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은 과연 <하여가> 읊었을까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8.2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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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시문 ② / 광해군 때의 <해동악부>에 기록…<열성어제>에는 없어

고려 말에 정몽주가 태종 이방원의 군사에 의해 피격당한 장소로 알려진 개성의 선죽교. ⓒ 연합뉴스

조선 광해군 때 심광세(沈光世)는 신라, 고려, 조선 초의 역사 속에서 노래와 관련이 있는 사실 44편을 뽑아 그 각각을 설명하는 해설과 시를 연작했다. <해동악부>라고 한다. 심광세는 교리로 있을 때 계축옥사에 걸려 경상도 고성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때 이 노래집을 엮고, 광해군 9년(1617)에 출판했다. 이 노래집 속에서 심광세는 고려 말 이방원이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노래했다는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가 절의의 뜻을 드러낸 <단심가(丹心歌)>를 다루었다. 

조선 후기 시조에서는 일부 구절 바뀌어

심광세는 두 노래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개 우리가 아는 내용이다.  

‘고려 말에 정몽주는 임금을 도와서 큰일을 할 만한 인재였다. 이성계가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여러 번 막하로 불렀다. 위화도 회군 뒤에는 이성계와 함께 승진하게 하여 재상이 되었다. 정몽주는 김진양 등과 함께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 하였다. 그때 이성계의 공적은 날로 왕성해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자 정몽주는 이성계를 꺾을 계책을 세웠다. 이방원은 부친(이성계)에게 아뢰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저버리겠습니까?” 했다. 이성계는, “우리가 무고한 모함을 받게 되면 정몽주는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를 변명해주겠지만, 만약 나라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정몽주의 의지가 더욱 드러나자 이방원은 잔치를 베풀어 그를 초청하고, 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며 <하여가>를 불렀다.

이런들 어떠하리 此亦何如
저런들 어떠하리 彼亦何如
성황당 뒷담이 城隍堂後垣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頹落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하여 我輩若此爲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 不死亦何如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를 부르면서 술잔을 보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 죽어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向主一片丹心
어찌 가실 줄이 있으랴 寧有改理也歟

이방원은 정몽주의 뜻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제거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이성계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에 병문안을 가서 그 기색을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해를 입게 된다.

조선 후기의 가집(歌集)에는 이방원의 <하여가>가 시조 형식으로 채록되어 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도 시조 형식으로 전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는 노래 가사나 시조 형식이 일찍부터 고정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하여가>는 다르다. 심광세가 전한 한자 시의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라는 표현보다는 조선 후기 시조의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라는 표현이 더 뜻이 깊고, 또 어찌 보면 질척질척한 듯도 하다. 그런데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다는 것은 한 왕조가 망해 그 왕조가 신앙하던 사당이 폐기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다. 곧,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라는 말은 “지금 왕조가 망하여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다고 해도 우리는 이같이 즐겁게 지내어 아니 죽으면 어떠한가!”라고 반문하는 뜻이다. 성황당은 사직(社稷)을 은유한다. 심광세의 한자 시에서는 ‘이같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상황이 문면에 나와 있지 않다. 반면에 시조 <하여가>에서 ‘이같이’는 중장의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자 시의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라는 말은 상대방(정몽주)의 순절을 예견하고 저지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한자 시 <하여가>는 확실히 정몽주의 <단심가>가 있고 나서 만들어진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정몽주의 <단심가>와 등치해 실은 까닭은?

‘이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태종의 를 수록한 심광세의 와 조선 국왕들의 시문을 모은 .
문득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방원이 과연 잔치를 열고 정몽주를 오라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방원이 아무리 살육을 저지르고 국왕에 오른 사람이라 해도 고려 말에 그는 유학을 익힌 지식인이었다. 단순한 무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부친과 동렬의 재상을 함부로 사저에 초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1367년생, 정몽주는 1337년생이니, 이방원은 정몽주보다 서른 살이나 어리다.

어쩌면 <단심가>는 정몽주의 평소 소신을 노래한 것이었고, <하여가>는 훗날 하나의 전설이 만들어지면서 덧붙여진 것은 아니었을까. 20대의 이방원은 마치 달관한 노인처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노래하고, 50대 말의 정몽주는 이념에 온몸을 사르는 젊은이처럼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노래하다니!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 사림파는 도통(道統)의 설을 제기해 정몽주를 자신들의 선현으로 추앙하고, 문묘에 종사(從祀)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정몽주는 중종 12년(1517)에 문묘에 배향된다. 이로써 정몽주는 참된 유학자라는 공론이 굳어졌다. 심광세가 <해동악부>에서 <하여가>와 <단심가>를 다루어 정몽주가 이방원의 설득에 응하지 않은 절의를 표방한 것은 조선 지식인들의 지향 의식을 반영한다.

그런데 심광세는 정몽주의 임종에 관해 두 가지 일화를 덧붙였다.

‘이성계의 집에서 나온 정몽주는 술친구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인은 외출하고 뜰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곧장 들어가 술을 청하여 마시고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오늘은 날씨가 몹시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몇 대접의 술을 마시고 나왔다. 그 집 사람이 이상히 여겼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에서 돌아올 적에 그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활을 멘 무부가 있었다. 정몽주가 자신을 모시고 따라온 녹사를 돌아보며, “너는 뒤로 물러나라” 했다. 녹사가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자, 정몽주는 재삼 꾸짖었다. 하지만 녹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정몽주가 살해당할 적에 서로 끌어안고 함께 죽었다. 창졸간에 그의 성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마침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심광세는 정몽주의 기개와 절의를 더욱 현양하기 위해 이런 일화들을 첨부했다. 그런데  그는 바로 이방원의 <하여가>를 정몽주의 <단심가>에 등치함으로써, 태종 이방원의 기개와 포부도 함께 현양하고자 한 것이다. 이방원은 과연 정몽주를 불러다놓고 <하여가>를 불렀을까? 조선 국왕의 시문들을 모아둔 <열성어제>에는 <하여가>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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