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해외 투자로 1조원 손실 보았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2.10.1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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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식 의원의 국정감사 금융권 실태 공개에서 드러나

2009년 9월29일 황영기 당시 KB금융 회장이 서울 명동 KB금융 본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직원으로부터 재직 기념패를 받고 있다. 황회장은 우리은행 근무 당시 파생상품 투자와 관련한 손실이 발생한 데 대해 금융위원회의 징계를 받고 사의를 표명했다. ⓒ연합뉴스
검투사는 1 대 1로 싸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물러설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공격’이 숙명이다.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은 금융계 ‘검투사’로 통한다. 황 전 회장 자신도 검투사가 되기를 원한다. ‘최고경영자(CEO)는 지면 죽는 검투사와 같다’가 황영기 전 회장의 좌우명이다. 그는 공격 경영으로 유명하다. 강한 추진력으로 우리금융을 3년 만에 국내 최대 금융 그룹으로 키웠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출혈이 적지 않았다.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은행장으로 재임 시절 1조원이 넘는 돈을 해외 투자로 잃었다.

김기식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 금융권 해외 투자 실태를 공개하면서 은행들의 무리한 해외 투자가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황영기 행장 시절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날린 우리은행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김기식 의원은 “파생상품에 투자해 1조원이 넘는 손실을 입은 우리은행의 경우는 ‘묻지마 식 해외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위험에 대한 충분한 사전 조사, 적법하고 신중한 의사 결정,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및 관행의 개선, 금융 당국의 제대로 된 정책 방향과 관리 감독 등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김기식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금융권 해외 투자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 김기식 의원실 제공
황영기 전 회장 시절 파생상품에 투자해

우리은행이 다른 은행에 비해 손실액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파생상품에 투자해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김기식 의원이 <시사저널>에 제공한 ‘금융권 해외 투자 손실 내역 세부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우리은행은 모두 2조5천4백억원을 해외에 투자했다. 그중 파생상품 투자가 1조원에 달한다. 현금 채권에 9천4백30억원, 펀드에 3천7백억원을 투자했다. 주식 투자는 1백83억원으로 미미했다. 파생상품에 47%, 현금 채권에 37%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액수만 놓고 보면 파생상품 때문에 손실을 보았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손실액 부문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은행은 2003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모두 1조3천억원을 해외 투자로 날렸다. 그중 파생상품 투자로 잃은 돈이 1조원이다. 총 손실액 중 81%에 달하는 수준이다. 파생상품에 넣은 돈 가운데 90%를 잃었다. 은행이 발행하는 중·장기 금융채인 현금 채권에도 9천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지만 손실액은 1천2백억원에 그쳤다.

금감원 내부 인사에 따르면 당시 우리은행의 파생상품 투자는 주로 메릴린치, JP모건, 도이치뱅크, 리먼브러더스 등이 내놓은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에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부채담보부증권은 미국 금융시장에서 나온 파생 금융 상품이다. 회사채나 금융기관의 대출 채권, 여러 개 주택담보대출을 묶어 만든 상품이다. 한때 1조 달러어치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가격이 폭락해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안겼다. 신용 부도 스와프는 위험성에 프리미엄을 적용한 상품이다. 기업이 파산해 원리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사고파는 신용 파생상품이다. 이름만 들어도 복잡한 파생상품은 금융 상품 중에서도 가장 고도화되고 전문적인 상품으로 통한다. 복잡한 만큼 위험성도 크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검투사’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손을 대기 힘들다.

우리은행이 이처럼 고도화된 상품에 1조원 이상을 투자한 것은 황영기 전 회장의 영향 때문이다. 투자의 대부분이 황 전 회장이 재임하던 시절에 이루어졌다. 황 전 회장은 등장부터 화려했다. 2004년 3월부터 2007년 3월까지 3년 동안 우리금융지주 회장 및 우리은행장을 동시에 역임했다. 황 전 회장이 부임하기 전에는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 자리가 나뉘어 있었다. 윤병철씨가 회장을, 이덕훈씨가 은행장을 맡고 있었다. 금융권의 한 인사에 따르면 윤병철 회장과 이덕훈 행장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금융권의 거목인 윤회장이 맏형처럼 받아들이며 넘어가는 관계가 이어졌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의 증언이다. 이후 황영기 전 회장은 당시 우리금융에 이력서를 내며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을 통합해야 은행이 잘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황 전 회장은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우리은행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예대 업무 치중했던 은행에 ‘검투사’ 주문

우리은행으로 오기 직전 황 전 회장은 삼성증권 사장을 역임했다. 증권사는 고객 자산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반면 은행은, 고객의 자산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황 전 회장은 그동안 예대 업무에만 치중해오던 우리은행에서 검투사 기질을 발휘했다. ‘영업사원은 검투사가 되어야 한다’라며 내부 분위기를 다졌다. 투자를 관장하던 IB(투자은행)사업본부를 강화했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에도 열을 올렸다. 은행의 수익 구조가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황 전 회장 체제하의 투자 손길은 파생상품으로까지 뻗쳤다. 파생상품 투자에 신중을 기하도록 했던 각종 빗장을 하나씩 없애나가기 시작했다. IB 부문에 신용 부도 스와프 및 부채담보부증권에 대한 투자 확대를 종용했다. 은행의 경영 목표는 이사회의 심의·의결 사항이었다. 황 전 회장은 2005~06년 사업본부별 목표 설정 계약을 체결할 때 자산 증대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이사회가 정한 목표보다 10.5~17.7%까지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IB본부에 대해 전년 대비 자산 수익 증대 목표를 크게 올렸다. 또, IB본부가 부채담보부증권 및 신용 부도 스와프에 투자할 때 리스크관리심의회의 사전 심의 절차를 폐지했다.

‘검투사’라는 별명답게 황 전 회장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2005년 6월 상근 감사위원으로부터 부채담보부증권 투자 확대와 관련해 유동성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대책을 마련하라는 등의 요구가 있었지만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사회도 그를 막지 못했다. 당시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은행장과 금융지주 회장을 겸임했던 황 전 회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당시 이사회가 유일했다. 하지만 이사회도 황 전 회장이 정부의 탄력을 받고 온 인물이다 보니 견제가 힘들었다”라고 전했다. 결국 황회장은 금융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게 되었다. ‘금융기관의 건전한 운용을 저해해 경영을 위태롭게 하거나 중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했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대해 황 전 회장과 금융위는 법적 공방을 펼치고 있으며, 해당 건은 현재 대법원에 올라가 있는 상태이다.

황 전 회장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단순히 예대 업무에만 치중하던 은행권에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도 있다. 금융권의 한 인사는 “당시 황영기 회장 체제 때부터 은행장에게 ‘CEO(최고경영자)’라는 직책이 함께 따라다녔다. 황영기 회장 체제를 시작으로 ‘은행도 투자를 하는구나’라는 분위기가 전 은행으로 확산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손실을 보기는 했지만 은행권의 투자가 걸음마 단계인 상태에서 의미 있는 선구자적 도전이기도 하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고객의 돈으로 조직에 손해를 입힌 황 전 회장에게 ‘1조원 손실’이라는 꼬리표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평가된다.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은 “은행은 증권사와 달리 고객의 돈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외국의 투자 은행들처럼 전문 인력이 제대로 갖춰졌는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무리하게 투자한 것은 분명 비판받을 일이다”라고 말했다. 금감원의 한 인사도 “(파생상품이) 해외에서 수익이 나는 것을 보고 뒤늦게 뛰어들어서 손실이 나니까 시장 급변을 탓하는데 은행은 그것까지 포함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다른 은행과 달리 1조원이라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파생상품에 투자해 손실을 봤기 때문에 이것은 책임 여부를 따질 것도 없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법정관리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은행권은 지금 부실 채권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웅진홀딩스, 극동건설 등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부실 채권에 대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4대 은행(우리·신한·하나·KB국민)이 연말 부실 채권 비율을 충족하려면 4분기에 1조7천억원가량의 부실 채권을 처리해야 한다. 기업 금융이 많은 우리은행의 부담이 가장 크다. 총 기업 대출 규모는 96조원이다. 국내 은행 중 최대 규모이다. 우리은행은 웅진홀딩스의 주 채권 은행이다. 웅진홀딩스, 성동조선해양 부문의 손실이 커지고 있다, 우리은행의 6월 말 기준 부실 채권 비율은 1.77%이다. 연말 목표치 1.70%를 맞추려면 남은 4분기에 1조원 정도의 부실 채권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은행도 이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빗장을 걸어잠그며 리스크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우리은행은 자기 자본의 1%를 넘는 대출을 할 경우 리스크관리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할 예정이다. 법적 대응도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웅진홀딩스가 법정관리 신청 직전 계열사 두 곳에서 빌린 5백30억원을 갚은 것에 대해 고소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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