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은 국가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인가”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2.10.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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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김훈 중위 사망 사건 진실 추적 14년째 계속하고 있는 김척 예비역 중장

1998년 421GP에서 의문사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이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1997년 11월30일. 이날 전역식을 가진 3군 부사령관 김척 중장의 머릿속에는 지난 32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육사 졸업(21기)과 함께 1965년 소위로 임관한 이후, 30사단장, 1군단장 등을 거치며 야전에서 병사들과 함께했다. 정치 성향 없이, 오로지 군인으로서의 명예만을 생각해온 원칙주의자로, ‘FM 군인’으로 존경받았던 그였기에 더욱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이날 그의 옆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아들이자 후배 군인 김훈 중위가 있어 그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아들은 존경하는 아버지처럼 ‘참군인’이 되겠다며 육사(52기)에 지원했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경비중대 2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훌륭한 군인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장남이 이날 이후 불과 두세 달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98년 2월24일이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부터 JSA에서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2월25일)을 하루 앞두고 북한군과의 우발적인 사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불과 열흘 전에 외박을 나왔을 때도 명랑했고, 집에서 자신이 쓰던 TV와 컴퓨터를 들고 귀대했고, 돌아오는 3월1일 아버지 생일 선물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친구와 상의도 한 아들이 갑자기 자살이라니,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국회·대법원·군 의문사 진상위 등에서 모두 “자살 아니다”

김척 예비역 중장(67)은 32년을 최전방 등 야전에서 뒹굴었던 군인이다. 현장을 확인하면서 그는 분명 타살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너무나 명백한 정황이었으므로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벌써 14년이 흘렀고,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육군과 국방부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자살로 결론지었고, 그 입장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살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김씨 등 유족의 몫이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진실 찾기를 위한 김씨의 집요한 추적과 눈물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난 32년간 군에 몸 담아왔던 그가 이후 14년 동안 군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운명을 맞은 셈이다. <시사저널>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언론에서 이 사건에 대한 타살 의혹을 집중 부각했고, 이 사건이 5백8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JSA 공동경비구역>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면서 세간의 관심도 높아졌다.   

기자가 김씨를 처음 만난 것은 사건이 벌어진 지 4~5개월이 지난 1998년 여름 무렵이었다. 그는 이후 기자를 만날 때마다 한아름씩의 자료를 들고 와서 자살이 될 수 없는 증거와 정황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국제적인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의 법의학자로서의 소견도 ‘타살’임을 확신하게 했다. 무엇보다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데 대해서는 군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김훈 중위가 스스로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면, 오른손에 화약흔이 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노박사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의 일관된 의견이고, 이는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군은 여전히 김훈 중위가 우울증과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역량과 인맥을 총동원했고, 국회에 매달렸다. 1998년 국회 국방위원회에 ‘김훈 중위 진상규명소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99년과 2010년, 2011년 그리고 올해 201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국정감사 때 이 사건이 다루어졌다.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김훈 중위 사건을 단순 자살로 규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의혹이 많다며 군을 질타했다. 2006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설치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지난해 8월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일부 개정된 것 또한 김씨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다.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2006년 대법원은 김씨 등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배소송 판결에서 ‘군이 초동 수사를 엉망으로 해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라며 국가에 일정한 배상 책임을 물었다. 사실상 군의 자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2009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군이 김중위가 자살한 증거로 내세웠던 판단 근거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자살로 보기 어렵다’라고 결론 내렸다. 다만 타살에 대해서도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결국 ‘진상 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에는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에서 다시 김중위 사망 사건을 집중 조사했다. 지난 3월 군부대 사격장에서 총기 발사 시험까지 벌이는 등 면밀한 검토 끝에 역시 ‘자살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8월6일 권익위는 ‘진상 규명 불능 결정에 따른 순직 처리 권고안’을 육군본부에 제시했다. 타살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업무 수행 과정에서 숨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순직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이었다. 지금껏 자살자는 순직 처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군은 여전히 ‘자살’로 몰아가고 있어

육군은 지난 7월1일 개정된 국방부 훈령 ‘군 수사 결론과 타 국가 기관의 조사 결론이 다를 경우에는 타 국가 기관의 권고 또는 조사 결론을 가지고 심사한다’라는 내용에 따라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할 듯한 입장을 나타냈다. 실제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직무 관련성이 있다면 자·타살 여부와 관련 없이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씨는 이것만으로도 억울하게 숨진 아들의 명예를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은 다시 꼬여가고 있다. 육군은 바뀐 훈령에도 지난 8월20일 국방부 조사본부에 재조사를 의뢰했다. 그리고 국방부는 사실상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국방부 입장을 확인한 민주당 진성준 의원 측은 “국방부는 지금 김중위의 순직처리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 중인 것으로 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자살이다”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김씨의 목소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국회, 대법원, 군 의문사 진상위 그리고 권익위까지 무려 4개 국가 기관에서 김중위 사건을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오직 군만이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지금도 ‘자살’이라고 혼자 되뇌고 있다. 자살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자살이라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아들을 정신질환자로 몰아가려 한다. 도대체 군은 국민과 국가 위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러고도 군이 국민의 군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김훈 중위 사건은 군 의문사 사건의 상징이자 바로미터로 각인되고 있다. 이 사건이 결국 어떻게 처리될지에 수많은 군 의문사 관련 유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씨는 “그래서 육군과 국방부가 더욱더 ‘자살’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훈 중위 뒤에 48명의 군 의문사 진상 규명 불능 대상자들이 줄을 서 있다. 군은 김훈 중위 사건에서 밀리면 나머지에서 모두 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김씨는 “이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군에서 의문사한 아들을 둔 많은 부모를 만났다. 3성 장군 출신인 나도 이렇게 군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수없이 절망해왔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했겠나”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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