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의 사건 추적] 악마가 된 외톨이 빗나간 분노의 돌진
  • 표창원 l 경찰대 교수 ()
  • 승인 2012.09.1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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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23명 낸 1991년 10월 여의도광장 차량 폭주 사건

1991년 10월2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자동차를 질주해 23명의 사상자를 냈던 김용제가 현장 검증에서 윤신재군 사망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1년 10월19일 화창한 토요일 오후, 사람이 가득 찬 여의도공원에서 충격적인 ‘차량 질주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여의도공원’의 이름은 ‘여의도광장’이었고,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무나 수풀은 전혀 없고, 인접한 차도와 물리적으로 구분되지 않은, 콘크리트가 깔린 드넓은 공간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여의도광장의 이름은 ‘5·16광장’이었고, 군사 정권이 대규모 행사나 관제 집회를 열 때 사용할 목적으로 조성한 ‘도심 속 연병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여의도광장에, 주말 오후 각양각색의 서민들이 모여 소박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즐기는 무리 속으로, 누군가 차를 몰고 시속 70km가 넘는 속도로 전력 질주해 공격해오는 일을 도대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칼 품고 다니다 검문에 걸려 3개월 복역

1991년 10월19일 토요일 오후 4시 무렵, 사람들로 가득 찬 여의도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KBS 본관 앞 주차 공간에 당시로서는 신형이었던 프라이드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승용차 안에는 한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뚫어져라 광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의 눈에서는 좌절과 분노의 감정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동차가 폭탄이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생, 무시받고 놀림받고 배신당하며 살아온 지난 20년의 삶 중에서 가장 비참했던 순간만을 일부러 떠올렸다. 적개심을 부추기기 위해서,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 마음을 굳게 다져 계획하고 결심한 ‘거사’를 실행할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 남자, 아직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스무 살 김용제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마이너스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나쁜 데다가 제대로 된 안경을 살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용제는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어릴 때 잘 먹지 못해 눈이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김용제가 초등학생 때 가난을 견디지 못해 가출한 뒤 소식이 끊겼고, 그 몇 년 후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눈이 잘 안 보이고 체구도 작아 늘 자신감 없이 위축되어 있었던 탓에 친구들은 용제를 놀리고 따돌렸다. 학교에서도 책이나 칠판의 글이 잘 안 보여 성적도 형편없었다. 그렇게 김용제의 가슴속에는 어릴 때부터 매일매일 분노와 불만이 치밀어올랐고,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탓에 그 불만과 분노를 누구에게 꺼내놓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터뜨리거나 풀어낼 대상도 방법도 없었다. 그저 가슴 한쪽에 꾸역꾸역 밀어넣고 쌓아둘 뿐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청소년기가 되면서 김용제의 분노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뜬금없이 폭발하곤 했다. 평소 조용하고 얌전하기만 하던 그가 사소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내거나 폭력적 파괴 행동을 하는 일이 간혹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는 당황스러웠지만 청소년기의 반항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청년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그는 결국 칼을 품고 다니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강도 예비 음모’ 혐의로 3개월간의 교도소 생활을 한 뒤 다시 사회로 나왔다.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범죄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은 충격적인 경험은 소심한 김용제에게 반성과 자성의 기회를 제공했다. ‘다시는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하지 말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자.’ 자유로운 공기와 밝은 태양을 다시 만난 김용제가 했던 결심이다. 판결을 내리면서,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판사님의 말씀이 눈물샘을 자극하며 가슴을 울렸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용기를 김용제에게 심어주었다.

김용제는 벽에 붙은 구인광고를 샅샅이 훑으며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월수 ○○만원 보장, 숙식 제공’. 주로 자그마한 수공업형 공장들이었다. 찾아간 공장에서는 마침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두 팔 벌려 김용제를 환영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시력이 나빠 눈이 잘 안 보이다 보니 실수가 잦았다.


1992년 3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는 등 각종 운동을 하며 휴일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 ⓒ 연합뉴스
시력 나쁜 탓에 취업한 곳마다 쫓겨나

처음 한두 번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던 작업반장과 사장은 김용제의 실수 때문에 손실이 커지고 작업이 지연되자 짜증과 화를 내기 시작했고 결국 김용제는 해고를 당하고 다시 거리로 쫓겨났다.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공장의 업종과 장소를 바꿔가며 ‘이번엔 잘될 거야’라고 다짐하던 김용제의 기대와 희망은 계속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이 날 뿐이었다. 딱히 공장 사장들이나 작업반장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자기 때문에 자꾸 사고가 나고 손해가 발생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용제는 화가 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눈이 나쁜 것이 내 탓이냐?” “눈이 좀 나쁘면 사람도 아니냐?” “눈이 아주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좀 천천히 기다리면서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되냐?” 이런 불만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남은 기대와 희망을 모두 끌어모아 용기를 내어 마지막으로 찾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 소재 양말공장에서도 역시 전과 같은 일들과 분위기가 반복되었다. 곧 해고될 것을 예상한 김용제는 평소 눈여겨보아두었던 사장 소유의 프라이드 승용차 열쇠를 미리 복사해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용제의 더딘 작업과 잦은 실수를 더는 참지 못한 사장은 주저와 망설임 끝에 김용제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김용제에게는 해고 통보가 더 이상 충격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더는 뻔히 예상되는 일자리 찾기와 해고의 악순환을 반복할 무모한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받았던 임금과 퇴직금 등을 들고 거리로 나선 김용제는 여인숙이나 거리에서 자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식당 일이나 막노동 자리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눈이 잘 안 보이는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4개월이 흘렀다. 지난번 수사와 재판을 받으며 했던 반성과 결심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사라갈 희망도, 기대도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부터 줄곧 불행하고 무시당하고 냉대당했던 일들만 줄줄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새삼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세상 사람들은 다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왜 이렇게 불행할까?” “내 또래 남자들은 대부분 대학에 다니거나 직장이 있고, 예쁜 여자친구들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연애도 하며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 “이게 다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 탓이야.” “부모 잘 만난 놈들만 위하고 그놈들만 잘 살게 해주는 썩어 빠진 세상이 문제야.” “눈이 좀 나쁘다고 날 무시하고 괄세하고 천대한 세상 사람들 모두 다 죽여버리겠어!” 

수중에 돈도 다 떨어져 과자 한 봉지 사먹지 못하고 쫄쫄 굶게 된 김용제는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하고 지옥 같은 삶을 끝내기로 작정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무서운 사람인지 보여주겠어.” “나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천대한 세상 사람들, 다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김용제의 마음속에 가득 찬 생각이었다. 김용제는 먼저 자신을 괄시하고 해고한 공장들을 찾아가 복수를 할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다 자기보다 힘도 세고 눈도 잘 보이는 사람들,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제압당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때리고 따돌리고 놀렸던 학교와 동네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범인 김용제가 여의도광장에서 차량 돌진 범행을 재현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다니던 양말공장 사장의 차 훔쳐

무엇보다 특별히 한두 사람만 미운 것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이 다 복수 대상이었다. 그런 김용제가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시간을 때우던 길거리 상점 유리창 안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수시로 여의도광장을 보여주었다.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하는 청춘 남녀들,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가족의 모습들…. “그래, 바로 저기다. 저 중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 그들의 친구나 친지, 아니면 그들과 닮은 사람들이 들어 있다. 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자.”

김용제는 지난 4개월 동안 부적처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양말공장 사장의 승용차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일본군 자살특공대 ‘카미카제’처럼 차를 몰고 저 군중 속으로 돌진하면 될 것 같았다. “차 기름이 떨어져 멈출 때까지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가능한 많은 사람을 공격하자.” 범행 이틀 전인 1991년 10월17일, 김용제는 복수심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며 양말공장 사장 김씨가 주로 차를 세워두는 서울 화곡동 집 앞 골목으로 찾아갔다.

전봇대 뒤에 숨어 한참을 지켜보자 드디어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프라이드 승용차로 다가간 김용제는 주머니에서 꺼내던 열쇠를 놓쳐 땅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웠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손이 떨리고 눈도 더 안 보여 열쇠 구멍을 찾기도 힘들었다. 한참을 더듬다가 겨우 열쇠 구멍에 복제한 열쇠를 넣고 돌리자 문이 열렸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변속한 뒤 출발하려는데 웽 소리만 요란하고 차가 앞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주차 브레이크를 풀지 않은 것이었다. 그 사이 누구라도 제지했었더라면 참극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운전면허도 없고 시력도 좋지 않은 김용제가 여러 차례 어색한 행동을 반복하며 실수하는 과정을 포착하고 다가가 질문을 하거나 신고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까스로 차를 몰고 화곡동 골목을 빠져나온 김용제는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차 안에서 자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더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굶주린 배를 움켜쥔 김용제는 결심을 굳히고 여의도 KBS 앞으로 차를 몰았다. 10월19일 오후 4시, 가슴속 분노와 복수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김용제는 자동차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광장에 가득 찬 사람들의 형체가 또렷이 잡히기 시작했다.

쾅!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신나게 자전거를 타던 초등학교 5학년 현일이가 첫 희생자였다. 또다시 쾅! 바로 옆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던 여섯 살 유치원생 신재였다. 현일이와 신재는 김용제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세 번째로 충격한 초등학교 3학년 영철이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중태에 빠졌다. 김용제는 차를 멈추지 않았다.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가속 페달을 힘껏 밟은 채 자동차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공포에 찬 비명소리가 이곳저곳에서 공기를 갈랐고, 어린이와 여성 노인 등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쓰러지고 넘어졌다. 이미 악마가 되어버린 김용제는 쓰러진 사람들 위로 차를 몰고 넘나들었다. 사망한 두 어린이 외에도 21명이 더 차에 치이거나 깔려 부상을 당했다.

김용제가 몰던 차는 2백여 m를 더 질주하며 여의도광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다가 철제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고는 멈춰섰다. 곧바로 주변 시민들이 맨손으로, 혹은 주변에서 돌이나 나무 막대기를 주워들고 멈춘 차를 향해 몰려들어 차를 에워쌌다.


김용제는 1997년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수감 생활을 하며 조성애 수녀(위)와 편지를 주고 받았고,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고, 책으로 출간되었다. ⓒ 연합뉴스
김용제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두 가지 숙제

김용제는 차문을 걸어 잠그고 유리창 손잡이를 틀어쥐어 밖에서 열지 못하게 하며 버텼다. 분노한 시민들은 차 유리창을 깨뜨리고 김용제의 멱살을 잡아 차 밖으로 끌어냈다. 김용제는 그 사이 빈틈을 노리고 사람들의 손을 뿌리친 뒤 차 밖으로 뛰쳐나와 품 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바로 옆에 있던 중학교 1학년 여학생 김 아무개양의 목을 감싸쥔 채 칼을 들이대고 소리쳤다. “다가오면 죽여버리겠어!” 놀라고 분노한 시민들은 주춤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김용제는 김양의 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다행스럽게도, 허리띠 금속 벨트 부위였기 때문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대치 상태가 계속되던 중 사흘을 굶고 눈이 잘 안 보이는 김용제가 빈틈을 드러냈고 시민들 중 ‘새마을 봉사대원’이었던 김창석씨가 날렵하게 칼을 든 김용제의 팔을 낚아챘다. 시민 10여 명이 가세하면서 인질극은 끝이 났다. 다행하게도 인질로 잡혔던 김양은 아무 상처 없이 무사히 구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충격은 정신적 상처로 남아 오래도록 그를 힘들게 할 것임은 분명했다.

곧 경찰과 소방, 병원 응급 의료진이 도착해 현장 수습에 나섰다. 여의도광장은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고, 넘어지고 도주하던 사람들의 벗겨진 신발과 찢긴 옷자락, 도시락통과 가방, 넘어지고 부서진 자전거 파편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치 전투가 벌어진 전장 같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의 광란이 만들어 낸 현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한 사람의 분노가 채 피어보지도 못한 두 명의 어린 생명을 앗아가고, 21명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어처구니없는 참사였다. 비록 부상은 입지 않았어도 그 현장에서 극한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한다면 최소한 1만명 이상이 피맺힌 절규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김용제의 여의도 차량 질주 테러 사건의 피해 유가족과 부상자들의 상처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 충격과 고통이 남긴 마음의 상처가 과연 회복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1988년에 이미 일본을 본따 ‘범죄 피해자 구조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지만 껍데기뿐으로 내용이 없었고, 아무도 그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범인 김용제는 과자를 사먹을 돈도 없어 사흘을 굶은 처지인데 배상이나 할 여력이 있을까? 범행에 사용된 자동차가 가입된 종합보험은 도난된 후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하는 규정이 없었다. 다만 ‘책임 보험’에 따라 사망자는 최고 5백만원, 부상자는 최고 3백만원까지 보상이 가능했다.

결국 이 엄청나고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당한 피해자들의 치료와 피해 회복은 오롯이 피해자 본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국가라고 주장하려면, 국가가 보호하지 못해 불의의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그 상처를 치료받고 생업에 복귀해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때까지 책임지고 지원하고 보호해주는 법과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숙제는 최근 또다시 여의도에서 발생한 ‘묻지 마 칼부림 사건’ 피해자에게도 여전히 남겨져 있다. 20년 넘게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국가와 정부, 사회는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또 하나의 숙제는 김용제가 가난과 가정의 불행, 신체적 약점과 그로 인한 성격적 문제를 안고 자라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무시와 냉대에 분노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2, 제3의 김용제가 만들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던 이 숙제 역시 아직까지 숙제로 남겨져 있다. 아니, 오히려 사회 양극화의 심화와 위기 가정의 증가, 전인 교육 체계의 붕괴 등 문제는 더 심각해져 유사한 형태의 ‘묻지 마 살인’은 늘어나고만 있다. 이제부터라도 대한민국이 사람 살 만한 나라가 되려면 김용제가 남긴 이 두 가지 숙제를 풀어내야 할 것이다.


Series) 표창원 교수의 사건 추적


1. 악마가 된 외톨이의 빗나간 분노의 돌진
- 1991년 10월 여의도 광장 차량 폭주 사건

2. 미군에 희생된 꽃다운 청춘의 절규
- 1992년 10월 동두천 주한 미군 범죄 희생자 윤금이씨 사건

3. 남자친구의 환심 사려 끔찍한 범행
- 1990년 유치원생 곽재은양 유괴·살해 사건

4. 만삭의 여인이 벌인 잔혹한 범죄
- 1997년 8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사건

5. 자녀 학대가 부른 끔찍한 패륜 범죄
- 2000년 5월 과천 토막 살인 사건

6. 고희 되도록 못 버린 ‘그놈의 도벽’
- 권력자 울리고 서민 웃겼던 대도 조세형 사건

7. 악마로 변한 살인자의 두 얼굴
- 1998년 부천 비디오 가게 살인 사건

8. '살인자' 꿈꾼 소년의 잔혹한 범행
-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다 잠자던 동생 도끼로 내리쳐

9.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아홉 살 때 성폭행당한 여성이 20년 후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 심각성 알린 김부남 사건

10. '짐승' 의붓아버지 죽인 비운의 여인
- '성폭력 특별법' 탄생시킨 김보은·김진관 사건

11. "유전 무죄, 무전 유죄" 탈주범의 절규
- 1988년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인질범 사건
 

12. 법대 여대생 꿈 짓밟은 판사 장모의 편집증
- 미행과 감시, 위협하다 킬러 고용해 살해

13. 기막힌 살인 누명 쓴 '억울한 3인조'
- 경찰, 가상 사건 꾸며내 범인으로 몰아, 2001년 속초 콘도 살인 암매장 사건

14. 무고한 인명 앗아간 '지옥 지하철'
- 1백92명 사망, 1백48명 부상한 최악의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15. 탐욕스런 선수들의 썩은 스포츠 정신
- 조폭과 승부 브로커들, 금전 동원해 선수 유혹한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

16. 무참하게 행복 짓밟힌 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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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주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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