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 방식으로 전했을 뿐”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9.1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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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한 김기덕 감독

지난 9월11일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김기덕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학력도, 줄도, 배경도 없이 영화 하나로 자신을 세상에 알린 사나이.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타며 100년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김기덕 감독(52).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개인적인 이력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스스로를 “열등감을 먹고 자라난 괴물이다”라고 칭했다. 자전적 영화 <아리랑>에서 그는 자신의 성장 배경을 조금 흘렸다. “폐차장에서 차도 때려부수고, 그림도 그리고, 전자제품도 만들고, 길거리에서 그림도 그리고…. 그때는 늘 외롭고 초라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내가 살았던 대로, 내 몸에 스며든 대로, 내 몸에 느껴진 대로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무지 외롭다. 나는 친구도 없다. 초등학교 때 내 친구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혼혈아였다. 걔가 내 유일한 친구였고, 걔만 나를 좋아해줬다. 사람이 많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러다 중학교를 못 갔다. 여자들만 많은 공장에서 기계를 고쳐주는 사람으로 일했다. 외로웠다. 근본적으로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았고, 남의 삶을 자세히 보는 기회가 많았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나 스스로 똥오줌을 못 가리면서 살았다. 만날 공장 가서 일하고, 열다섯에 공장을 가야 하는데 6시, 7시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는 베니스에서 그랑프리를 탄 뒤 귀국 기자회견에서 “상을 받는 순간 청계천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구리 박스를 들고 다니던 열다섯 살 내 모습이 생각났다”라며 그 시절을 다시 꺼내들었다. 

포털 사이트에 실린 이력을 보면 그는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일산의 농업전수학교를 거쳐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나온다. 대도시 주변으로 상경해 빈농 계급의 어려움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해병대 하사관으로 5년간 복무했고, 1990년부터 2년간 유럽에서 회화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이 부분을 “거리에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남들이 말하는 그런 ‘유학’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자기 도전적인 유럽 생활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싶다는 뜻 강렬하게 비쳐

그가 지독하게 자기 방식을 고집하기에 다른 이의 말 따위에는 상처를 받지 않을 것 같지만,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말과 사건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영화 <아리랑>을 통해 드러냈다. 그래서일까. 그는 갈수록 제작 방식이나 소통 방식도 자신이 직접 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2004년 <빈집>부터 철저히 김기덕필름 안에서 모든 것을 소화해내는 방식이나, 3년여의 칩거 끝에 컴백하면서 자신이 감독·촬영·편집·주연한 <아리랑>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 등이다. <피에타>로 컴백하면서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직접 출연한 것을 보면, 그가 지금 한국의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싶다는 의사가 굉장히 강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돈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벌었다. 비결은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이었다. 김기덕필름의 전윤찬 PD는 “국내에서는 <영화는 영화다> <풍산개>를 빼고는 다 적자를 봤다. 하지만 해외에서 수익을 내서 전체적으로는 적자를 낸 적이 없다”라고 밝힐 정도이다. 그러나 김감독은 국내에서 그의 영화가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영화를 외면하는 한국 관객이 그는 야속하기만 하다. 그에게 스크린을 열어주지 않는 대기업 자본의 멀티플렉스에 대해 날 선 공격을 퍼붓기도 한다. 이들의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 충무로 감독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귀국 기자회견에서도 한 언론사 사주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날 선 말을 했다. 그 신문사는 그가 ‘2백만원짜리 옷을 입고 30만원짜리 신발을 신는다’라고 보도했다. ‘늘 돈이 부족해 어렵게 예술영화를 힘들게 만든다’고 알려진 그의 대중적 이미지와 ‘2백만원 옷값’이 충돌한 셈이다. 그는 “언론사 회장 집에 초대되어 가보니 사소한 의자 하나도 다 계산이 안 되는 예술품이더라. 남편들이 개같이 돈을 벌고, 메이저라고 하는 사모님들은 문화와 자선을 한다. 앞뒤가 안 맞다. 극장도 그렇고…”라는 말을 했다.

김감독의 오늘의 생활은 그의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평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4년부터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있는 집에 살고 있다. <아리랑>에서 이 집에 전시되어 있는 각종 영화제 수상패와 그의 그림 작품이 소개되기도 했다. 자녀와 부인이 이 집에 살고 있다. 그는 작업 공간으로 <아리랑>에도 등장하는 ‘강원도 오두막집’을 이용한다. 이 집터를 고르고 태양전지판을 달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든 것도 모두 그가 직접 한 것이다. 10대 시절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잔뼈가 굵은 데다 그림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인지라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그는 영화 소품으로 쓰이는 권총을 선반 기계를 이용해 직접 만들기도 한다.

그가 영화라는 생업에 나서는 일터는 지난 몇 년간 강원도 오두막이다. <아리랑>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다. 그가 직접 출연했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파계승이 한겨울에 허리에 맷돌을 묶고 산을 오르는, 비탈에서 굴러떨어져도 다시 산을 올라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는 “나한테 인생이란 가학과 자학과 피학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겨울 오두막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장면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충무로의 이단아’, 한국 영화계의 주류로 진입할까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 기간 중 한국 유명 영화인과 몇몇 기자가 현지 한인 식당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하려 했다. 우연찮게도 김기덕 감독이 이창동 감독과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식당 입구에 서 있었다. 많은 영화인이 합석을 권했지만 그는 손사래만 쳤다. 다른 영화인과 함께하는 자리를 그는 몹시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감독과 충무로 영화계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김감독은 흔히 ‘충무로의 이단아’라고 불린다. 전통적인 충무로 제작 방식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어온 그의 작업 스타일을 시사하는 별칭이다.

그는 시작부터 비주류였다. 1995년 <무단횡단>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은 그는, 1996년 <악어>로 곧바로 메가폰을 거머쥐었다. 연출부 생활이 없었기에 선배나 은사 감독도 없다.

그럼에도 김감독의 초기 영화는 주류 영화사와의 협력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명필름(<섬> 제작)이나 LJ필름(<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쇼이스트가 그의 파트너였다. 그는 제작자와 투자자에게 거의 매번 짭짤한 수익을 안겨주는 ‘좋은 감독’이기도 했다.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는 “유럽 등에서 흥행에 성공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아마 충무로 사상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영화일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2004년 <빈집> 이후 김감독의 행보는 많이 달라졌다. 같은 해 <사마리아>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빈집>으로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까지 거머쥔 김감독은 <빈집> 흥행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빈집>은 전국에서 9만4천9백28명이 관람하는 데 그쳤다. 전통적인 개봉 방식에 회의를 느낀 김감독은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려 했다. 기존 배급사를 통한 떠들썩한 개봉 대신 자신이 직접 극장과 접촉하고 조금씩 상영관을 늘려가는 방식을 2005년 <활>로 실험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집계에 따르면 <활>은 1천3백98명만이 보았다. 2006년 그는 “한국도 내 영화 수출국 중 하나에 불과하고, 이번이 마지막 수출이 될 것이다”라는 깜짝 발언과 함께 <시간>을 개봉했으나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

김감독은 2008년 자신이 처음 제작한 <영화는 영화다>의 흥행으로 주류로 진입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화는 영화다>의 배급대행사가 파산하면서 그는 가장 크게 흥행하고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독한 역설을 경험한다. 이어 자신과 일했던 젊은 감독과 프로듀서가 자신을 떠나 대형 투자배급사와 손잡고 대형 흥행작을 만들어내게 된다. 충무로의 냉혹한 흥행 메커니즘에 대한 김감독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피에타>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김감독의 충무로 입지는 많이 달라질까. 그의 영화를 향한 투자자들의 시선은 대체로 부드러워지겠지만 대형 투자배급사가 적극적으로 돈을 대겠다고 나서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해외 예술영화 시장에서 김감독의 영화는 더욱 각광받겠지만, 여전히 국내에서는 돈이 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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