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라는 일은 미쳐야 살아남는 직업”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8.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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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버지> 주연 맡은 이순재씨 인터뷰

ⓒ 시사저널 박은숙
연극 <아버지>(세일즈맨의 죽음) 주연(9월7~30일), 9월 말 방송 예정인 MBC 월화드라마 <마의> 촬영, 10월13일부터 방송되는 jtbc의 주말극 <무자식 상팔자> 촬영, 9월1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하얀 중립국>(서울대 연극동문회) 조연. 엄청난 스케줄이다. 이런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1935년생으로 올해 78세인 배우 이순재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활동량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신체적 나이와는 무관하다는 듯 캐릭터의 폭과 출연 작품이 더 늘어나고 있다. 이순재를 만나기 위해 재공연을 앞둔 연극 <아버지>의 연습장을 찾았다. 문화부장관을 지낸 김명곤씨가 아더 밀러의 희곡을 한국적으로 각색하고 직접 연출을 한 이 작품은 지난 4월 한 달 가까이 진행된 공연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949년 미국에서 발표된 현대의 고전이지만 김명곤은 요즘의 한국 상황, 베이비부머 세대 은퇴자들의 상황과 맞물리게 각색했다.

문제는 두 시간짜리 무대에서의 엄청난 대사량과 노동을 78세의 육체가 감당하느냐의 여부이다. 한마디로 기우였다. 이순재는 한 시간 반 동안의 리허설을 끝내고 바로 이어진 두 시간여에 걸친 인터뷰에서도 힘이 넘쳐났다.

“아무래도 한창 때보다는 근력이 떨어지지만 평생 해왔던 직업이고 크게 데미지를 입은 적이 없기에 그런대로 힘을 내서 유지하고 있다. 특별히 정기적으로 하는 운동도 없다. 늘그막에 골프나 가끔 치는 것 말고는 헬스클럽도 안 간다. 대사를 외우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지난 4월에 한 번 했던 것이라 기억을 되살리면 문제가 없다. <하얀 중립국>은 50마디도 안 되니까 별 문제가 없다.

<무자식 상팔자>(극본 김수현)가 작가 특유의 많은 대사가 있는 작품인데 빨리빨리 외워야지. 그 양반 드라마는 구문이 완벽해서 까다로운 것 같아도 요령만 알면 외우기 쉽다. 중복된 어휘가 없고, 배우가 연기하기 좋게 대사를 써주니까.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 대사보다 외우기 쉽다.”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돈키호테>부터 <아버지>까지 유독 ‘최근 들어 연극 출연이 잦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연극배우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했다. 1954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해 대학 3학년이 되던 1956년에 서울대 연극회를 재건해서 연극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학 졸업 뒤 기성 극단에서 두어 번 출연해본 뒤 군대 3년을 보내고 제대하니 국립극단이나 신협 외에는 신인들이 설 만한 무대가 없어서 실험극장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방송 출연을 시작했고 1964년 TBC 개국에 맞춰 전속 배우로 17년간 활동하면서 탤런트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연극 <아버지>에서는 주인공이 직업 인생의 말년에 큰 좌절을 겪는다. 그에 비해 배우 이순재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 빛이 나고 있다. 그에게 좌절은 없었을까.

“내가 하는 일은 특수한 직종이다. 바깥에서 보면 배우라는 게 순조로워 보인다. 또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역 때의 이야기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는 선천적인 것이 의미가 없다. 계속 계발하고 훈련하는 것이지 선천성만 갖고는 유지가 안 된다. 1960년대 초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뒤 수많은 남녀 스타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선천성과 외적인 조건만 믿고 안일하다 보면 나이 먹고 세월 가면 용도 폐기된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끝까지 자기 계발을 하고 창조를 고민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고민하고 훈련한 사람들이다. 예술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딱지는 지금도 대단하지만 1950년대에는 더욱 특별했을 텐데 그는 왜 배우의 길로 들어섰을까. 그는 “그 시절에 배우는 우리 사회의 최하층 직업이었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직업도 아니었다. 내 스스로가 연기라는 행위에서 예술성과 창조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명망 있는 것을 하고 싶었으면 진작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때문에 웬만한 바깥의 유혹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어떤 비하나 그런 것에 대해서도 동요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여긴 것일까. “아니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더 일찍 시작했을 것이다. 대학 3학년 때 연기를 시작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해외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시작한 연기이지만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매료되고 미칠 수밖에 없다. 배우라는 직업은 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직종이다.”

“정치는 공적 남기려 경쟁해야 하고 소신과 입지가 분명해야”

배우 외길만 걷겠다던 그는 왜 정치인으로 변신했을까. 13대 총선에서 출마했다가 떨어진 그는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중랑 갑에 출마해 당선했다. “11대 국회 때 당시 연기자협회 회장이던 이낙훈군이 민정당의 비례대표를 제의받아 국회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여권에서 실세가 연기자에게 비례대표를 제안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연기자들에게 누적된 문제가 많았기에 목소리를 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낙훈군을 돕다가 정치와 연결되었다. 13대 때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별안간 사람이 필요하다며 출마를 제의하더라. 나는 돈도 없어서 적극적으로 고사했다. 13대 선거를 앞두고 제주도에서 촬영 중이던 어느 날 서귀포에서 저녁을 먹는데 TV 뉴스 화면에 중랑 갑 공천자에 내 이름이 나오더라.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중랑 갑은 민자당의 절대 열세 지역이라 떨어져도 좋으니 가서 자리나 메우라고 보낸 것 같았다. 그렇게 출마를 했는데 7백50표 차이로 떨어졌다. 마침 3당 합당도 이뤄졌고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정치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랬는데 중랑 갑이 열세 지역이다 보니 당내에서 후보가 한 사람도 오지를 않았다. 지역구에서는 7백50표 차이가 아깝다며 다시 한번 도전하라고 권유하고. 그래서 14대 선거에 출마해 3천5백표 차이로 이겼다.” 

그는 15대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13, 14대 선거까지는 당에서 모든 비용을 댔다. 15대 선거까지 당에게 부담시키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지역구 관계자들에게 맨발로 뛰어달라는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지자체 선거 겪으면서 느낀 것도 있었고…. 이제 그만 나는 여기서 빠지고 본연의 직종으로 돌아가는 게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은퇴를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묘한 것은 그의 이후 행보이다. 그와 중랑 갑에서 두 번 맞대결한 상대는 중랑 갑의 터줏대감 격인 이상수 전 의원이었다. 이 전 의원이 2005년 경기도 부천 원미 갑 보궐 선거에 출마할 때 그가 후원회장을 맡았다. 같은 지역구의 라이벌이었던 인물을 이순재는 왜 후원했을까. “중랑 갑에서 몇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그와 나는 정치적인 경쟁 관계였지 적대 관계가 아니었다. 누가 더 잘하느냐를 놓고 경쟁을 벌인 것이지 상대를 무조건 쓰러뜨리기 위해 정치를 한 것이 아니다. 선의의 경쟁을 했던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후원한 것이다. 다만 중랑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다시 돌아오면 명분이 없었다.”(웃음)

이순재는 정치에 대한 의견을 덧붙였다. “국민이 보았을 때 정치가 페어플레이가 되는 즐거움을 줘야 한다. 나뿐 아니라 다 그것을 바란다. 극단적인 대결 구조, 상대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한다 하더라도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누가 더 나라를 위해서 공적을 남기느냐를 놓고 경쟁해야지, 누가 더 못하느냐를 놓고 싸우는 것은 문제이다.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이슈로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적인 선택이라는 것이 본인의 정치적인 입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자기 지역 기반이 진보적이라고 해도 자기가 보수이면 보수로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람이 보수 지역이라고 해서 보수를 선택하는 것도 문제이다. 소신과 입지가 분명해야 한다. 정당이 때만 되면 이름을 바꾸는 것은 문제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려 노력하고 창조적 발견을 하려고 애써”

ⓒ 시사저널 박은숙
연기자로 돌아간 그는 다작 배우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박근형이나 이덕화 등 60대 중견 배우가 공개 석상에서 그를 롤 모델로 꼽는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정열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권위적 캐릭터의 대명사인 국회의원의 그림자를 말끔히 걷어낸 후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소화하고, 노인 로맨스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다. 거의 모든 사회 분야에서 나이를 먹으면 조직에서 수동적인 존재나 부담스러운 상사로 전락하는데, 그는 어떻게 현재형 캐릭터로 계속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일까.

“요즘 현장에 나가보면 연출자나 제작자가 다 두 세대 이하이다. 그들이 나를 동료 의식을 가지고 봐주지는 않는다. 완전히 남이다. 인연을 갖고 있는 선후배로 보지 않는다. 현장에서 선배 요구를 하고 그러면 다른 데 영향을 미친다. 연출자가 (나이를 고려해) 배려해주면 고마운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아직은 내가 현장에서 잘 따라가니까 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만 하면 최정상에 섰다’라고 생각하면 정체된다. 스스로 끊임없는 변화의 노력으로 창조적 발견을 해야 한다. 그런 모습을 젊은 친구들이 평가해주는 것 같다.”

그는 한류로 평가받는 우리 드라마에 대한 자부심도 보였지만,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김명민은 배우로서 최고의 조건 갖추었다”

“요즘 시청률도 높고 제대로 쓰는 작가도 많지만, 쪽대본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그런 작가가 없었다. 일본에서도 기본적으로 대본을 3번 고친(3고) 뒤 작업을 한다. 전 세계에 이런 일이 없다.” 후배 연기자에 대해서는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며 칭찬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함께한 김명민은 배우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시간도 정확히 맞추고 에너지가 넘치고 겸손하고. 내가 ‘넌 평생 연기해라’라고 말해줬다. 명민이는 나이 들수록 더 좋은 연기가 나올 것이다. <더 킹 투 하츠>의 이승기는 현명했다. 영민하고, 그래서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연극도 해보라고 조언했다. (하)지원이는 용모의 변화가 없었다. 오리지널한 개성이 있다. 한 번도 찌푸린 기색이 없이 매일 전력투구를 하더라. 영화 <코리아>에서 배두나의 연기도 좋았다. 성숙 단계에 들어섰다. 내가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너 지금 이 작품 끝나면 한 1년 쉬어도 망하지 않는다. 한 1~2년 정도 뉴욕액터스쿨 같은 데 다녀와라. 평생 대비용으로 공부하고 와라’라고. 장동건이나 이병헌도 미국 가서 영화 찍지 않나. 지금 젊은 배우들은 자질이 다 좋다. 조금만 더 보완하면 더 잘될 것이다. 연기의 세계에는 사짜가 없다. 다 노출된다.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집안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는 함북 회령 출신이라는 것과 해방 전 아현동 시절의 가난, 1950년 고1 때 터진 한국전쟁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태어난 곳은 함북 회령이지만 네 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서울로 보내졌다. 부모님은 해방 뒤에 서울로 오셨다. 아현초등학교를 나와 서울고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남대문시장에서 할아버지와 비누 장사를 한 기억이 있다. 그때는 월남한 사람들이 남대문시장을 만들었다. 가난해서 서울중학교 시절 학교 등록금을 반밖에 못 냈더니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왔었다. 와서 보시더니 등록금을 안 내도 아무 말씀 안 하시더라. 우리 학교가 최고였다.”(웃음)

1950년 6월25일 광화문 네거리로 동생을 데리고 수영복을 사러갔다가 아침 10시 반께 들었던, ‘군인은 부대로 복귀하라’는 군용 지프 차량의 방송 내용을 떠올려내는 그는 전쟁의 끔찍함과 피난의 고난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두 번의 피난을 떠났던 이순재는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에 들어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부친의 반대를 꺾고 배우를 직업으로 삼았다. “우리 집안에는 이런 일 하는 이가 나 하나밖에 없다. 평범한 집안이다. 마누라(최희정)가 무용과 출신이라 내 일을 이해한다. 마누라가 젊었을 때 배우라는 직업적 상황을 이해해주었기에 배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고 외손자가 둘 있다. “나이를 별로 의식 안 한다. 내가 젊었을 때 함께 연기한 여배우들이 손자 보았다고 말할 때 놀라기도 하고, 내 손자 손녀들이 크는 것을 보면 나이를 먹는 것을 느낀다. 한 드라마를 6개월 정도 하고, 그런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나이를 잊는다. 출연 작품이 많아서 힘들긴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니까 꾀를 내지는 않는다. 다행히 젊었을 때부터 술을 안 했고 담배를 끊은 것도 30년 전이라 덜 망가진 것 같다. 10만원짜리 요정에 간 적도 없다. 어머니가 96세까지 사셨는데 그 체질을 물려받은 덕도 보는 것 같다.”  


연극 . ⓒ 아리인터웍스 제공
1982년 <풍운>(신봉승 극본, KBS)의 대원군 역

방송사 통합 뒤 KBS에서 처음으로 큰 역을 맡았다. 대원군의 개혁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 작품을 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4분짜리 독백 장면이 있었는데 목이 안 좋고 에너지가 필요해서 담배를 끊었다.

1991년 <사랑이 뭐길래>(김수현 극본, MBC)의 대발이 아버지 이병호 역

내가 권위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극 중 대발이 아버지 같은 남자가 예전에는 많았다. 내 할아버지가 그랬다. 밥상머리 예절부터 대단히 엄했다. 그런 인물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다 보면 코미디의 영역이 생긴다. 그것이 대발이 아버지이다. 지금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니까 더 웃기는 것이다.

1999년 <허준>(이은성 원작, 최완규 극본, MBC)의 유의태 역

유의태는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사실상 허준과 유의태는 동일 인물이다.

2006년 <거침없이 하이킥>(김병욱 연출, MBC)의 야동 순재 역

<하이킥> 시리즈를 안 했다면 요즘 세대가 나를 몰랐을 것이다. ‘야동’ 보는 것을 들키는 캐릭터에 아이들이 동질감을 느끼고 반가워하는 것 같다. 이후 주위에 내가 노인 시트콤을 해보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 기회를 못 얻어서 그렇지, 그럴 역량을 가진 후배가 많다. 젊은 친구들이 하는 것보다 10배 이상의 해학이 나올 것이다. 좀 더 미세한 부분의 섬세한 자극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07년 <이산>(김미영 극본, MBC)의 영조 역

영조는 백성의 실상을 알고 정치 병폐를 아는 사람으로, 집권 뒤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려고 했던 식견이 높은 지도자였다. 나는 오늘의 관점에서 통치자로서 치도(治道)를 강조하고 국가 경영 리더십을 담아내고 싶었다.

2009년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장진 감독)의 김정호 대통령 역

연설 장면에서 감독과 협의해서 정치적 화해와 포용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대사를 고쳤다.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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