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문서 ‘밀실’에서 꺼낼 실마리 찾았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10.2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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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최봉태 변호사

지난 10월11일 일본 도쿄 지방법원 앞에서 최봉태 변호사(오른쪽)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한일협정 문서 완전 공개에 대해 ‘공개 판결’이 내려진 것을 알리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최봉태 변호사(50)는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변호를 맡고 있다. 우리 정부가 강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과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 막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변협에서 ‘일제 피해자 인권 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소속된 법무법인 ‘삼일’은 3·1절을 상징한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21세기 ‘독립군 변호사’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군들이 들었던 ‘총’ 대신 ‘법전’을 든 것이 다를 뿐이다.

최변호사는 지난 1992년에 사법연수원(21기)을 수료한 뒤 변호사로 나섰다. 하지만 그가 걷는 법조인의 길은 남들과 달랐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약 3년 동안 일본 도쿄 대학에서 유학한 것이 큰 전환점이 되었다. 최변호사는 일본인 변호사들과 만나면서 ‘일제 강점기 피해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 변호사들이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가해자인 일본의 변호사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일본의 양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의 시민단체 등과도 접촉하면서 ‘과거 청산’에 푹 빠져 든다. 일본의 양심 있는 법조인과 시민 활동가들이 힘을 모으면 ‘과거사 청산’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최변호사는 그 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제 강점기 피해 회복’에 적극 나섰다.

지난 5월24일 대법원은 사상 최초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도 최변호사가 있었다. 승소하기까지는 험난했다. 일본 법원에서도 소송을 진행했으나, 모두 패소했다. 한국 법원에서도 소송을 냈지만, 1·2심에서 졌다. 하지만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재판이 완전히 뒤집혔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측 변호인은 김앤장이었다.

한일협정이 일제 강점기 피해자 소송에 걸림돌

그런데 ‘일제 강점기 피해 회복’을 하다 보니 한 가지 큰 걸림돌이 있었다. 지난 1965년에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체결한 ‘한일협정’이 그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협정을 들며 “일본의 책임은 끝났다. 더 이상의 배상은 없다”라고 발뺌했다. 하지만 한일협정은 ‘밀실 협상’이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외면했다. ‘과거 청산’이라는 국민적인 요구를 저버렸다. 대신 일본의 강제 점거를 묵인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검은 거래’를 한 것이다. 누가 보아도 불평등한 협정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한일협정 문서 공개’는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문서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야만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2008년에 약 6만쪽 분량의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했지만 25% 정도는 비공개로 하거나, 먹칠한 상태였다. 중요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에 최봉태 변호사는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강제 징용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등과 함께 일본 정부(외무성)에 한일협정 문서의 완전 공개를 요구하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다. 법정 대리인으로는 일본인 변호사 등이 나서주었다. 이때가 2008년 10월이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의 이용수 할머니(85)도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 이때부터 최변호사와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 4년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 말리는 싸움을 시작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수시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 정부가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것에는 명분이 없다. 일본법상 외교 문서는 30년이 지나면 공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도 한일협정 문서는 예외였다. 5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공개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봉태 변호사는 여기에 일본 정부의 꼼수가 있다고 본다. 그는 “협정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서 내용이 일본 정부에 불리하지 않다면 왜 공개하지 못하겠는가. 여기에는 공개되어서는 안 될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서가 전면 공개되면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얼마나 부당한 주장을 했는지가 밝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외교 비밀’을 찾아내는 성과도 거두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문서가 공개되면 외교적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고, 한국과의 신뢰 관계를 해칠 수 있다. 또 향후 북한과의 교섭에서 불리할 수 있다’라는 점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한일협정 관련 문서철에 비공개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들어 있었다. 한일협정에 숨겨진 비밀을 캘 열쇠를 찾은 것이다. 여기에는 북·일 관계 조약에 미칠 영향, 독도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분쟁, 해상 경비에 대한 기밀 사항, 일본 천황과 한국 정부 고위직과의 대화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 특히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불리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협정 체결 당시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해 ‘일본 영토임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다. 한일협정을 맺기 전에 우리 정부의 최고위직에 있던 사람이 일본 천황을 만난 것이다. 두 건의 대화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두 명이 따로 만난 대화록인지 아니면 한 명이 두 권의 대화록을 남겼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다만 여기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협정을 맺기 위해 어떤 물밑 협상을 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문서 내용이 완전 공개되면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2008년에 제소해 4년 만에 ‘공개’ 판결 받아내

드디어 지난 10월11일 오전 10시30분, 일본 도쿄지방법원에서는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한일협정 문서 완전 공개에 대해 ‘공개 판결’을 내렸다. 물론 100% 공개는 아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하라는 판결이다. 재판부가 우리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우리측 원고와 변호인들도 ‘공개 판결’를 내릴지 반신반의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판결이 나온 후 이용수 할머니는 재판장을 향해 “고맙습니다. 재판장님”이라며 깍듯이 인사까지 했다. 동행했던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 등도 일제히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 이번 승소는 지금까지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소송을 내 유일하게 이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외무성)가 1심 판결을 받아들이면 한 달 이내에 문서가 공개될 수 있다. 하지만 항소할 경우 기약이 없다. 얼마 전 기자가 만난 아사히 신문의 한국 특파원은 “외무성이 항소할 것 같다”라고 전했다. 원고측인 최변호사나 이용수 할머니 등은 일본 정부의 ‘항소 포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최변호사는 “2008년에 제소한 후 4년이 걸려서 ‘공개 판결’을 받아냈다. 일본 외무성이 항소하면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일본측은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자기들이 재판에 패소해도 위안부 피해자 등이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하는데, 도대체 우리 외교부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 재판에 상관없이 외교적인 교섭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모른 체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자주 국가의 외교부인지 이해가 안 된다”라며 개탄했다.

이번 승소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벌어진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 여러 번 참여했다. 그때마다 패소 판결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 승소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박정희 정권이 채운 민족의 족쇄가 드디어 풀렸다. 한일협정을 전면 재개정하기 위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라고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다. 과연 한일협정과 관련된 판도라의 상자는 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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