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실험한 서정 시인이었을까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9.0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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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시문 ③ / 둥근 부채 노래한 ‘영단선’에 자신감 드러나 있어

ⓒ 일러스트 유환영
태종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당 태종 같은 현군으로 추앙받기도 하고, 살육을 통해 왕권을 차지한 군왕이라고 은밀하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태종은 시정(詩情)이 있었다. 한시를 잘 짓지는 않았으나, 시적 정서는 풍부했다. 아마도 즉위하기 이전에 어느 해 여름인가 태종은 손수 대나무를 깎아 둥근 부채를 만들고 한시를 지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형식으로 노래

<열성어제>에 실린 ‘영단선(詠團扇)’이라는 제목의 시. 성현의 <용재총화>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전했으니, 사대부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듯하다. <용재총화>에서는 제목을 ‘선시(扇詩)’라고 했다.


바람 선선한 평상에 기대어 있을 때는

밝은 달이 그립고

달빛 밝은 마루의 읊조리는 곳에서는

맑은 바람 생각나기에

내 스스로 대나무 깎아

둥근 부채 만드니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손안에 있도다


風榻依時思朗月(풍탑의시사낭월)

月軒吟處想淸風(월헌음처상청풍)

自從削竹成團扇(자종삭죽성단선)

朗月淸風在掌中(낭월청풍재장중)


성현은 이 시를 평하여, 문사로서 대업을 이룬 이가 일찍이 없었고 제왕의 문장이 이처럼 교묘한 일도 역시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인의 경지에 있는 분만이 이렇게 사물을 끌어와 비유하면서 의취를 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태종의 이 시는 첫째 구의 마지막 글자에 운자를 놓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말,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 이후, 칠언절구를 지을 때 대개 첫째 구의 마지막에 압운을 해왔다. 그런데 태종의 시는 그 관행을 벗어났다.

또 절구와 율시 등 근체시에서는 되도록 같은 글자를 두 번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연쇄법의 표현이거나 의도적 강조가 아니면 글자의 중복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종의 시에서는 ‘風과 月’ ‘朗月과 淸風’이 중복되어 있다. 품은 생각을 토로하느라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시를 쓴 것이다.

내용도 심상치 않다. 청풍과 낭월을 함께 지니고 싶은데 일상생활에서 여의치 않으므로 스스로 둥근 부채를 만들어 그 둘을 만들어 함께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낭월은 둥근 부채를 비유하고, 청풍은 부채가 만들어내는 바람을 가리킨다. 이때 둥근 부채를 만듦으로써 낭월과 청풍을 함께 차지했다는 말이 조금 해학적이기도 하고, 그만큼 유유자적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이 시는 활달자재의 경지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두 가지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태종은 부친을 도와 고려 말 신흥사대부들의 개혁 의지를 결집시켜 새 왕조를 열었다. 정치적으로 평온한 나날이 없었을 터이지만, 둥근 부채를 스스로 만들면서 소박한 즐거움을 추구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둥근 부채를 스스로 만들어 청풍과 낭월을 동시에 차지한다는 말은 세상 질서를 자신의 의지대로 재편하리라는 뜻을 숨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전자의 각도에서 해석하면 태종은 대단히 운치 있는 인물로 부각된다. 후자의 각도에서 해석하면 태종은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망과 의지가 강했던 인물로 부각된다. 다만, 태종의 ‘영단선’은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면서까지 자기 욕망을 관철하겠다는 검은 의지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당나라 현종(명황)은 일찍이 2월 초승에 버들개지와 살구꽃이 몽우리 진 것을 보고는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갈고를 가져다가 둥둥 두드리게 하면서 스스로 ‘춘광호(春光好)’ 곡조를 지어 노래하고 나서 돌아보니, 버들개지와 살구꽃이 활짝 피었다는 고사가 있다. 갈고는 갈족의 악기로, 받침 위에 올려놓고 두 개의 채로 양면을 치는 장구라고 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당 현종의 ‘춘광호’에 대해 인재 등용의 의지를 함축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는 그 퇴폐적인 분위기를 비판한다.  

(고서). ⓒ 연합뉴스
전통의 무게에 억눌리지 않는 참신한 시상

태종(이방원)의 ‘영단선’은 참뜻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성현이 이 시를 두고 교묘하다고 평가한 것은 아첨하는 말은 아니었다. 둥근 부채를 노래할 때는 대개 ‘버림받은 여인’의 이미지를 표현해 왔으나, 태종은 둥근 부채를 이용해 청풍과 낭월을 상상했으니, 그 정신 세계가 남달랐다.

둥근 부채라고 하면 한나라 성제의 후궁 반첩여(班婕妤)가 지었다는 ‘단선시(團扇詩)’가 유명하다. 이 시는 <문선>이라는 고전에 ‘원가행(怨歌行)’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니,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을 담은 노래라는 뜻이다. 반첩여는 미모도 뛰어나고 시와 노래를 잘해서 성제의 총애를 받다가 조비연의 참소를 받고는 물러나, 역시 폐위되어 있던 허태후를 장신궁에서 모시게 되었다. 그때, 여름철에는 사랑을 받다가 가을이면 버려지는 둥근 부채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해 슬픈 심정을 노래했다. 이것을 추선(秋扇·가을 부채)의 고사라고 한다. 반첩여의 ‘단선시’는 이러하다.

“갓 잘라낸 제(齊)나라 흰 비단은 / 눈서리처럼 희고 깨끗하여라 / 마름질하여 합환선을 만드니 / 둥글기가 명월과도 같아라 / 님의 품과 소매를 드나들며 / 그때마다 서늘한 바람을 일으킨다만 / 문득 두렵구나, 가을이 되어 /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으면 / 가을 부채가 장롱 깊이 버려져 /은정이 끊길 것이기에.”

한시는 대개 고전 작품이나 유명 작가가 사용한 소재와 시상을 이용해 자기 뜻을 드러내는 관습이 있다. 그렇기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많은 시인이 군주의 총애를 잃은 후 둥근 부채(가을 부채)를 노래하면서 소외의 처지를 애달파하고는 했다. 그러나 태종(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통의 무게에 억눌리지 않고 참신한 시상을 폈다.

그런데 태종의 ‘영단선’과 유사한 착상은 최규서(崔奎瑞, 1650~1735)의 ‘단선명(團扇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둥근 부채에 붓으로 써놓은 글이다.  

 

본체는 밝은 달 같고

쓰면 맑은 바람 이누나

손에 쥘 권한은

오직 주인옹에게 있나니

 

則明月(체즉명월)

用則淸風(용즉청풍)

掌握之權(장악지권)

惟主人翁(유주인옹)

 


최규서도 둥근 부채를 청풍명월과 연결시켰다. 마음이 명월의 본체를 유지하고 씀에서 청풍을 일으키는 일은 주인옹(마음) 자체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이다. 곧, 마음의 체(體)와 용(用)에 관한 문제에 연결시켰다. 하지만 태종의 ‘영단선’은 스스로의 마음을 기르겠다는 도덕적 결단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태종의 시에는 유유자적함을 추구하는 소박한 뜻이 담겨 있기도 하고, 세상 질서를 재편해보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과연 그날 태종은 둥근 부채를 흔들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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