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담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9.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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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시문 / 유일하게 전해지는 칠언절구 한시 ‘몽중작’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묘 영릉. ⓒ 연합뉴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뿐 아니라, 두만강을 동북면의 국경으로 확정하는 등, 여러 면에서 민족사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그의 시문은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었을 터이지만, 애석하게도 문예적인 시문은 남아 있지 않다. 더구나 한시는 딱 한 편이 전해진다. 그것도 <세종실록>이 아니라 <세조실록> 총서(總序) 속에 한 수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 시는 꿈속에서 지은 시라고 하여, <열성어제>에는 ‘몽중작(夢中作)’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雨饒郊野民心樂(우요교야민심락)

日暎京都喜氣新(일영경도희기신)

多慶雖云由積累(다경수운유적루)

只爲吾君愼厥身(지위오군신궐신)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비가 교외의 들에 넉넉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즐겁고

해가 경도(서울)를 비추자

기쁜 기색이 새롭다.

경복 많은 것이 비록 열성(列聖)의

적덕누인(積德累仁) 때문이라 하지만

다만 우리 군주를 위해 청하나니,

그 몸을 신중히 하소서

 

열성이란 앞 시대의 여러 왕들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그 뒤를 이은 정종과 태종뿐만이 아니라 태조 윗대의 조상들도 모두 가리킨다. 실은 <용비어천가>에서 노래하고 있는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태종 등 여섯 대 임금을 가리킨다. 정종은 국왕으로 있기는 했지만 스스로 치적을 남긴 것은 별로 없고, 정안대군(이방원)이 거의 정치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오늘날 인터넷상에도 많이 유포되어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잘못으로  셋째 구의  ‘다경(多慶)’이 ‘다황(多黃)’으로 잘못 전하고 있다. 다황이라면 시가 성립하지 않는다.

‘몽중작’에 대한 두 가지 해석

또 마지막 넷째 구의 해석을 잘못해서, 세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국왕에게 바친 시라고 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只爲吾君’이 꿈 속에 나타난 신인(神人)이나 세종 자신이 세종에게 경계한 말임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마지막 구절의 ‘只爲吾君’은 결국 세종 자신이 스스로를 경계한 말이다. 마지막 구절을 조금 달리 표현한 것도 있는데, 결국 뜻은 마찬가지다.

다만 마지막 구절은 절구의 형식에서 벗어났다. 칠언절구의 평측에 어긋난다. 따라서 시는 칠언고시라고 보아야 한다. 어쩌면 처음의 시를 옮기는 과정에서 잘못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는 제왕의 시로서 손색이 없다. 현재 국토와 인민을 다스리는 국왕은 <용비어천가>가 반복해서 노래하듯이, 그 윗대에서 덕과 인을 쌓아 천명을 바뀌게 한 결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왕은 경복(慶福)을 누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후대에 그 왕업을 이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용비어천가>가 반복해서 말하듯이, 천명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근면하게 일하는 태도를 지켜야 한다. 즉,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자세를 지켜나가도록 자기 몸을 돌아보라고 ‘몽중작’은 말하고 있다. 

세종 어진(御眞) 조선조 제4대 임금.
세조가 자신의 명분 강화하는 데 이용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시는 <세조실록> 앞부분에 놓여 있는 총서에 들어 있다. 총서에 따르면 세종이 재위 31년(1449년) 9월에 문종과 세조에게 보여주면서, “이 시의 뜻이 좋아서 너희들이 보면 반드시 유익할 것이다”라고 하자, 문종과 세조가 서로 경하하고 나왔다. 이때 세조가, “성상의 마음이 맑은 물과 같으시니, 길한 징조가 먼저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열성어제>도 이 일화를 주석으로 적어두었다.
이 시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실제로 세종이 이 시를 지어 재위 31년 9월에 문종과 세조에게 보여주었을 수 있다. 단, 이때는 앞뒤의 정황으로 보아 문종과 세조(당시의 수양대군)만이 아니라 안평대군(이용)에게도 보여주었을 것이다. 세종은 세 아들을 골고루 사랑하고 정치 역량을 키워주려고 부심했다. 따라서 <세종실록>을 보면 장남이자 세자로 책봉된 문종만이 아니라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집현전 학사를 통솔해 고전을 연구하고 풍수학자들을 인솔해 산역을 감독하며 궁중의 불교 행사를 주관하게 한 사실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단종 때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다시 병자화(사육신의 죽음)를 계기로 단종을 압박해 선양의 형식을 취해 국왕이 된 이후 안평대군의 사적을 기록에서 제거했다. 따라서 ‘몽중작’을 문종, 안평대군과 함께 듣고도 그 시를 후일 신하들에게 제시하면서 고의로 그 사실을 은폐했을 수 있다. 곧, 만일 국가에 어려움이 있으면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을 부왕(세종)이 이미 약조했다고 선전하기 위해서 세종의 시 ‘몽중작’을 이용했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세종이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세조 자신이 날조했을 수 있다. 이 또한, 만일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을 부왕(세종)이 이미 약조했다고 선전하기 위해서 ‘몽중작’을 날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본래 <조선왕조실록>의 역대 실록 가운데서 총서가 큰 기능을 갖는 경우는 <태조실록>과 <세조실록>뿐이다. 심지어 총서가 없는 실록도 있고, 있더라도 매우 간략하다. 그런데 <태조실록>은 선대의 가계를 서술하고, 목조 이만사가 전주에서 삼척·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한 일, 공양왕이 태종과 사예 조용을 시켜 태조와의 맹약을 위한 글의 초안을 잡게 한 일을 기록했다. 여기서는 태종(이방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태종 때에 일부러 강조한 부분일 것이다. 그 뒤 <정종실록>은 총서가 매우 짧아서, 공정왕(정종)의 휘(이름)를 방과(芳果)에서 경(?)으로 고친 일, 수(壽)는 63세였다는 사실을 적었다. 다음의 <태종실록>도 총서가 매우 짧아서, 향년 56세에 묘호는 태종이라는 사실을 적었다. <세종실록>의 총서는 조금 길어서,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한 후 세종을 세자에 봉하고 세종이 즉위하기까지 덕망을 쌓은 일을 기록했다. <문종실록>의 총서는 짧되, 문종이 총명하고 세종 말년에 정무를 재결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단종실록>의 총서는 의정부가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에 거처하게 하면서 즉위하게 된 사실을 적었다.

그런데 <세조실록>의 총서는 세조의 성품과 재능, 세종의 총애 같은 사실들을 자세하게 적었다. 더구나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를 내자, 무당 비파가 “39세에 등극하실 징조입니다”라고 예견했다는 일화까지 적어두었다. <세조실록>의 편찬자들이 상당한 분량의 총서를 책머리에 싣고, 거기에 세조가 문종과 함께 세종의 ‘몽중작’ 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록해둔 이유는 새삼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총서가 이 시를 실어두고, 세종이 세조에게도 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하고, 세조가 ‘성상의 마음’이니 ‘길한 징조’이니 운운했다고 적어둔 이유는 분명하다. 수양대군이 이미 세종으로부터 후사 왕(後嗣王)으로 점지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다만 이 시는 국왕으로서 지켜야 할 경천근민의 이념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제왕의 시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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