 조치의 최대 수혜자는 약 8백억 유로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은행들이었다. 그것은 독일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양의 두 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게다가 ECB의 독립성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재임 시절에 문제가 된 바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ECB에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을 도모한다는 명분하에 이자율을 책정하는 데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시도했고, 결국 2011년 4월 ECB가 처음으로 이자율을 1%에서 1.25%로, 그리고 같은 해 7월에 다시 추가로 1.50% 상향 조정하게 했다.

프랑스는, ECB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으므로 ECB 총재는 프랑스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가 반대하면서 초대 총재는 네덜란드 중앙은행장을 역임했던 두이센버그 총재가 맡았다. 그리고 두 번째 총재직은 프랑스 중앙은행장 출신인 트리셰가 맡았다. 중요한 사안들이 독일의 입장에 따라 좌우됨으로써 ECB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로 위기 해결의 실마리는 ECB가 아닌 독일과 프랑스의 정책 방향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바이드만 총재와 드라기 총재가 의견을 모으는 부분은 ECB가 정부의 채권을 구매하는 데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ECB가 스페인 국채 매입에 나서지 않아서 스페인 정부의 불만을 사고 있다.

엑케르트는 <화폐 트라우마>에서 “1970년대에 정치권과 결탁해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장본인도 지나치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취했던 각국의 중앙은행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조정’과 ‘조작’의 범주를 생각해보게 된다. 조정과 조작의 공통점은 인위적이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조정은 적법성을 띤 정부 기관의 인위적 조치이고, 조작은 주로 정부 밖의 시장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1990대 이래로 환율 전쟁과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각국 중앙은행들의 이자율 산정도 인위적이라는 점에서 조작 가능성의 여지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정부가 아니라, 그 반대일 경우가 더욱 비일비재한 현상을 보면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이미 깊숙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CB도 정치권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시장 세력의 입김으로부터 더는 무풍지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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