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꿈꾸는 ‘의료계 빌 게이츠’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09.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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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윤 씨젠 대표, 기존 분자 진단법의 한계 극복한 질병 검사법 개발

과거 도스(DOS)라는 운영체제에 기반한 컴퓨터로는 음악을 들으면서 문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컴퓨터 한 대로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윈도(Windows)의 탄생이 있다. 이런 혁신이 의료계에도 있다. 한 번의 검사로 세균 한 종밖에 발견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수십 종을 한꺼번에 찾아내는 기술이 한국인의 손에서 나왔다. 의료계에 ‘윈도’를 내놓은 주인공은 천종윤 씨젠(seegene) 대표(56)이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현재 50개국 3백여 개 의료기관에서 환자 진단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20년 전 영화 <쥬라기 공원>에는 공룡의 피를 빤 모기의 몸속에서 공룡의 유전자를 빼내 공룡을 복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유전자의 양이 극히 적기 때문에 수백만 배로 증폭할 필요가 있다. 이 기술은 1983년 미국의 캘리 멀리스 박사가 개발했다. 유전자를 증폭하면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기존 진단법(배양검사·면역검사)보다 정확도가 높은 이 검사법(분자 진단)은 세계 모든 의료기관에서 질병 확진에 사용되었다. 이런 공로로 멀리스 박사는 1993년 노벨상을 받았다. 2009년 신종플루가 창궐했을 당시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검사법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컴퓨터가 사라지면 대혼란에 빠질 만큼 이 기술은 의료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기존 진단법으로는 환자가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면, 분자 진단법으로는 어떤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병원균의 잠복기에도 검사할 수 있어서 병세가 깊어지기 전에 정확하게 치료할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세계 분자 진단 시장의 규모는 6조~7조원에 달하며 연평균 15~20%의 고속 성장률을 보인다. 로슈 등을 비롯해 5백개 업체가 있지만, 원천기술을 가진 기업은 20개에 불과하다. 그중에 씨젠이라는 한국 기업이 있다.


한 번의 검사로 20개 병원균 찾아내는 기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천대표에게는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60년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나무 판자를 주워다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그에게 결핵이 찾아왔다.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고등학교를 중퇴할 만큼 오랜 기간 병치레를 했다. 검정고시로 건국대 농대에 입학했지만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동기들보다 졸업이 늦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테네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에도 시련이 있었다. 교수의 잘못된 연구 방향 탓에 3년을 허비했다. 하버드 대학과 버클리 대학에서 연구 과정을 밟은 후 귀국했다. 금호생명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한 후에 이화여대 생물학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분자 진단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던 천대표는 2000년 학내 벤처기업(씨젠)을 차렸다. 2001년 그는 세계 최초로 기존 분자 진단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신종플루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있다고 하자. 기존 분자 진단법으로 검사해보니 단순 감기로 판명 났다. 이 환자는 이후 심각한 상태에 놓였을 터이다. 천대표는 이런 오류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유도탄처럼 여러 병원균 중에서 특정 병원균을 집어내는 기술이다. 당시 세계 학계는, 기존 분자 진단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세기적인 연구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2002년 교수직을 떠났다. 연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환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정부나 기업이 치료제 개발에는 수천억 원의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정작 질병 예방에 필요한 진단 분야에 대한 지원에는 인색했다. 특허 기술을 가지고도 몇 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다.

2006년 그에게 기회가 왔다. 한 번의 검사로 20개의 병원균을 찾아내는 기술(DPO)을 개발했다. 그는 당시 성병 의심 환자 6백여 명을 검사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외국 기업의 기술로는 9%만 감염된 것으로 나왔지만, 천대표의 기술로는 82%가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검사법은 성병 진단 시장의 80%를 대체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기존 진단법으로는 한 번에 1~2종의 병원균만 찾아낼 수 있었다. 기존에는 낚싯대로 물고기를 한 마리씩 잡았다면,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잡는 그물을 천대표가 개발한 셈이다.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기 검진과 치료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김종기 씨젠 영업지원본부장은 “혈액, 조직, 가래 등에서 한 번에 20종 이상의 병원체를 감지함으로써 환자가 어떤 병원체에 감염되었는지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병원체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까지 측정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천대표는 이 기술을 세계 학계에 보고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 세계적인 과학 잡지가 그의 기술을 인용했다. 이후 영국의 바이오업체 등 여러 기업이 천대표에게 기술 이전을 요청해왔다. 지난해에는 병원 내 감염 질환 검사 제품 전문업체 17개 중 한 업체로 선정되면서 단숨에 업계 20위권에 진입했다.

천대표는 이 기술을 적용한 제품(시약)을 만들었다. 호흡기질환(감기, 독감, 소아천식, 폐렴 등), 성 매개 감염 질환(자궁경부염, 요도염, 임질, 골반염 등),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HPV)를 잡아내는 제품이다.

미국 등 35개국에 특허를 출원했고, 유럽연합 30개국에서 품목 허가를 받았다. 현재 미국 4대 검진센터(바이오레퍼런스) 등 50여 개국 3백개 병원에서 씨젠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약 4백억원의 씨젠 매출 가운데 70%는 수출에 의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2009년 지식경제부에 의해 세계 일류 상품으로 선정되었고, 2010년 장영실상도 받았다. 지난 8월13일 식약청으로부터 진단 제품 10개 품목에 대한 허가도 받았다. 현재 국내 병원들은 이 회사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김현숙 세브란스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배양검사, 면역검사, 분자 진단 등으로 질병 원인을 찾아낸다. 그중에서 분자 진단은 정확도가 높아 감염질환은 물론, 폐암·백혈병과 같은 암에도 기본 검사법으로 쓰인다. 예전에는 한 번 검사해서 한두 종의 병원균을 찾아냈지만 지금은 동시에 여러 병원균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기 진단으로 치료가 빨라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씨젠연구소의 내부 모습

“진단 키트 사서 암 진단하는 세상 만들 것”

정부의 변종 바이러스 대응 사업에도 씨젠의 기술력이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김우주 신종플루 범부처사업단장(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은 “씨젠은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향후 신종플루와 같은 변종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교류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창업 10년 만인 2010년 벤처기업을 코스닥 상장 기업으로 키운 천대표의 목표는 뚜렷하다. 분자 진단법의 세계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올해를 그 원년으로 삼은 그는 세계 분자 진단 시장의 60%를 차지하는 미국과 일본 시장에 진출하기로 했다. 2013년 두 나라에서 제품 허가를 받을 전망이다. 천대표는 지난해 “우리 기술력은 세계적이다. 최소 5년 이내에 우리를 따라올 기업은 없다. 오직 분자 진단에만 1백50명의 인력을 투입하는 기업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10년 넘게 쌓아온 기술을 바탕으로 해마다 신기술을 하나씩 내놓을 계획이다. 우리 기술은 산업혁명과 같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임신 진단 시약처럼 약국에서 진단 키트를 사서 암과 질병을 진단하는 세상이 곧 올 것이다. 그러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저소득 국가도 분자 진단 검사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의료계에 혁신을 예고하는 단계까지는 성공했다. 앞으로 천대표가 의료계의 ‘빌 게이츠’가 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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