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하나로 가난의 도마를 넘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2.08.12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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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선수 가족의 삶 / 한국 빈곤층이 겪는 여러 아픔 고스란히 담겨 있어

런던올림픽 체조 도마 부문 결선 때 보여준 양학선 선수의 2차 시기 도약을 순간 동작으로 나타낸 모습. ⓒ 연합뉴스

양학선 선수가 남자 도마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체조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한국 체육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눈길이 양선수에게 쏠렸다. 특히 양선수의 집이 비닐하우스 단칸방임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관심은 폭발했다. 그가 획득한 금메달은 곧 불우한 가정 환경을 뚫고 피어난 ‘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8월9일, <시사저널> 취재진은 전북 고창의 양학선 선수 집을 찾았다. 집에는 양선수의 아버지 양관권씨(53)만 있었다. 당초 함께 취재진을 만날 예정이던 어머니 기숙향씨(43)는 급히 병원에 간 상태였다. 며칠 사이에 벌어진 ‘소동’으로 인해 평소 앓던 지병이 심해진 탓이다. 아들의 금메달이 가져다준 흥분과 스트레스 때문에 부부는 며칠째 밤잠도 편히 못 이루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좀처럼 웃는 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연신 큰 웃음을 지었다. 양선수를 언급하는 말투에서도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불운했던 가족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서는 진한 회한이 느껴지기도 했다. 양선수 가족의 삶에는, 한국 사회에서 빈곤층으로 살며 겪어야만 하는 여러 아픔이 담겨 있었다.

건설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끝없는 고난

양선수의 부모는 이 땅에 서울올림픽의 흥분이 한창이던 지난 1988년, 광주광역시 유덕동에 신접살림을 꾸렸다. 전세 3백만원짜리 셋방이 첫 보금자리였다. 아버지 양씨는 건설 현장에서 미장이로 일했다. 어머니 기씨는 전자 공장의 노동자였다. 두 사람은 열심히 일했지만 돈은 쉽사리 모이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이 지난 1992년, 동네가 재개발 지구로 묶였다. 하루아침에 집이 뜯겼다. 양씨 가족은 졸지에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집을 잃은 대가로 받은 보상금 5백만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전세금 3백만원과 합해 광주 광천동에 새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역시나 단칸방이었다.

그래도 1990년대 중반 무렵에는 양씨의 일이 잘 풀렸다. 건설 경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여러 곳의 현장을 누볐다. 그는 어느새 건설 현장의 중간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일곱 명의 노동자가 그의 휘하에 있었다. 이들과 함께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가혹한 노동량이었다. 그래도 돈이 잘 벌리니 힘든 줄도 몰랐다. 오히려 사는 재미를 느낄 정도였다. 공장에 다니던 아내 기씨가 지병 탓에 일을 그만두었음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7년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는 양씨가 겨우 모은 재산을 앗아갔다. 건설업체가 줄줄이 도산하면서, 그가 응당 받았어야 할 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간 책임자인 아버지는 자신의 돈으로 모든 손해를 메워야 했다. 전세방마저 빼 돈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겨우 친구의 도움을 얻어, 광주 월산동의 한 허름한 방을 고쳐 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씨의 허리가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허리 통증은 대다수 미장이가 앓는 직업병이다. 불편한 자세로 육체를 혹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창 돈이 벌릴 때 엄청난 노동량을 소화했던 탓에 양씨의 허리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병원에서 더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버는 돈에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었다.

양씨는 가족들 몰래 진통제를 가지고 다녔다. 일을 하기 전에 두 알씩 삼키고 노동을 했다. 때로 고통이 너무 심할 때면 세  알씩 삼켰다. 약효가 돌기 시작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해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어지러운 몸을 어떻게든 추슬러 일을 했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쥔 돈은 턱없이 적었다. 공사의 대가로 지불되는 수십억 원은, 위에서부터 몇 단계를 거치고 나면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맨 아래의 건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매우 적었다. 그런 돈만으로는 사회적 하층 계급을 벗어날 수 없었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지난 2000년, 건설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오른쪽 어깨의 인대가 끊어졌다. 양씨는 산업 재해라고 주장하며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어렵게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수술비로 썼다.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생계를 꾸렸다. 야간 일용직으로 일하며 매달 55만~60만원 상당을 벌었다. 생계가 유지될 리 없었다. 아버지는 안 되겠다 싶어 무리해서 근육을 썼다.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을 참아가며 재활을 재촉했다.

오른쪽 어깨를 다친 양씨는 과거처럼 미장 업무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은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건설 현장을 맴돌며 온갖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 회복되었던 인대는 완전히 손상되고 말았다.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일을 계속하려 했지만 어깨와 허리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못 견딜 정도로 아프면 그만두고, 다시 움직일 만하면 건설 현장에 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버지 “가족의 보금자리, 내 손으로 짓겠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에 있는 양학선 선수의 비닐하우스집과 양학선 선수의 가족사진(작은 사진). ⓒ 시사저널 전영기
가족의 생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씨는 신체적인 고통만큼이나 심적 고통도 컸다. 특히 고생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자 우울증마저 생겼다. 그래도 아버지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고통들을 견뎌나갔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돈이다.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은 부자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자식들도 잘 크고 있지 않나. 내 마음이 깨끗하다면 언젠가 복이 올 것이다”라고 되뇌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두 아들은 양씨 부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구김살 없이 자라 부모를 기쁘게 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둘째 양학선 선수는 가족의 자랑이었다. 양선수는 효자였다. 다른 선수들이 부모님이 경기장을 찾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음에도 양선수는 달랐다. “가족들이 봐줘야 힘이 난다”라며 살갑게 매달렸다. 그렇게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는 어김없이 최고의 성적을 내곤 했다. 활달하고 넉살 좋은 양선수로부터 부모님은 큰 위안을 얻었다. 양선수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도 결과를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안 되면 말지, 어쩌겠소”라며 호기롭게 대꾸했다고 한다. 이렇듯 두둑한 배짱을 바탕으로, 양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부모님께 선물했다.

현재 양선수를 향해서는 CF 출연 요청, 각종 협찬 및 후원 제의 등이 쇄도하고 있다. 양선수 가족이 ‘인생 역전’을 맞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가족들은 달콤한 제안들에 휩쓸리지 않으려 한다. 가족들의 꿈은 소박하다. 당장은 지금 머무르고 있는 동네에 네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특히 아버지 양씨가 손수 집을 지으려 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혹사시켜야 했던 바로 그 육체로, 아버지는 마지막 건설 노동을 준비하고 있다.

양선수의 올림픽 금메달은 그의 부모에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양선수의 아버지는 “고통이 심해지면 말을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그럴 때면, 언젠가 하늘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학선이처럼 나도 하늘을 훨훨 날아가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양선수의 어머니도 “학선이가 뜀틀에서 뛰어오르면 화려한 꽃이 하늘에서 나는 것 같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 부모님을 대신해, 양학선 선수는 런던의 하늘을 날았다. 삶의 거친 풍파를 헤쳐온 부모님의 가슴에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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