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공권력’이 사라졌다
  • 이지강│영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2.09.0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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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마 범죄’ 판치는 현실 반영한 듯 범인이 주인공이고 경찰은 제쳐놓은 내용 많아

영화
2년 전인 지난 2010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주인공의 직업 중 가장 많은 것은 전·현직 국가 요원이나 형사, 경찰이었다. 그해 1년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흥행 순위 상위 50편(판타지·사극·다큐 제외)을 분석해보니 전체의 22%인 11편에서 주인공의 직업이 국가 보안이나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지금 한국 영화에서는 맹활약하던 형사와 국정원 직원은 종적을 감췄거나 들러리로 밀려났다. 한국 영화는 도둑과 연쇄 살인범, 장기 밀매자가 판치는 범죄자의 세상이 되었다.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평론가 정지욱씨처럼 “현 정부의 정책 및 공권력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냉정하게 반영하는 결과이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최근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고 경찰과 사법 당국의 무능한 대응이 연일 질타를 받았다. 지난 8월22일에는 서울 여의도에서 한 남성이 원한을 품은 전 직장 동료들과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네 명이 다치는 이른바 ‘여의도 묻지 마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이 처음 칼을 휘두른 후 현장 주변 40~50m를 옮겨다니며 2차, 3차 범행을 저질렀지만 그동안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범행 현장과 멀지 않은 새누리당 당사 주변에는 쌍용자동차 조합원 집회와 농성을 경비하는 기동대원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경찰은 4명의 희생자가 생긴 후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시민으로부터 늑장 대응이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한 시민은 사건 목격 직후 112에 전화했으나 통화 중이었다고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밝혔다. 지난 4월 수원에서는 경찰이 “모르는 남자에게 납치되어 성폭행당하고 있다”라며 위치까지 비교적 정확히 알려준 한 여성의 신고 전화를 받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도 있었다. ‘오원춘 사건’이다.

현실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도 범죄는 있되, 공권력은 없다. 112는 ‘통화 중’이고 경찰은 ‘부재중’이며 사법부는 무능하다. 공권력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반감은 한국 영화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지난 8월22일 개봉해 흥행 중인 강풀 웹툰 원작의 스릴러 영화 <이웃사람>은 죽이는 자도 이웃이고, 죽는 자도 이웃이며, 그것을 막는 자도 이웃뿐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물론 낡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그들의 ‘이웃’에는 경찰도, 형사도, 검사도 없다. ‘경찰은 5분 안에 있다’라는 경찰의 선전 문구가 무색하다. 지난 8월30일 개봉한 <공모자들>은 한ㆍ중 공해상의 배 위에서 범행 대상의 장기를 적출해 중국에 내다 파는 장기 밀매범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렸다. 역시 여기에도 경찰은 없다.

 

영화
지난해부터 사법 권력에 대한 비판·야유 담은 영화가 압도적 강세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의 작품을 보면 사법 권력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담은 영화가 압도적인 강세였다. <도가니>의 소년·소녀들에게 사법부는 무능함을 넘어 가해자만큼이나 악질적인 사실상의 공범이었다. <부러진 화살>에서 사법 권력의 정의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주인공은 비리 공무원 출신의 깡패와 조폭이다. 이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 정치·입법·사법권은 오히려 ‘나쁜 놈’과 한통속이다. 그래서 남은 것이 <도둑들>과 <이웃사람> <공모자들>뿐이다.

한국 영화에서 범죄물이 다시 붐을 맞고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아동·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 범죄가 기승을 부렸던 2010년이다. 그해 최고 흥행작이 원빈·김새론 주연의 <아저씨>로, 옆집 소녀를 납치한 인신매매범을 응징하는 전직 국가 요원의 활약을 그렸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역시 사이코패스에게 약혼자를 잃은 한 남자의 복수극을 높은 수위의 폭력 장면으로 담아내 화제가 되었다. 아내와 딸을 무참하게 잃은 남자의 복수극 <무법자>와 어린 딸을 연쇄 살인범에게 빼앗긴 목사의 처절한 추적극 <파괴된 사나이>도 있었다. <용서는 없다>도 흉악범에게서 딸을 구하기 위한 한 남자의 분투를 담았다.

이런 작품이 극장가에서 유행하는 동안 발생한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의 범인 김길태와 초등학교 여학생을 납치 및 성폭행한 범인 김수철 사건은 국민적인 분노를 자아냈다. 유죄 확정 전 흉악범의 신상과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소리가 설득력을 얻었다. 가해자에게는 신상 공개뿐 아니라 화학적 거세, 전자 팔ㆍ발찌, 사형 등 극형까지 아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거셌다. 이렇듯 강력한 공권력과 강력한 응징을 바라는 대중의 욕망은 영화 주인공의 직업으로 반영되었다. <아저씨>에서 전직 국가 특수 요원,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국정원 직원, <무법자>에서 전직 형사, <용서는 없다>에서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권력을 상징하거나 대리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영화는 공권력을 더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평범한 이웃들끼리의 연대만이, 우리 곁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두겁 쓴 악마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지욱 평론가는 “흉악 범죄의 희생자는 주로 저소득층과 저개발 지역에 거주하는 아동, 여성, 노약자이다. 범죄의 위협에 노출되는 정도가 평등하지 않듯, 공권력이 보호하는 대상 또한 권력이나 경제력에 따른다는 것이 대중이 갖는 근본적인 회의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서민에게는 ‘자구(自救)와 연대’만이 살길이라는 씁쓸한 인식이 <이웃사람> 같은 영화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오는 10월에 개봉할 예정인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위장한 청부 살인업자가 주인공이다. 오는 11월 개봉 예정인 <내가 살인범이다>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연쇄 살인범과 뒤늦게 그를 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돈 크라이 마미>는 딸을 죽음으로 내몬 남학생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펼치는 엄마가 주인공이다. 또 하나의 강풀 웹툰 원작 <26년>은 학살 주범인 전 대통령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 민간인의 분투극을 담았다. 하나같이 공권력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인 복수와 응징을 그린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이상용씨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이 다시 조명되는 최근 인문사회과학계의 담론을 들며 공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과 문제 제기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벤야민에 따르면 폭력에는 기존의 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법 보존적 폭력’과 이에 대항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법 정립적 폭력’이 있다. <공공의 적>에서 보듯, 과거 한국 영화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승리하는 법 보존적 폭력(공권력)을 보여주었다면, 지금은 두 가지의 폭력이 대립하고 있는 ‘카오스’ 상태를 드러낸다. 한국 영화에 나타난 공권력에 대한 회의나 불신은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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